[묵상글]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전봉석 2024. 12. 30. 06:06

 
오늘 너는 알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맹렬한 불과 같이 네 앞에 나아가신즉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사 네 앞에 엎드러지게 하시리니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는 그들을 쫓아내며 속히 멸할 것이라
신 9:3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3
 

 
신앙은 말씀을 듣는 데서 시작한다. 우리 스스로 비우거나 채워 이뤄지는 게 아니었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때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누가 싫고 무엇을 하기 싫어한다. 그럴 때 오늘 말씀 첫 구절과 같이 “이스라엘아 들으라” 하고 외치신다(1).

 
우리는 본래 “목이 곧은 백성”이다. 이는 불순종과 거역함이 몸에 뱄다. 어리석고 거만함 따위 늘 우리를 먼저 지배한다. 이를 하나님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출 32:9).” 하시면서도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33:3).” 이에 늘 노심초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린 그저 어리석고 아둔하며 누가 뭐라 이르면 싫어하고 각자 길로 가기 바쁘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 10:16).” 곧 자신을 주께 드려 스스로 자신이 언제든 목이 곧은 자일 것을 대비해야 한다. 이처럼 ‘목을 곧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완고함, 곧 불신앙을 나타낸다. 이는 주로 자신의 일이 형통할 때나 그에 따라 교만하여짐으로 범하게 되는 우쭐거림, 과시, 자기 확신을 뜻하는 죄다.

 
“그들이 견고한 성읍들과 기름진 땅을 점령하고 모든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과 판 우물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허다한 과목을 차지하여 배불리 먹어 살찌고 주의 큰 복을 즐겼사오나 그들은 순종하지 아니하고 주를 거역하며 주의 율법을 등지고 주께로 돌아오기를 권면하는 선지자들을 죽여 주를 심히 모독하였나이다(느 9:25-26).”


 
이상한 일은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시련이 약이다. 공격적인 세상 풍파가 우리로 근신하게 하고 주를 바라며 의지하게 한다. 어제도 뜻하지 않은 비보로 전 세계가 놀라고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겼다. 항공기 추락사고로 탑승객 181명 가운데 두 명이 살고 나머지는 모두 죽는 대형 참사였다. 나는 이와 같은 참혹함을 볼 때 두 가지를 마음을 먼저 새기게 된다. 하나는 우리의 미천함에 대하여 이처럼 한 생에서 여러 고난이 끝내 이어지는 것에 대하여 이 땅에서의 고달픔을 생각한다. 다른 하나는 그런 가운데서도 누구는 서로 탓하고, 어디로 문제의 원인을 서로 전가하며 원망할 대상을 찾는, 우리의 본색을 보며 치를 떤다.


 
올해 마지막 주일, 모처럼 교회 후원으로 점심 식사를 같이 하며 평소에는 잘 못 먹을 소고기를 먹으면서도 마음은 어려웠다. 눈길이 종일 뉴스에 가고 한 사람이라도 더 구출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저들 유가족들은 그 심정이 어떠할까? 생각하며 이를 지켜보는 내내 서로들 설왕설래하는 말들이 더 잔인하였다. 심지어 식사 중에도 아무개는 이 와중에 정부 내각이 어떻고, 이를 초래한 것이 어디인가? 하는 진영논리로 접근할 때, 뭐라 한 마디 퍼붓고 싶은 것을 그럴 수도 없고 하여 시선을 돌렸다. 마음이 안 됐고, 그런 가운데서 우리는 기도뿐임을, 저마다 말로 죄를 짓는 형국이다. 오늘 나의 이 한 날에서 주가 베푸시는 은혜에 송구하였다.


 
이때에 “맹렬한 불”로 우리를 소멸하시는 하나님을 연상하였다. 이를 그대로 읽으면 ‘태우는 불’, ‘소멸하는 불’로 이해된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신 4:24).” 누구의 잘못이냐가 아니라, 가뜩이나 이런 시국에 우리들로 하여금 주 앞에 바로 세우시려고 이와 같은 어려움을 더하신다는 생각에 두렵고 떨렸다. 성경에서 이러한 불은 ‘하나님의 진노’를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렘 4:4).”

 
정작 자신들을 돌아보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러한 사태를 통해 궁극적으로 주 앞에 용서를 구하며 살아야 하는데, 탄핵중인 아무개나 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국민의 안녕을 운운하며 마치 있는 자의 여유로움처럼 위로하고 격려하는 메시지들이 역겨웠다. 정작 주가 알게 하시려는 의도는,

 
“내가 너희를 모으고 내 분노의 불을 너희에게 불면 너희가 그 가운데에서 녹되 은이 풀무 불 가운데에서 녹는 것 같이 너희가 그 가운데에서 녹으리니 나 여호와가 분노를 너희 위에 쏟은 줄을 너희가 알리라(겔 22:21-22).”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목이 곧은 자’로 자신들의 죄를 알지 못할 때는 그 위협이 고스란히 모두의 것이 된다. 이런 때일수록 각각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정직과 사실규명과 잘못을 사과하는 모습이 너무나 간절한 때이다. 도대체 우린 왜 스스로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런 가운데 자신의 허물과 죄악을 덮으려고 남을 탓하고, 상대진영을 공격함으로 그에 동조하는 세력을 모아 그 힘을 등에 업고 여전히 자신들은 옳다고 외치는 모습이 한없이 답답하다.

 

아,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습 1:18).”

 
결국은 그렇듯 갈 데까지 가야 하는 것일까? 며칠 전 누가 물어본 죄의 속성에 대하여 나는 정의하기를 잘못을 알고 모르고, 죄란 결국 자기 아집에 빠져 갈 데까지 가려는 속성이 있다. 그러다 결국 ‘그 일’을 겪고 더는 돌이킬 수 없는 때가 오나니, 그때서야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을 돌아보기는 할 수 있을까? 죄란 그때에도 자신이 옳았다고 주 앞에서까지 자기변명으로 일관하게 되는 것을 본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참 희한하다 싶으면서도 그것이 우리의 속성인 것을 아시는 주께서 일갈하신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 그런데 그게 아버지의 뜻보다 자신의 뜻이 우선이다 보니 그 죄악이 참으로 맹랑하다. 하여 일찍이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이르시길,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이는 결국 우리 생에서 더는 기회가 없을 때가 온다. 속수무책 더는 손을 쓸 수 없는, 누군들 어제 그런 일을 겪으면서 자신이 그리 될 줄 알기나 할까? 그럼에도 이러한 역경은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의 임재, 그의 다스리심을 묵상하게 한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창 15:17).” 우리로서는 상상도 안 되고 그런 지경에 어찌해야 할지를 알지도 못할 때에,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출 3:3).” 우린 반응해야한다.

 

결국 저들 가나안의 역사는 그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 맹렬한 불에 지푸라기 타듯 순식간에 사그라질 것을 시사한다. 그 땅은 본래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모든 게 다 주의 것이나 그것으로 자신이 악행할 때 주는 이를 묵과하실 수 없다. 그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시리니 너는 그들을 급히 멸하지 말라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를 해할까 하노라(신 7:22).”
 

하여 나는 자주 언급하고 또 나 자신에게도 자주 인지시키는 게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세상을 향해 주 안에서 의연하기를. 주를 신뢰함으로 어느 한 쪽으로가 아니라 주의 뜻을 헤아리며 온전하기를. “그러나 그 땅이 황폐하게 됨으로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희를 해할까 하여 일 년 안에는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고 네가 번성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얻을 때까지 내가 그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리라(출 23:29-30).”

 

궁극적으로 이 모든 일의 원인과 결과는 주의 자녀를 향한 것이다. 실제 하나님은 가나안에 대하여 1년이라는 유예기간을 두시고, ‘점진적으로’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실 것인즉 급히 멸하지 말라고 하셨다. 따라서 이러한 모순은 모순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심이다. 하나님은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더는 구제불능이라 해도 돌이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더, 한 번 더 주신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죄란 스스로의 의지로는 돌이킬 수 없다.
 

오늘 날 계엄을 선포한 사람이나 이를 옹호하는 세력이나, 저들도 자신들의 주장이 모순됨을 알 텐데도 ‘혹시나’ 하는 어떤 요행을 바라는 것인지? 서로는 서로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길로 이끌어간다. 이때 말씀에서 사용하시는 ‘속히’라는 말뜻에는 ‘허락되는 한도 내에서 가능한 한 빨리’라고 해석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일련의 사태와 사고를 지켜보면서 안타깝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런 가운데서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묵상한다. 이를 바로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맹렬한 불”로 그 상황을 비유하시며 하나님의 권능과 진노가 그냥 없었던 일로 사라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직면하게 하신다.

 

곧 점진적으로 멸망할 대상은 가나안 거민들이나 이를 언급하시며 길게 설명하게 하심은 그들의 사회나 국가 곧 그에 속한 우리 믿는 자들의 몫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에 우린 오늘 다시금 말씀을 왜 들어야 하는지를 먼저 분명히 알게 된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베푸시는 주의 은혜란…. 다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한 해 마지막 주일 성도들과 모여 식사라도 한 끼 하라며 후원의 손길을 더하는 일에서도….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주의 인자하심이란 참으로 귀하고 놀랍다. 아무리 어지러운 세상에서도 마음은 온전히 주를 바라게 하심으로 저들과 같이 부화뇌동하지 않도록 하신다. 다들 나름의 주장으로 어느 쪽이냐에 따라 설왕설래할 때 묵묵히 침묵함으로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하신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시 95:7, 6).

 

이는 오늘 이런 시국에서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분명히 밝히신다.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는 일어나서 산을 향하여 변론하여 작은 산들이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변론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미 6:1-2).” 그러할 때 하나님은 가나안의 죄악을 쫓아내고 멸하신 것처럼 교만한 자를 반드시 꺾으실 것이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사 14:13-14).” 이처럼 우리의 교만이 치를 떨게 한다. 그러나 그 결국은 참으로 비극적이어서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15).” 하시는 말씀에 두려워할 줄 아는 게 복이었다.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는 일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하여,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
 


이를 우리가 알고 인정할 때 참된 복락을 누릴 수 있다.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2).


 
우리가 다만 죄악 중에 머물렀다면, 그에 따른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이 없었더라면, 분명히 밝혀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신 9:5).” 오늘 우리의 은혜는 나의 공의나 정직함으로가 아니다. 저들의 악함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인함이다.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1).
 


이에 오늘도 주 앞에 엎드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