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전봉석 2025. 1. 26. 05:31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수 2:10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시 13:5-6

 

 

자칫 은혜를 쏟을 수 있다. 하나님은 부어주시는데 이를 받을 그릇이 너무 작어서 넘쳐 흐를 때도 있다. 오늘 본문에서 라합을 통해 저에게 찾아온 은혜를 저는 놓치지 않고 붙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수 2:1).” 여리고 성을 함락하기에 앞서 이를 정탐하러 간 자들이 하필 라합의 집에 들어갔다.

 

‘라합이라 하는 기생’을 여관 주인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성경은 저를 기생이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렇고 신약에 와서 믿음의 선열들을 열거하며 소개하는 성경에서도 저를 그리 밝힌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히 11:31).”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 2:24-25).”

 

곧 라합은 단순히 여관 주인이 아니라 ‘기생’이었다. 성경에서 기생은 창녀로 설명한다. 히브리어 ‘조나’는 ‘간음하다’, ‘매춘하다’ 하는 뜻으로 ‘자나’에서 파생한다. 그러므로 여기는 단순히 여관이 아니라 ‘기생의 집’이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사담을 나누거나 몸을 섞었다. 그러다보니 가나안의 민심이나 정치, 군사 및 여러 나라들의 동태가 수시로 오가며 전달되는 장소였다. 기생 라합의 집은 또한 성벽 위에 있어 여리고 성을 조망하기에 매우 적절한 장소였다.

 

“라합이 그들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 내리니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음이라(15).”

 

이에 라합은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저들의 신 여호와의 이름도 들었고 그 모든 활약을 듣고 간담이 녹아있었다.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11).” 하는 라합의 진술에서 보듯 라합만 알고 있었던 게 아니라 여러 사람들, ‘우리가’ 들어 어떤 이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라합은 은혜를 입었다.

 

왜 하필 라합인지는 알 수 없다. 그것도 기생이라 하여 그 처지나 신분이 어떠할지 짐작할 수 있는데, 라합은 분명히 자신이 들은 것을 알았고 이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9).” 여기서 라합은 이를 아는 것이 우리가 아니라 ‘내가 아노라.’ 하고 밝힌다. 여럿이 들어 ‘우리가’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라합은 ‘내가 여호와를 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 곧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구속 주 ‘여호와’의 이름이 이방 여인 기생 라합의 입에서 나왔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광야 여정, 그리고 요단 동편 아모리 족속 정벌 사건 등을 라합은 들었고, 이에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그 능력이 어떠하심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가나안인들이 알고 있었던 여호와에 관한 지식은 ‘스스로 영원토록 계시는 인격적 유일신’이 아니라 히브리인들의 민족신으로 그 능력이 탁월한 신이라는 정도였다. 그래서 가나안인들 대부분이 여호와를 경외의 대상으로 보기 보다 단순히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 보았다.

 

그러나 라합은 여호와의 전능하심과 광대하심을 알았다!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11).” 우리가 아는 것보다 자신이 아는 것으로 라합은 한 걸음 더 들어가 ‘그 믿음에 근거하여’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만큼 여호와의 긍휼하심을 라합은 확신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12-13).”

 

이를 구하고 요구하는 것을 성경은 ‘라합의 믿음’으로 여기는 것이다(히 11:31, 약 2:25). ‘너희’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우리’는 이방신을 섬기는 가나안 거민으로 그 차이를 라합은 인정한다. 이에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 부른 찬양에서도 나타난다.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여러 나라가 듣고 떨며 블레셋 주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에돔 두령들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주민이 다 낙담하나이다(출 15:13-15).”

 

곧 이스라엘과 가나안을 대조하여 라합의 고백은 ‘가나안 모든 거민이 낙담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벌써 다 알고 있었다. 하여 거국적으로 정탐꾼을 잡으려고 온 자신의 백성들에게서 저들을 숨겨주고 이와 같이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수 2:13).” 이와 같이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거기서 다들 나름의 방책을 찾으려할 때 라합은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이와 같은 간구를 하고 확답을 구하는 것이다.

 

40여 년 전에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두려워했다!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민 13:31).” 그렇게 저들은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 악평하여 …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32-33).” 하고 그때에는 두려움에 떨다 결국은 돌이켜 광야로 다시 돌아갔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거꾸로 되어 가나안이 이스라엘에 의해 ‘간담이 녹나니’ 두려워 떨고 있었다. 라합의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먼저 저들은 이스라엘이 홍해 물을 마르게 한 사건을 알고 있었다(출 14:15-22).

 

그러니까 40여 년 전에도 이미 가나안은 이스라엘로 인해 간담이 녹을 정도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을 것이다. 이를 알지 못하고 지레짐작 열두 명의 정탐꾼 가운데 열 명의 다수가 악평을 하고 부정적으로 보고하면서 광야로 돌이킨 것이다. 라합의 진술에서 또 하나의 사실은 이스라엘이 요단 동편 아모리의 두 왕을 전멸시킨 사건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민 21:21-35). 전멸시킨 일은 완전히 파괴시킨 것을 의미한다.

 

곧 라합은 그와 같은 사실이라면 가나안 자신이 속한 여리고 성도 완전히 사라질 것이란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기독도 곧 크리스천이 자신이 살고 있는 성이 멸망의 성이란 사실을 알고 그곳을 떠나 영원한 천성을 향해 믿음으로 길을 나선 것처럼 말이다. 다들 안다고 해서 모두가 같이 아는 것은 아니다. 누구는 그리하여 자신들의 대책으로 그 일을 해결하려 하고, 기생 라합은 긍휼하신 하나님께서 더하시는 약속을 받으려 한다.

 

이 멸망은 ‘여리고’를 기점으로(6:21), ‘아이(8:26)’, ‘막게다(10:28)’, ‘하솔(11:11).’로 이어지며 점진적으로 가나안을 정복하게 될 것임을 라합은 알고 있었다. 곧 이 땅의 모든 게 다 멸망할 것임을 알 때 과연 우리는 그 ‘마음이 녹았고’ 두려워할 줄 알까? 나름은 지구의 종말을 짐작하고 실제 자연재해나 이상기후, 나라와 나라끼리 핵폭탄이나 원자로 등의 신기술과 신무기로 한순간 이 세상에 종말이 올 것을 알고는 있다. 그런데 정말 그 마음이 녹을 정도이기는 한지? 여기서 ‘녹았고’ 하는 말은 큰 공포와 두려움으로 완전히 절망하는 것을 뜻한다.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 아이 사람이 그들을 삼십육 명쯤 쳐 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수 5:1, 7:5).”

 

극도의 두려움으로 “정신을 잃었나니” 하는 오늘 표현에서 그 ‘영혼이 남아 있지 않으니’ 하는 말로 어찌 대항하거나 맞서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을 알 때 용기를 상실한다. 각국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서로를 위협하지만 실은 그것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온 세상이 멸망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안다. 이상기후가 어디 낙후된 나라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다들 알고 있다. 이에 라합의 표현과 같이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수 2:11).”

 

곧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심을 라합은 인정한다. 이는 모세도 백성들에게 알릴 때, “그런즉 너는 오늘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오늘 내가 네게 명령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신 4:39-40).” 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알 때 이를 인정하고 주의 긍휼하심으로 순종하는 삶이 복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받은 이와 같은 은혜가 귀한 것을 알 때 행여 이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은 자연스럽다.

 

아내는 문득 자신이 어느 훗날 주 앞에 섰을 때,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고 하실까봐 두렵다고 했다. 얼마 전 가정예배 때도 늙으신 우리 장모도 그와 같은 마음을 털어놓았다. 죽고 난 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이 나를 알지 못한다고 하시면 어쩌나? 하고 물은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늘 그와 같은 두려움이 우리 믿음의 증거이고, 이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이 말씀을’ 늘 묵상하며 되새기고 사는 일이다. 이에 천하의 바울도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이는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다. 우리의 안이함은 순간마다 스며든다. 적당하여 살만하거나 잠시 다른 데 마음을 두어 태만할 때가 자주 있다. 그래서 지혜는 말하길,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행동을 삼가느니라(잠 14:15).” 오늘 본문에서 여러 다른 사람들도 두려워하였으나 그것으로 아무 것도 안 하면 두려워하지도 않은 사람과 결과는 같다. 생각은 있어도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생각하지도 못한 사람과 다를 게 없는 것처럼, 두려워함으로 ‘자기 몸을 쳐 복종하게’ 할 정도로 우리는 은혜를 지켜야 한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이를 바로 안다면 가만있을 수 없다. 사랑한다면서 가만있는 사람은 없다. 지키고 더욱 가까이 하여 이를 잃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때 우리는 서로의 약속을 믿고 이를 바탕으로 행한다. 하물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그러한데 우리가 받은 은혜에 대해 그 은혜가 감격스러운 만큼 가만있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자신이 어떤 죄에서 구원을 받았는지, 그 약속의 말씀을 알았다면 어찌 그런가보다 하고 말 것인가?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우리의 기도와 간구는 믿지 못함이 아니요, 믿음으로 그리할 수 있다. 이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하시는 말씀으로 오늘도 라합의 행동하는 믿음을 눈여겨보게 된다. 두려워할 줄 안다고 다가 아니고, 마음이 녹아 정신을 잃을 정도라 해도 소용없다. 야고보 사도의 설교에서와 같이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이에,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시 13:5-6).

 

하여 오늘도 주께 간구하기를,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3-4).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0) 2025.01.28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0) 2025.01.27
말씀은 순결함이여  (0) 2025.01.25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0) 2025.01.24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0) 2025.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