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
수 21:45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1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 하시는 오늘 말씀으로 새 힘을 얻는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성취하신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성경은 끊임없이 설교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신 7:7, 9).” 하시는 말씀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하나님은 우리로 기뻐하신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다. 그 이유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우리를 창조하셨다. 이에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세워 주의 말씀에 순종할 수도 불순종할 수도 있는 자유를 주셨다. 아예 악을 미연에 차단하여 무조건적으로 순종하게 하셨다면 이는 비인격적인 존재가 된다. 하나님은 이를 바라시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격적인 존재로 우리를 존중하셨다. 이에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에게도 가장 큰 만족이 된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게 성취되는 것 같아 보여도 이는 사랑이심을 깨닫고 낙심하지 않는다. 인내할 수 있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속을 남김없이 이루시고 계셨음을 알게 된다. 이에 나는 오늘 시편의 어느 구절이 가슴에 울린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1).
이는 분명 나 자신임을 안다. 그런데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드는 ‘무지한 말’과 ‘노새’와 같이 완고한 마음으로 힘들다. 하여 이것들에 재갈을 물리고 굴레로 단속하게 하시려고 ‘가시’ 곧 내가 원치 않는 나의 연약함이나 고통으로 그러한 나를 지키게 하셨다. 이에 바울은 자신이 받은 말씀, 그 계시가 지극히 커서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고 진술하였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이에,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시 32:9).
하시는 오늘 시편의 세계가 귀하게 다가온다. 하면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하신 데서 오늘의 ‘고통의 의미’를 알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모두 ‘레위’의 사명으로 ‘제사장’의 직분으로 사는 것이다. 그에 따른 오늘 본문의 성읍들은 귀하고 족하다.
레위 지파의 성읍에 관하여는 다른 지파와 달리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했으나, “일 개월 이상으로 계수된 레위인의 모든 남자는 이만 삼천 명이었더라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 계수에 들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그들에게 준 기업이 없음이었더라(민 26:62).” 오늘 말씀에 따라 그 대신 다른 지파로부터 십일조를 받게 하셨다.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18:21).” 그렇게 해서 열두 지파로부터 마흔여덟 개의 거주할 성읍들을 할당받았다.
이 가운데 여섯 개의 성읍은 도피성이었고, 열세 개의 성읍은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에게 주어졌다. 레위 지파의 성읍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로부터 평균 네 개씩의 성읍들을 취해 이루어진 셈이다. 이때 요셉 자손은 두 지파로 간주하였다. 이와 같이 레위 지파가 온 이스라엘 전역에 흩어져 살게 된 목적은 신앙의 공적인 대표자들로 그들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는 법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민 35:1-8).
그러나 레위인들은 이 성읍들을 영구히 사유 재산으로 소유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이 성읍에 거주하도록 허용되었을 뿐이다. 또한 성읍 주변의 들판에서 가축을 키울 수 있는 목초지도 그렇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거주하는 지역의 지파들 각각에게 속한 것이나 레위인들은 이 성읍을 팔거나 살 수 있었다. “레위 족속의 성읍 곧 그들의 소유의 성읍의 가옥은 레위 사람이 언제든지 무를 수 있으나(레 25:32).” 그런데 그들이 팔았던 집을 다시 사지 못할 경우 희년이 되면 어떤 경우라도 무조건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
“만일 레위 사람이 무르지 아니하면 그의 소유 성읍의 판 가옥은 희년에 돌려보낼지니 이는 레위 사람의 성읍의 가옥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받은 그들의 기업이 됨이니라(33).” 그러나 들판의 목축지는 매매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성읍 주위에 있는 들판은 그들의 영원한 소유지이니 팔지 못할지니라(34).” 이러한 말씀에서 오늘 나의 형편과 사정도 그와 같다는 설명을 듣는 것 같다.
다들 어려운 처지라 이런저런 후원이 줄었다. 헌금으로는 늘 교회 월세도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라, 얼마 안 되지만 오래 전부터 몇 만원씩 들고 있는 청약적금에서 지난 달, 이번 달, 백, 이백, 약관대출을 받아 생활하기도 한다. 그럴 수 있는 것으로도 충분하여 어제는 아내와 산책하며 다들 어렵고 힘든 처지라, 그에 따른 상황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의 말씀에서 오늘을 사는 레위인으로 또한 제사장 직분을 가진 자로서, 내 것이 아니면서 또한 늘 내 것으로 부족함이 없이 살게 하심으로 감사하게 된다.
이와 같이 말씀은 언제나 내게 살았고 생명력이 있다. 때론 두렵고 때론 위로가 된다. 이에 따라 하나님의 뜻은 성취되고, 실현되어 완성되어지는 것을 본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그리 계획하셨고 그와 같을 때 우리가 가장 평안하고 안전한 것을 알게 하셨다. 하여 우리의 말씀은 늘 실현되고 완성되어 우리의 세계를 하나님의 세계로 변화시킨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신 7:9).”
하여 시편의 세계에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
(시 36:5-6).
하는 우리의 찬송이 우리의 생활에서 드러나게 하신다. 이는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 오늘도 이와 같이 말씀으로 불러 말씀으로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다.’ 이를 성경은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인 것을 일깨운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8).”
오늘 말씀이 단지 이스라엘의 역사로 저들 가운데 레위인들의 성읍과 목초지를 분배하고 나열하는 정도가 아니다. 이는 오늘을 살면서도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가, 알고 이에 따라 구별된 자로서 하나님이 어찌 건사하시고 다스리시는가를 알게 하신다. 이에 어떤 어려움으로 우리가 더 주를 의탁하는 것이 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벧전 4:19).”
따라서 오늘의 이와 같은 적용은 또한 예전의 이야기가 아닌 영원한 현재로의 하늘 가나안에서 우리가 받을 복락을 상상하게 한다. 이에 약속을 따라 사는 우리는 복이 많다. 성도들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굳게 믿는다. 그러므로 요동치 아니한다. 세상이 어떠하든지, 오늘의 정국이 어떠하든지, 나의 삶이 어떠하든지… 다만 오늘 내게 부여하신 사명에 충실할 뿐이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엡 3:6).”
나는 자격이 없었지만 나로 그와 같은 반열에서 주의 백성임을 알 때, 나의 것인 줄 알았던 ‘나의 것들’에 대하여 더는 나의 것으로 권리주장을 하지 않는다. 이는 욥의 눈물겨운 고백에서와 같이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0-22).”
어떻게 저런 고통 중에서도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와 같은 고백이 가능하였을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하나님과 같은 인격적인 존재가 되게 하시려고 ‘자유의지’를 주셨다. 선을 위하여 악을 멀리하고 경계할 수 있는 자유와 함께 선을 버리고 악을 강화하여 자신의 권리주장을 할 수 있는 자유도 허용하셨다. 그것으로 우리의 자유함을 하나님은 기뻐하시는데, 그런 가운데 악을 허용하신 것이 아니라 악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선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그리하여 오늘 내가 나의 형편에서 주를 찬송할 수도 또는 염려와 근심으로 주를 원망할 수도 있는 자유가 있다. 그에 따른 책임은 전적으로 내 몫이다.
주 안에서 평안할 수도, 더욱 더 악을 취함으로 안색이 변할 수도…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창 4:6).” 이와 같이 주가 물으실 때 돌이켜, 온전히 주를 바라며 죄를 멀리했었을 수도 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르셨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7).”
사람과 사람 사이가 다 그렇듯 오늘 말씀의 내면에서 각 지파들 가운데 어떤 이의 불만이나 더러는 레위 지파에 성읍을 내주고 목초지를 제공하는 일에 인색했을 수도 있었겠다. 또는 상대적으로 더 많이 누리고 차지하려 했을 레위인도 있었겠다. 그러는 사이에서 갈등과 반목으로 불화가 있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가 이 지경인 까닭으로 나는 모든 걸 차치하고 교회가, 어느 목회자들이 선두에 선 것을 보면서 가슴 아프고 속상하다. 저들의 입에서 함부로 주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고 그 현장에서 찬송가가 불려지는 것이 송구하다.
나의 일상에 이런저런 일에 염려가 앞서고, 그래서 아내와 산책을 하면서 나의 말 속에 부정한 말이나 노새와 같은 판단이 앞서는 것에 부끄러움이 인다. 이처럼 말씀은 살았고, 좌우에 날선 검이 있어서 나를 베고 찌르기도 하신다. 이때에 성경이 나를 불러 세우신다.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1-12).”
주가 행하심으로 오늘도 나는 무사히 또 교회로 왔다. 새벽제단을 지키며 말씀을 묵상하고 글을 쓴다. 나의 하루하루가 더해지며 나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질 것을 믿는다. 나의 이 모든 것으로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하는 고백이 고스란히 나의 것이 되어 드려지기를.
이때에 하나님은 이를 통하여 기뻐하신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3).
그러할 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없으면 없는 것으로, 주신 상황 속에서 무던하게 주 앞에 설 때,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6:18, 7:7).” 이는 내 판단이나 기준으로가 아니라 주의 말씀이고 약속이어서,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9).”
그리하여,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시 32:1, 5).
이를 알고 주를 온전히 바람이니,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
(7).
이에, 오늘도 말씀으로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8, 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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