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이시니라
수 23:3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시 34:8-9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지칭하는 데 있어 다른 그 무엇보다 내가 누구인가, 하는 데 확신이 든다. 곧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자시니라.’ 하실 때도 나의 인생에서 주가 나와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곧 오늘 본문은 모세의 후계자로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나안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한 여호수아의 고별 연설이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한 것임을 회고하고 확신한다.
어머니가 여든이 되면서 가족들 방에 여러 축하 글이 올라왔다. 나는 전에 없이 부모의 삶이 고귀하였음을 인정하게 된다. 단지 부모로서의 그 심정이야 오죽했을까만 이를 주께 맡김으로 사모의 사명을 다한 데 따른 감회가 새로웠다. 돌아보면 그와 같은 형편과 사정에서 사남매의 우리 형제들을 모두 주의 종으로 세우기까지, 엄마로서의 그 심정은 어떠하였을까를 생각하면 눈물겹다.
오늘 여호수아의 심정도 그와 같지 않을까? 하나님이 출애굽과 광야의 긴 여정과 가나안을 정복하는 데 있어 행하셨던 일을 회고함으로 더욱 확신이 드는 마음이겠다. 저는 일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이시니라(수 23:3).” 하는 데 누구보다 이를 곁에서 목격하고 자신의 경험을 담보로 한다.
모세가 이를 알렸다.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신 1:30-31).” 곧 모세에게 있어 하나님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자신들을 인도하신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하여 하나님이 싸우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4:23-24).”
그 언약을 오늘은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상기시킨다.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민족들 중에 들어가지 말라 그들의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그것들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하기를 오늘까지 행한 것 같이 하라(23:7-8).” 그렇게 하여 견고한 여리고 성읍이 함성되었다.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6:20).”
기브온 전투에서는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졌다.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하여 벧호론의 비탈에서 내려갈 때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우박 덩이를 아세가에 이르기까지 내리시매 그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 많았더라(10:11).” 또한 전투 중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기도 하였다.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기까지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13).”
곧 나의 날들을 돌아볼 때 이와 같은 역사가 나의 생에도 다르지 않았음을 인정하게 된다. 느닷없는 부르심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주의 길을 감행하였던 부모의 사역에서 지독하게 가난하여 동생과 둘이 이모네 집에 떨어져서 지내야 했던 기억, 남의 건물 옥상에다 가건물을 짓고 일곱 식구에 어느 집사님 가족까지 열 명이 넘게 함께 살았던 초등학교 시절, 또한 사택이 없어 교회에서 살림을 해야 했던 날들, 갑작스런 나환자촌 교회에서의 청소년 시절, 고등학교 때 인천으로 이사하는 날은 서로 날짜가 맞지 않아 그 건물 옥상에다 짐을 부리고 커다란 투명한 비닐을 씌워 생활하였던 기억 등.
돌아보면 어떻게 그렇게 살았을까, 싶은데 그런 가운데서도 항상 모자람이 없었고 나의 기억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옥상에서 함께 살았던 집사님 동갑내기 아들도 선교사가 되었다. 어느 교회 마당에다 텐트를 치고 생활할 때 주구장창 저녁마다 올라오던 형들 네댓 명도 모두 목사가 되어 누구는 교수로, 선교사로, 개척교회를 하며 산다. 얼결에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랐던 아리마대 요셉의 가정과 그의 아들 루포가 후에 바울을 도와 주의 사역을 감당하였던 것과 같다. 하물며 우리 사남매 모두 목사로 사모로 주의 사역의 반열에서 함께 걷고 있는 오늘의 여정이 기이하고 신비롭다. 나는 엄마의 생신을 축하하며 이를 회상하였다.
오늘 여호수아도 같은 심정이 아닐까? 저는 이제 외친다. “정녕히 알라.” 이는 명심하라는 것으로 ‘알고 또 알라’는 재촉이고 당부다. ‘명심하고 또 명심하라’는 뜻이다. 죽는 순간까지 잊지 말라는 것이다. 행여 백성들이 이를 잊고 가나안 족속과 혼인하며 왕래할까 하여 경계한다. 그들의 우상에 빠져 하나님을 저버릴까 염려한다.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은 저들 또한 압제와 고통 속에 내버려 두실 것을 표명한다. ‘가나안’을 쫓아내지 않고, 저들과 통혼하고 왕래하다 저들의 문화에 흡수될 것을 경계하심이다.
이는 결국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하고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알린다. ‘올무’는 덫이다. 짐승을 잡을 때 사용한다. 올무에 걸린 짐승 같이 우리 영혼이 옴짝달싹 못할 수 있다. 욥기에서 보면 수아 사람 빌닷이 욥의 처지를 보며 한탄하며 말하였다. “이는 그의 발이 그물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려들며 그의 발 뒤꿈치는 덫에 치이고 그의 몸은 올무에 얽힐 것이며 그를 잡을 덫이 땅에 숨겨져 있고 그를 빠뜨릴 함정이 길목에 있으며(욥 18:8-10).” 욥에 대한 저의 판단은 잘못 되었으나, 우리 인생은 그와 같은 일이 흔하다.
시편의 세계는 이를 경계하고 주의하게 한다.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
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올무와 줄을 놓으며 길 곁에 그물을 치며
함정을 두었나이다 (셀라)
(시 69:22, 91:3, 124:7, 140:5).
곧 우리가 예외로 두는 오늘의 사소함이 우리의 결국을 결정한다. 이와 같은 모세와 여호수아와 시편의 경계와 찬송에도 저들은 미진하였고 이런저런 이유로 ‘가나안 족속’을 남겨두었다. 그에 따른 결과는 남북으로 이스라엘이 갈라져 서로 적대시하다, 각각 앗수르와 블레셋에 의해 멸망하였다.
도대체 나의 부모는 어찌 그 모진 세월을 주만 바랄 수 있었을까? 나이 들고 어느덧 부모의 나이를 지나고 있으면서 나는 새삼 경이롭기도 하다. 부모로서 자식들의 이런저런 일에 그 심정은 어떠했을까? 특히 나의 모친이 여든이 되는 해에 나는 새삼 그 깊은 심정을 헤아려보았다. 말이 쉽지, 앓고 병들고 죽어가는 자식을 두고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심정으로 사모의 사명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모질거나 모성애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아, 그래서 나의 모친은 젊은 날 거의 대부분을 교회에 올라가 철야를 하고 기도하다 그곳에서 잤다. 새삼 그와 같은 어머니의 기도로 오늘 우리가 이 길을 걷는 영광의 반열에 오른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런 가운데 지혜도 외친다.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잠 6:5).” 즉 그러할 때 자식을 우선하여 돌볼 것인가, 하나님을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함으로 자식들을 주께 맡길 것인가! 이는 선택의 문제였고 그와 같은 애끓는 심정으로 주 앞에 엎드려 애간장을 태우며 평생을 보냈을 어머니로, 한 여성으로 그 안의 염려와 두려움도 짐작하게 된다.
가령 이번에 동생이 필리핀 사역을 마치는 계기가 어느 아이의 모해와 거짓으로 그 모친의 고소로 빚이진 송사로 그 당사자인 동생은 물론 나의 모친도 몸이 많이 상했다. 동생은 폐결핵에 신장까지 나빠져서 치료중이고, 모친은 식욕을 잃어서 음식을 먹으면 입덧하듯 울렁거려 고통을 당했다. 사람으로 살면서 우리가 주께 맡긴다고 하여 우리의 몸도 마음도 의연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게 안 되니까 더욱 더 주를 의지하는 것이지만, 이와 같은 이율배반적인 생을 살면서 전적으로 주를 의지함이란 극단적으로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성경의 지혜는 이에 따른 일로 젊을 때 빠지기 쉬운 일로 “젊은이가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 필경은 화살이 그 간을 뚫게 되리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의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같으니라(잠 7:22-23).” 오늘에 이르러 나의 날들은 이를 증명하였다. 이런저런 가운데서도 나의 젊은 날 나 역시 내 곁의 ‘가나안’을 허용하였을 뿐 아니라 저들의 문화와 가치와 그 삶을 따라 살았다. 저들의 일상을 부러워했고 홀가분한 듯 하나님 없는 삶을 가치 있게 여기기도 하였다.
그때 이미 죽어 마땅하였고 버림받아 마땅했을 터인데, 하나님의 손길은 나의 어머니의 기도와 비례한다. 내 기억으로 나의 모친은 따뜻한 위로나 격려로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마치 내버려둔 자식처럼 놓아두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러는 동안 하나님 앞에 엎드려 씨름하고 토로하며 애끓는 심정으로 주의 이름을 대신 부른 것이었다. 하여 아브라함의 기도로 소돔과 고모라의 롯을 구해내신 것처럼 나는 나의 모친의 기도로 오늘 이처럼 어엿하게 그러나 송구하고, 무던하게 그러나 항상 감사함으로 이 길을 간다. 나의 형제들도 심정도 다르지 않은 듯하다. 모두 감사의 글에서 모친의 기도에 대한 찬사가 이어진 것을 보면….
그리하여 나는 죽었고, 나는 살았다. 내가 살려고 하던 나는 죽었고, 내가 주의 것으로 죽으면 죽으리라 할 때 또한 살게 하신다. 하여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이 말씀이 오늘은 나의 가장 확실한 증표이고 확신이다.
내가 주의 것으로 삶으로 나의 나 된 것을 모두 주께 양도하게 된다. 나의 건강도 염려도 불안도 갈등도, 사랑하는 마음이나 걱정도 모두 주의 것이다! 하여 나는 없고 나로 주를 바라는 마음만이 가득하다. 그러니 더는 사는 동안, 사는 일이 나의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나의 눈에 가시가 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채찍은 예리한 막대기로 나를 못살게 하는 여러 형편과 사정이다. 가시는 찌르는 것으로 날카롭고 예리하게 나를 괴롭히는 불안과 육신의 약함과 늘 어디가 아픈 일들로 가시이나, 동시에 주를 바라게 하는 축복의 계기이기도 하다. 고통의 이중적인 축복은 그것으로 주를 더욱 간절히 바람이고, 고통까지도 주께 맡김으로 고통도 복이 된다.
내가 언제 또 이처럼 간절하였던가? 어디가 아플 때, 무슨 염려로 마음이 요동칠 때 나는 황급히 주의 이름을 부르며 도우심을 구한다. 예전에 세상이 나를 찌르던 것과 다르다. 그때 내 옆구리의 둔탁하고 충격이 심한 막대기 같지는 않다. 더욱이 눈에는 보다 날카로운 것으로 찌르듯 예전에는 세상을 부러워하고 그리 따라가다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것에 자괴감이 들어 죽고 싶어할 정도였었는데, 이제는 그러하지 않다. 더는 ‘가나안의 우상’에 매료되지 않는다. 그 끝을 알기 때문이다. “필경은 이미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 34:1).
다윗의 현실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 쫓겨나온 후에 지은 이 아름다운 찬송을 나는 사랑한다. 그러므로 나도 저와 같아서,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2-4).
이와 같은 현실을 경험하고 체험하며 사는 사람은 강하다. 나의 모친의 기도는 힘이 있어서 죽기 살기로 주 앞에 맡김으로 어떻게 우리 사남매 형제들 모두가 주의 사명을 기어이 감당하고 이 길을 가고 있는지… 믿기지 않는 나의 현실이 증명한다. 하여,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8-9).
이는,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17-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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