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전봉석 2025. 2. 13. 05:02

 

이는 곧 이스라엘 모든 자손과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을 위하여 선정된 성읍들로서 누구든지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망하여 그가 회중 앞에 설 때까지 피의 보복자의 손에 죽지 아니하게 하기 위함이라

수 20:9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시 31:24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를 덮으시고 용서하실 기회를 주신다. 이를 위해 도피성을 두어 ‘무리가 이곳을 구별하게 하셨다. 요단 서편 가나안에 지정된 세 도피성은 납달리 지파의 갈릴리 게데스, 에브라임 지파의 세겜, 유다 지파의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이 언급되어 있다. 게데스는 갈릴리 북부 산악 지대에 위치했다. 이곳은 갈릴리 게데스, 혹은 납달리 게데스로 불린다.

 

세겜은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한 성읍이다. 여호수아는 이곳에서 그의 마지막 고별사를 하였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들의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선지라… 그 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과 더불어 언약을 맺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제정하였더라(수 24:1, 25).”

 

헤브론은 갈렙이 정복한 적이 있으며, 원래는 기럇 아르바로 불렸다(14:13-15). 또한 여리고 동쪽 요단 저편을 택하였다. 요단 강 동편에 지정된 세 도피성은 앞서 모세가 지시한대로 이루어졌다(신 4:41-43). 그 한 곳이 베셀인데 르우벤 지파에게 분배되었다가 후일에 도피성으로 지정되었다. 또한 길르앗 라못으로 갓 지파에게 분배되었다가 후일 도피성으로 지정되었다. 바산 골란은 므낫세 지파에게 주어졌다가 후일에 도피성으로 지정되었다.

 

이 여섯 곳의 도피성은 그리스도와 연관 지을 수 있다. 이곳들을 각각 그 이름의 의미가 그러하다. 먼저 ‘게데스’는 ‘거룩한 곳’으로 성전 되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세겜’은 ‘어깨’를 뜻하는데 정사(政事)를 그 어깨에 멘 그리스도를 연상하게 한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헤브론’은 ‘교제’를 뜻하는데 이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8, 19).” ‘베셀’은 ‘성채’를 뜻하는데 이는 우리가 도망하여 피할 수 있는 성채 되시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시 91:2).

 

‘라못’은 ‘높은 곳’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높은 하늘에 앉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연상하게 한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6-7).” 또한 ‘골란’은 ‘기쁨’이란 뜻으로 우리의 진정한 기쁨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한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우리는 모두 이 땅에 잠시 ‘우거하는 객’으로 살아간다. “거류민이 너희의 땅에 거류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33-34).” 살면서 이런저런 사람과 사건과 상황으로 우리의 관계와 성격과 그 기질이 형성되는데 하나님은 이에 따라 항상 우리 곁에 ‘돕는 자’로 세우심을 얻게 하신다.

 

누가 아이의 일과 자신의 직장 일로 전화를 했다. 아이는 여전히 예민하여 스트레스를 받고 사는데, 우리는 그러다 서로가 언제 만나서 의지하게 되었는지를 말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성경학교 때 누구의 전도로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그렇게 서로 이제 쉰이 되고 예순이 될 나이에 이르렀다. 그러는 동안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고 그때마다 서로의 ‘돕는 자’로 오늘에까지 주를 바라며 살 수 있게 하심이 은혜였다. 나는 아이를 두고 이와 같은 손길을 허락하시길 기도하였다. 돌아보면 짧고 간단하였던 여정인데 그에 따른 우여곡절이 서로에게 많았다. 그런 가운데 이제는 서로가 같은 하나님을 바라고 같은 천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에 놀라워했다.

 

이스라엘은 그들 역사가 항상 ‘우거하는 객’으로의 여정이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났을 때부터, 역시 애굽에서의 객으로 살았던 날들도… 그 모든 여정 위에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저들도 항상 그 곁의 ‘우거하는 객’에게 똑같이 베풀 것을 명하신다. 이 명령은 성도로 사는 동안의 삶의 자세가 된다. 우리 곁의 어떤 이의 어떤 사연도 허투루 듣고 말면 안 된다. 직간접적으로나 은연중에 기도함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도피성’으로의 예수께로 나아가는 사이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1-12장)와 그 땅의 분배(13-19장)를 살폈다. 이로써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창 12:7-8).”

 

이는 오늘 우리가 사는 성도로서의 삶의 시간이고 장소이다. 이에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출 3:8).” 곧 나로 하여금 주를 외면하고 세상에 종노릇하며 살던 때를 떠나 오늘 이처럼 주의 이름을 부르며 사는 날을 허락하셨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현재의 시간’은 매순간이 짧고 스치듯 지나치는 것이나 하나님에게 지금 이 시간은 언제나 영원한 현재이다.

 

우리는 오늘도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이어지는 여러 형태의 나의 기질과 성격과… 내 곁의 여러 환경적인 요인과 상황과… 나로 ‘우거하는 객’으로 살게 하심과 같이 내 곁에 우거하는 객을 돕고 긍휼을 베풂으로 우리는 함께 ‘영원한 현재’를 산다. 어제 오전 누구와의 통화에서 이런저런 지난날의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그 모든 순간이 마치 찰나와 같이 느껴졌다. 초등학교 5학년짜리 계집아이가 어느새 쉰 살아 되고 두 아이의 엄마로 어릴 때 자신은 어떠했는지를 돌아보며 맡기신 아이들의 일로 기도를 부탁하였다. 우리의 오늘은 영원한 현재의 시간으로 주 앞에서 산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민으로 일찍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의 생활을 지나 가나안에 들어와 날마다 나를 쳐서 복종시키며 산다. 사느라 사는 일에 급급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도피성’으로 우리의 생활 반경 안에 그와 같은 시간과 장소를 마련하여 구별한다. 이와 같은 도피성을 선정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분부대로 여섯 개의 도피성을 선정하고 있다. 요단 동편에 3개, 요단 서편에 3개, 도피성은 부지중에 살인한 자를 보호하기 위한 규례이다.

 

살인은 좀 더 포괄적인 의미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신 같은 사람을 함부로 유린하는 죄다. 어쩌다 무슨 일이 터지면 내 안에 이는 어떤 마음이 미움으로, 증오로, 발산되어 죄를 짓게 한다. 어제 누구도 회사에서의 부당한 일로 억울함을 호소할 때 주 앞에 이를 아뢰며 할 말 못할 말 다 했다는 소리에 나는 다독이는 마음으로 잘했다, 하고 주께 아뢰는 것으로는 죄가 되지 않는다. 이를 그 사람에게 직접 토설하거나 앙갚음하면 안 된다. 다만 주께 아뢰어,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나를 원수의 수중에 가두지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31:6, 8).

 

우리가 주께 아룀은 주가 아심으로 주를 의지함이다. 오늘 날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라는 허울로 제도적, 법적 장치를 자기들 좋을 대로 해석하며 원색적으로 상대를 비난한다. 그런 일에 입을 열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발설하는 그러한 일은 모두 죄이다. 도피성을 두심은 그러할 것을 알고 이를 방지하고 보호하기 위함이시다. 도피성은 우리의 연약성을 알고 그에 따른 죄를 실수로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다.

 

‘도피성’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끌어들이는 성읍’이란 뜻이다. 즉, 우발적으로 우린 살면서 욱, 하고 ‘살인’을 한다. 누구를 저주하고 욕한다. 이에 도피성의 목적은 부지중에 지은 죄를 용서하시고 회복할 수 있는 기회이다.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거류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부지중에 살인한 모든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민 35:15).” 우발적으로라 함은 누구나 자주 경험하는 욱, 하는 감정의 하나다. 그러므로 고의적으로 혹은 의도적이며 습관적으로 그러한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부지중에 살인한 사람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구약의 율법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하신가를 알려준다. 우리의 존재이유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기뻐하시는데, 하나님의 기뻐하심으로 우리도 기뻐하게 하신다. 그래서 도피성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모형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46:1, 62:7).

 

아직까지도 이 도피성의 문은 열려 있어 죄를 범한 자가 누구든지,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다. 이는 그리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누구라도, 언제든지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를 강제하지 않으심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더욱 넓고 깊고 높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나아와 보호와 용서를 받을 수 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이에,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전 7:20).”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약 3:3).”

 

오늘 같은 사회 현실에서 뉴스만 보다가도 욕지기가 나온다. 누가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뻔뻔하게 연설을 하거나 기자회견을 할 때면 욱, 하는 감정이 일어난다. 이에 성경은 그때의 입과 그때의 몸을 제어하라 하신다. 도피성은 단순히 우발적으로 살인을 한 자만을 위한 게 아니라, 그에 따른 보복을 가하려는 자에게도 놀라운 순화의 기회가 된다. 흔히 욱, 하고 일어나는 감정이란 사람으로 살면서 우리가 안고 사는 기질이거나 성격일 텐데… 이에 우리 입에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도피성’을 두셨다. 이는 가해자나 피해자나 모두에게 유익이다.

 

우리는 주의 은혜로 산다. 그 은혜를 덧입으려 도피성으로 달려가듯 오늘도 주 앞에 나온다. 서로에게 기도를 부탁한다. 어려움을 알려 회개의 장소를 구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 15:10).” 하여 서로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서로는 주의 사랑의 증표가 된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31:1).

 

오늘도 주께 아뢰어,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 되소서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2-3).

 

그리하여,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6).

 

하여,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를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악인들을 부끄럽게 하사

스올에서 잠잠하게 하소서

(16-17).

 

이에,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