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신 33:29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시 10:17-18
“너는 행복자로다” 하실 때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낀다. 행복하다는 것은 충만하다는 것이고 완전하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너는 지극히 행복하다” 하는 말씀으로 나의 어깨를 다독이시는 것 같다. 오늘을 사는 일에 이 한 날의 수고가 사명이고 은사이다. 은사는 하나님이 주시는 값없는 선물이다. 나로 이처럼 글을 쓰게 하시고 성경을 읽고 느끼고 감동하는 마음을 더하시는 것이 직분이기도 하다. 하여,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5-7).”
어제 아침에는 아이와 출근 전에 줌으로 만나 이 구절의 말씀을 나는 그렇게 설명하였다. 톨스토이의 질문처럼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할 때에 그 답은 단순하여, 주신 바 각자의 생을 다하는 동안 은사로 산다. 은사는 때마다 철마다 더하시는 은혜이다. 곧 하나님의 선물로 오늘도 이처럼 나는 주를 바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전 3:13).” 이에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5:19).” 하고 지혜는 말한다. 곧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그러니 이처럼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 앞에 나의 사정을 아뢰고 여러 생각과 상황을 두고 거리낌 없이 나아올 수 있는 것이 은사이다. 끙, 하고 허리를 펴고 서서 운전을 하고 교회로 올라오는 것도 은사이다. 그와 같이 각각의 은사가 같으면서도 다르니,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 12:8-10).”
이 모든 게 ‘성령으로’ 내게 더하시는 것이어서 그게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게 무엇이든지!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11).” 이를 알고 주를 바라며 주께 받은 것으로 족한 줄 알고 맡기신 바 이 한 생을 다하는 일이었다.
그리할 때 오늘 본문은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하신다. 여기서 ‘그들’은 세상일 터, ‘높은 곳’은 다들 애를 쓰며 갈구하고 사는 행복의 고지이겠다. 이에 우리는 이 싸움에서 승리한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가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신 32:13).” 우리로 항상 행복하게 하신다.
행복이란 내가 열심을 다해 추구하여 받는 것으로 정당한 몫이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5-16).” 하는 내용으로 저녁에는 가정예배로 드리다 이 구절에서 또 다시 감사하였다. 이는 마치,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21).”
오늘 이 한 날 한 날이 주가 내게 더하시는 날들로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23).” 그렇게 하여 더러는 고난으로 더러는 근심과 걱정으로 나를 몰아치시다가도 어느 순간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25).” 하심과 같이 내가 받은 은혜가 값없이 주신 은사로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되새기게 된다. 이에,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 33:29).”
하시는 오늘 말씀이 나를 향하신 음성으로 가득하다. 그러할 때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4-25).” 사랑을 받아본 사람은 그 사랑을 더욱 갈구하며 이를 소중히 지킬 줄도 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르시길,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이 또한 내가 내 의지로 하는 게 아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시는 주께로 나아갈 따름이다. 뭘 꼭 어떻게 해서 어떤 성과를 거둬야만 사랑을 받을 줄 아는데, 그 사랑을 받았음으로 나는 기꺼이 오늘 이 한 날의 수고로 족한 줄을 안다. 주가 다 이루신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하실 때 더러 마음을 쥐고 흔들던 어려움도 감사의 조건이 된다.
하여,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이를 확신할 때에 오늘도 넉넉히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 결국 오늘 본문의 열두 지파를 축복할 때에 가장 막내 지파로 베냐민을 두고 하시는 말씀에서 저를 ‘안전한 보호’로 하나님의 각별한 사랑이 저를 지키심을 감지하고 이 또한 나를 향한 말씀으로 더한다. “베냐민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살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마치도록 보호하시고 그를 자기 어깨 사이에 있게 하시리로다(신 33:12).”
나는 분명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 ‘그 곁에 안전히 살리로다.’ 하시는 말씀으로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온다. ‘그 곁’은 당연히 ‘여호와의 곁’, 하나님의 품속, 어머니의 자궁 같은 ‘긍휼’을 의미한다. 긍휼의 뜻은 실제 여호와의 자궁이란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앞서 말씀처럼,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롬 9:23).” 이에 대하여는,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18).”
오늘의 이 모든 난리와 난리 속에서도 우리는 주의 긍휼하심을 입은 자로 산다. 이는 베냐민 지파의 영토가 하나님께서 거하실 예루살렘 성전 곁이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셀라와 엘렙과 여부스 곧 예루살렘과 기부앗과 기럇이니 열네 성읍이요 또 그 마을들이라 이는 베냐민 자손이 그들의 가족대로 받은 기업이었더라(수 18:28).”
또한 이스라엘이 결국 남북으로 갈라져서 왕국이 분열될 때에도 베냐민 지파는 유다 지파에 결속되어 다윗 가문과 같이 하나님의 성전을 끝까지 지켰다.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다 온 족속과 베냐민 지파를 모으니 택한 용사가 십팔만 명이라 이스라엘 족속과 싸워 나라를 회복하여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돌리려 하더니(왕상 12:21).” 그러므로 말씀은 저들을 두고 약속하신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마치도록 보호하시고 그를 자기 어깨 사이에 있게 하시리로다(신 33:12).”
여기서 “자기 어깨 사이에 있게 하시리로다.” 하심을 상상하면 아버지가 자식을 등에 업은 모습이 그려진다. 또는 품에 안고 계시는 것을 연상할 수 있다. 사랑이란 그렇듯 감싸고 보호하여 하나로 있는 것이다. 두 어깨 사이에 머리가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이는 결국 ‘명예롭게 하신다’는 의미도 내포한다. 곧 저로 하여금 ‘머리가 되게 하신다’는 뜻이다.
이를 오늘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리며 전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신 33:1).”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말이 참 듣기 좋다. 이 표현은 모세의 남다른 쓰임과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극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모세는 선포하여,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로 전달한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그런 것이어서 누구도 감히 스스로를 그리 칭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일컬어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하시는 선언이다.
곧 하나님의 뜻에 따라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용하시는 바, 각각 그 시대마다 미약하고 적은 숫자였을지는 모르나, 언제나 남겨두신 씨와 같이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롬 9:29).” 즉,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사 1:9).”
하여 오늘을 살면서 이 시대가 아무리 악하고 아둔하여 진리를 저버리고 세상을 쫓아간다 해도 오늘의 나, 곧 적은 무리의 우리로 이 민족이 살고 나라가 보존된다. 다들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굴지의 교회들이 강단에서 ‘너는 어느 쪽이냐?’ 하는 연설한다. 이를 마치 설교처럼 선포하고 있다. 왜들 말씀을 전하는 시간에 빨갱이를 운운하고, 어느 쪽을 두둔하느라 여념이 없는지 모르겠다. 교회 이름이 불리고 나름 난다 긴다 하는 목사들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를 때 속상하다.
이번 법원소요사태에 앞장섰던 이가 어느 교회 전도사라는 뉴스에 가슴 아프다. 교회가 왜들 정치논쟁에 휘말리고 진영논리에 갇히는지 모르겠다. 다만 옳고 그름을 떠나 아무리 세상이 어지럽다 해도 ‘씨’, 또는 ‘생존자’를 그 시대마다 남겨놓으심으로 아직은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멸망하지 않는다. 그것이 오늘을 지키는 ‘나’이고, 말씀으로 가만히 자중하고 근신하는 ‘남은 자’의 존재이유가 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렘 31:7).”
이에 오늘도 이 한 날의 수고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소유된 모든 ‘하나님의 사람’으로 묵묵히 또한 무던하기를.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1-12).” 일련의 사태를 눈여겨보다보면 그 안에는 돈 때문이었다. 왜들 저렇듯 죽기 살기로 떠벌이고 사는가? 했더니 계엄 이후 어느 유튜버는 몇 억을 벌었네, 하루에 수 천을 버네, 하는 말들이 공공연히 뉴스가 된다.
하긴 저들은 또 모든 언론이나 뉴스가 다 좌파가 되었다고 하면서 자기들끼리의 방송으로 개인방송, 유튜브를 퍼 나르며 서로 공유하고 있는 것일 테니… 사람들 관심이 결국은 돈이겠다. 한 영혼을 가슴에 품고 씨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내 곁에는 여럿 있다. 교회를 확장하고 사람들을 끌어 모아 부흥이라는 말로 자축하지 않으려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다. 자기 한 영혼, 그 자신의 죄 된 속성으로 신음하며 매일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도 있다. 교회가 너무 비대하고, 사람들이 목사를 왕처럼 떠받들며 신봉하는 그런 부류가 아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6:10).”
세상은 본래가 세상이라, 세상다운 게 당연하다. 분명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8).” 완악한 세상을 두고 너는 어느 쪽이냐? 하는 것으로 씨름하는 게 아니라, 하박국의 기도와 같이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는도다 (셀라) 그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의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합 3:3).” 고로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시 17:7).
오늘도 주의 곁에 앉아, “…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살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마치도록 보호하시고 그를 자기 어깨 사이에 있게 하시리로다(신 33:12).” 이에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29).”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10:17-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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