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말씀은 순결함이여

전봉석 2025. 1. 25. 05:39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수 1:8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시 12:6

 

 

지나온 길 위에는 흔적이 남는다. 어느 것은 상처가 되어 부끄럽다. 어느 것은 추억이 되어 따듯하다. 그곳에는 사람이 있고 사건이 있다. 저를 떠올리며 부끄러워하기도 그리워하기도 한다. 여기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었다. 여호수아가 그 길 위에 섰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수 1:1).” 그의 앞에 붙는 수식어는 모세의 수종자이다.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몸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특별한 은사로 그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다. 모세는 자신을 앞서 걸어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흔적을 따랐다. 이를 보며 자기에게 맡기신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하사 이 백성의 완악함과 악과 죄를 보지 마옵소서(신 9:27).”

 

여호수아는 홀로 그 길을 따르는 게 아니라 동행자 갈렙이 있었다.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민 14:24).” 저들이 걸어간 길 뒤로 삼손이 있고, 사무엘이 있고, 다윗이 있고, 이사야도 있다. 저들 앞에는 항상 수식어가 붙는데,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종…”이라 하신다(사 20:3).

 

혹은 스스로를 ‘주의 종’(삼상3:9)”이라 하였다. “이제 그대로 하라 여호와께서 이미 다윗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종 다윗의 손으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든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하셨음이니라 하고(삼하 3:18).” 바울도 자신을 일러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하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종이라 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고전 1:1).” 것이다.

 

‘모세가 죽은 후에’ 이와 같은 사실 앞에서 여호수아는 말씀을 듣는다. 여호수아를 ‘모세의 시종’이라 하는데, 시종(侍從)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을 뜻하면서 앞선 이의 길을 따라 수종드는 자이다. 여호수아는 모세를 보좌하다 그 뒤를 이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제2의 인물이 되었다. 모세는 언제나 여호수아와 같이 했다. “모세가 그의 부하 여호수아와 함께 일어나 모세가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며(출 24:13).”

 

여호수아에게 모세란 지척에서 모시고 따르던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신 또한 그 길을 걸어가게 된 것이다. 여호수아는 항상 모세와 같이 했다. 출애굽 후 첫 전투였던 아말렉과의 전투에서였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출 17:9).” 이후 시내 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도 동행했다. “모세가 그의 부하 여호수아와 함께 일어나 모세가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며(24:13).”

 

가나안을 정탐할 때는 여호수아는 갈렙이 열두 명 가운데서 오직 믿음으로 약속의 땅을 보고 이를 설명했다.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민 14:6-7).” 하며 저들은 그 땅을 신앙적으로 설명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8).”

 

여호수아는 모세 곁에서 충실히 모세를 보고 배웠다. 이에 오늘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나안을 정복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로 공식 지명셨고 인정하셨다.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보다 먼저 건너가사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하시고 네가 그 땅을 차지하게 할 것이며 여호수아는 네 앞에서 건너갈지라(신 31:3).”

 

이에 모세도 이를 인정하며 축복하였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7).” 여호수아는 모세가 죽을 때도 그와 같이 있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죽을 기한이 가까웠으니 여호수아를 불러서 함께 회막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에게 명령을 내리리라 모세와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회막에 서니(14).”

 

저는 이스라엘을 이끌고 요단을 건너야 한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복하는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긴밀한 관계임을 보여주신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수 3:7).” 구약시대의 말씀 전달은 직접적이었고, 음성과 꿈과 이상으로 나타내셨다. 여호수아는 모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그 음성을 들었으며 이를 따랐다.

 

요즘은 헌재에서의 탄핵심판을 찾아보곤 하는데, 훗날에 우리가 주 앞에 섰을 때를 생각하게 된다. 어제는 일련의 사태를 주도한 두 사람의 대질과 서로 말을 맞추듯 옹색한 변명을 볼 수 있었다. 당장은 서로의 주장으로 사실을 어찌 무마시킬 수 있을 것 같지만, 예전에 두 군사독재자들이 나란히 대통령을 하고 나란히 내란우두머리로 심판대 앞에 섰던 것을 뉴스에서 같이 보고는 한다.

 

이와 같이 '지나온 길은 흔적이 남는다.' 모세가 걸어간 길을 여호수아가 따라간다. 우리는 앞선 자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안중근은 자신의 뒤를 따르는 자를 염두에 두고 모든 일을 신중하게 결정하였다. 시간은 흘러 사람은 없어도 그의 흔적은 남는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약속만이 영원하다. 말씀은 모세에게 임하셨던 그대로 오늘 나에게도 이르신다. 여호수아가 들었던 말씀이 나의 귀에도 동일하다. 이를 후에 사사들이 들었고, 다윗이 들었고, 바울도 들었다. 이에 성경은 이르시길,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사 55:3).”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7-18).”

 

세상이 아무리 어지럽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란 게 그 한계가 있기 마련이지만, 말씀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언약으로 언제나 우리 곁에 거하신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 결국 우리의 흔적 또한 세월이 지나면서 무뎌지고 지워지겠지만 말씀은 영원하여, 우리는 오늘의 나에게 더하시는 주의 말씀을 각자의 은사대로 듣는다. 듣는다는 것은 귀로 들음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이것으로 몸에 밴다. 마치 해가 듣는 창가의 모든 사물은 색이 바라고 흔적이 남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여호수아는 여호수아이다. 그렇다고 여호수아가 모세는 아니다. 하나님은 이르시길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각각의 하나님으로 임재하셨음을 알리셨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마 22:32).” 고로 나의 앞서간 많은 믿음의 사람들의 하나님이 오늘 나의 하나님으로 말씀하실 때 이 말씀은 전적으로 나의 말씀이 된다.

 

이에 여호수아에게 일러 “함께 하리라” 하신 부분을 눈여겨보게 된다. “여호와께서 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인도하여 내가 그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하시니라(신 31:23).” 이에 내가 너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내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심과 ‘두려워 말라, 무서워 말라.’ 하심과 ‘강하고 담대하라.’ 하심이 ‘함께하기 때문이라는 단서가 된다.

 

이에 오늘 본문에서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8).”

 

하심도 같은 의미이다. 앞서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5).” 하시며, 하나님은 말씀으로 그 언약을 지키실 것을 분명히 하신다. 율법은 곧 말씀으로 저들의 모든 여정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자신들이 노예였던 시절도 가감 없이 기록하여 그때에도 하나님이 어찌 함께 하셨는가를 알게 한다. 이를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 하시는 것이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는 것은 ‘잊지 않도록 항상 외우라’는 단순한 의미를 초월하여 ‘묵상’할 것을 명령하신다.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이때 묵상은 사색이나 명상을 뜻하지 않는다. 버젓이 교회에서도 명상을 운운하고 사색을 논할 때가 있는데, 저것들은 스스로 비워낸다고 하는데 거듭 채워져서 생각이 더 많아지는 것들이다. 묵상은 그게 아니라, 말씀을 되새김질하듯 되뇌어 내 안에 쌓아가는 것으로 여러 생각이 쌓이는 것 같은데 실제 나의 생각이 비워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각자의 요구를 구하느라 정신이 없지만 그렇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기도하다보면 오히려 주의 뜻을 바라게 되면서 나의 요구가 사라지는 원리와 같다. 기도가 더욱 간절할 때는 나의 요구가 들어지지 않을 때이다. 그래서도 더욱 구하고 또 구하다보면 어느 순간 나의 요구는 간 데 없고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지는 것을 안다. 이는 묵상도 같아서 말씀으로 되새겨질 때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하시는 바로 그 ‘행함’으로 살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다.

 

이어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하시는 말씀은 결코 허상이 아니다. 가령 어제 새로 시작한 아이가 채 한 달도 안 돼 그만하게 되었다. 아내는 아이엄마와 통화를 하고 그 이유를 알았다. 아이는 새로운 관계를 어려워한다. 가까워지면 눈치를 보고, 새로운 관계는 멀리하면서 아이는 스스로 혼자 있는 외톨이가 편하다. 편하면서 외롭고 슬프다. 결국 자신의 '왜소증'으로 어디서 멈춘 성장과 그 외모로 인한 것이지만 아내는 어찌해야 하나, 하다 우선은 아이가 힘들어하면 그리하는 것으로 아이엄마를 설득했다. 나는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나설 관계가 아니어서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의도하고 생각하던 쪽으로 일이 잘 풀리는 게 형통이 아니다. 우리는 실제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당장 저 골목을 지나 무엇이 달려오는지 모른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형통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다. 각각 모세의 하나님으로, 여호수아의 하나님으로, 오늘은 나의 하나님으로 말씀은 언제나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 이를 “다 지켜 행하라” 하시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하심도 그리 되게 하시는 모든 일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처럼 말씀을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묵상함으로… 어느덧 햇살 가득한 창가의 모든 화초가 자라고, 사물들도 색이 바라면서 햇살이 듣는 흔적을 남기듯이… 오늘을 걸을 때는 모르겠으나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모든 게 다 은혜였음을 우리는 안다. 그러므로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고후 10:13).”

 

내 맘 같지 않은 길에서 문득 ‘어떤 흔적’이 남을 것을 생각한다. 곧 지나 얼마쯤 후에 나의 지금이 주의 긍휼하심이었음을, 갚을 수 없는 은혜인 것을, 저만치 지나온 길을 돌아볼 때면 상처도 얼룩도 부끄러움도 모든 게 다 희미한데 감사만이 또렷하게 새겨져 흔적이 되었음을 보게 된다. 곧 우리에게는 역경과 시련이 실패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치 강하게 눌러 찍은 도장과 같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강한 흔적은 인내의 자리에 선명하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6-7).” 모세가 죽었고 여호수아가 그 뒤를 이어 이 많은 사람을 이끌고 약속의 땅을 정복해야 한다. 이는 매우 두려운 일이며 겁나는 사실이다. 이때 하나님의 통치를 묵상한다면, 그가 택하신 이스라엘을 광야에서부터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여호수아는 그 흔적마다 주의 발자취를 보고 확신할 것이다.

 

말씀은 강하다.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수 1:5-6).” 이에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7).” 오늘도 이 말씀은 내 앞에 있다. 이를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8).” 그러므로 주 앞에 엎드린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시 12:6).

 

이는,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