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전봉석 2025. 1. 24. 04:58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신 34:7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시 11:7

 

 

우리의 생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거기까지이다. 모세는 그의 나이 120세에 모압 땅에서 죽었다. 그는 죽을 때도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 성경은 저를 두고 “여호와의 종” 이라 하신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신 34:5).” 훗날 그의 무덤은 아무도 모른다.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6-7).”

 

‘여호와의 종’이라 하심은 모세를 신실한 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는 격변의 시기에 태어나서 ‘애굽의 왕자’로 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종이 되어 살았다. 저를 두고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더 좋아했다’고 성경은 평가한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

 

우리는 살아서 자신에게 주어진 생을 다하기까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 간다는 일은 복되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세는 그렇게 모압 땅에서 죽었다. 저는 애굽 왕실을 떠나 광야에서 살다 광야에서 죽었다. 이는 ‘여호와의 입을 따라’ 살았기 때문이다. 모세를 ‘여호와의 종’이라 하심은 그가 ‘말씀대로’ 살며,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10).” 그는 죽음에 있어서도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약속의 땅 가나안을 지척에 두고 경계 밖 모압 땅에서 죽었다.

 

모세는 죽기 전에 자신의 후계자로 여호수아를 세웠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9).” 즉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으로 받고, 이를 대비하듯 후계자를 위해 기도하였다. 모세는 기도하는 사람으로,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와 이르되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하건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민 27:15-17).”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네 존귀를 그에게 돌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18-20).”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자는 죽음까지도 말씀을 따라 순종한다.

 

'그는 죽을 때도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여호수아를 앞세워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겠다. 그는 그런 마음까지도 주께 기도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세가 그 땅을 바라보는 것으로 족하다고 하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 본 후에는 네 형 아론이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12-13).” 더러 그 마음이 서운하고 답답하여도 주의 뜻을 따라,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이에 순응한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세우고, 신명기와 여호수아서에서 보여주듯 자연스럽게 후계 구도를 이어주었다. 그렇게 해서 여호수아는 모세를 대신하여 가나안을 정복하였다. 그 땅을 모세와 같이 말씀대로 분배하였다. 기도하는 사람은 말씀대로 살고,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순종하여 ‘지혜의 영’으로 충만하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신 34:9).”

 

하나님은 말씀대로 사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지혜의 영'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이를 여호수아에게도 덧입혀 주심으로 ‘참된 지혜’를 가지게 되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할 때 그에게 이러한 지혜가 충만히 임하였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로 인정하셨다. 이에 대하여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다고 성경은 일갈한다. 모세는 그야말로 특별한 사람이었다.

 

저가 선지자로서 또한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모든 자들보다 위대한 것은 먼저 ‘하나님과 가까이 지냈기 때문이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34:10).” 하는 표현에서 하나님이 그를 어찌 대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 모세는 이후 다른 선지자들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하듯’ 가까이하여 대면하는 사이였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출 33:11).” 무엇보다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목격하고 그 목전에서 대면하는 사이였다.

 

모세는 언제나 구하였다.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자 하나님은 이를 허락하셨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18, 19).” 실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본 사람은 모세 한 사람뿐이다. 하나님의 보면 누구라도 죽을 것이다.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20).” 그런 중에도 하나님은 기꺼이 모세의 기도에 호응하셨고 이를 승낙하심으로,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21-23).”

 

이렇게 모세에게 보이심은 물론 모세와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단 둘이 오랜 시간을 지냈다.' 따라서 모세는 누구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직접 체험한 사람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으로 살았던 사람이다.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신 34:11-12).”

 

저보다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며 물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직접 대면하고 교제하며 때를 따라 기도하고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았던 사람은 없다. 모세는 출애굽 당시 여호와의 이름으로 열 가지 재앙을 애굽에 내렸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율법을 받아 창시하였다. 이를 중재하여, 이 율법이 지속되는 한 이스라엘 중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이어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이 또한 예수의 신실하심을 모세의 신실함으로 설명하면서,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2-4).” 예수의 존귀하심을 나타낸다.

 

이는 하나님이 대면하여 아시던 모세에 관한 이야기이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신 34:10).”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깊고 오랜 교제를 통해 아는 것이다. 이렇게 아는 것은 인격적으로 경험적으로, 영적인 것으로 아는 것이다. 오늘 내가 주를 안다고 할 때 나의 이 앎은 그러하여 비록 나의 육신은 나이들고 병들어가나 '나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으로 하나님을 알고, 앎으로 주를 더욱 사랑하는 앎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고전 8:3).”

 

오늘도 나의 이 시간이, 이와 같은 실행과 시간이 주를 사랑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모세와 친밀하셨던 그 사이, 그 관계로 나의 속사람도 날로 더욱 주와 가까워지는 것이다. 이러할 때 “모든 이적와 기사”가 내 시간과 공간의 영역에서 나타난다. 전에 내가 알지 못할 때도 하나님의 권능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셨음을 이제와 돌아보면 선명하기만 하다.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은 세상이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아무도 없는 듯 혼자 힘들어할 때도 실은 주가 곁에 계셨다. 세상이 급변하고 제아무리 요지경이라 해도 나의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하나님으로 함께 하셨고, 함께 하신다.

 

이를 말씀으로 증거를 삼으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이를 모세는 누구보다 잘 알았고, 심지어 모든 백성은 원망과 불평으로 신음할 때도 모세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아버지가 아들을 품에 안으신 것’ 같이 자신을 보호하심을 알고 있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 32:10).” 돌아보면 모든 게 다 은혜였다는 고백이 우리 믿는 자들의 공통된 진술이고 고백이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았던 자가 외친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3-16).”

 

결국은 우리가 주의 뜻으로 사는 것이지 우리의 의지나 노력으로 이루어가는 인생이 아니다. 저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 이익을 보리라.’ 하며 살고 있지만, 내일 일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도 우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하고 성경은 정의한다. 그러므로 더욱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해야 옳다. 그러지 못하는 것은 세상이 다들 그러지 않고 ‘허탄한 자랑’으로 살고, 이를 두고 복을 운운하며 확신하는 것이라, 이와 같은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하고 성경은 일갈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17).”

 

그렇다면 우리의 선은 무엇인가? 우리가 주를 믿고 그의 뜻대로 산다는 일은 말씀대로 사는 것으로, 기도하는 사람으로 주와 항상 같이 하려 모든 생각에 생각을 더하고 마음에 마음을 다하여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것이다. 사람들과 어울려 누가 어찌 한다고 해서 저를 따라 사는 게 아니다. 결국 우리 모두의 생은 동일하게 끝이 온다. 오늘 모세는 죽음을 맞을 때도 그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우리가 그 앞에서도 담대히 설 수 있는 것은,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곧 우리가 세상 모든 사람들과 같이 죽는다. 죽어서 모두 주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런 가운데 의연한 것은 우리에게는 대언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저를 믿는다는 것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니, 우리가 우리의 죄로 멸망에 이르지 않을 것은 예수의 의로우심 때문이다. 이에 지혜는 외쳐 말하길,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전 8:8).”

 

그런 가운데 모두가 죽음을 앞두고 그 마음과 육신이 쇠하여 두려워할 때 우리는 기력이 쇠하지 않고 주를 바라며 의지함으로, 비록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리라(욥 34:15).”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떠벌여 주접을 떠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 그리하여 오늘도 나의 겉사람은 어기적거리며 비루한듯하나 나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 주를 더욱 사랑한다.

 

고로,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골 1:25).” 하는 것과 같이 오늘도 말씀 앞에 나와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여,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시 25:14).

 

하셨으니,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11:1).

 

세상은 어떠하든지,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4).

 

하여,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