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 목전에서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

전봉석 2025. 3. 26. 04:29

 

그런즉 가만히 서 있으라 여호와께서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행하신 모든 공의로운 일에 대하여 내가 여호와 앞에서 너희와 담론하리라…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서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

삼상 12:7, 16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시 72:18-19

 

 

더욱이 오늘 같이 사회가 어지러울 때에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서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 하심을 의지하며 주를 바랄 때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자신의 소망으로 순복하는 것이다. 이때에 나는 무엇을 바라는지가 하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시려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를 기준으로 언사를 삼가 또 조심하는 데 있어, ‘잠잠히 주를 바라야 할 때’이다. 이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는 일이다. 나의 달려갈 길을 다하는 것이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우리의 소망은 헛되지 않고 우리의 바람도 주의 영으로 함께 하심이었다. 평생을 한결같을 수 있다면…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곧 오늘의 이 어지러운 사회와 난리와 난리, 소문과 소문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오늘 본문은 사무엘의 고별시와 같다. 스스로 자신의 양심선언을 하는 자리이다. 즉,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공의를 가시적으로 보이며 살아야 한다. 공의로우신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는 특수한 관계이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면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아야 할 명예와 의무가 있다. 나와 하나님 사이의 친밀한 언약이 있다.

 

사무엘은 당당히 마주서서 외친다.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언하라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느냐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누구의 손에서 받았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하니(삼상 12:3).”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라.” 하고 피고의 입장에서 자신의 죄를 듣고자 한다.

 

이는 주 앞에 정직하게 서서, “그들이 수많은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아노라(신 31:21).” 하였던 모세와도 같다.

 

사무엘이 여기서 이 같은 말함으로 사사로서의 자신의 청렴함과 결백함을 다시금 돌아보아 확인하고 주저함이 없는 것이다. 이는 주 앞에서 담대하여 연속된 질문을 통해 자신을 입증하는 것과 같다. 곧 바울은 우리에게 일러,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그러므로 나는 오늘 사무엘의 이와 같은 자기고백으로 오늘 이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우리 믿는 자의 자세를 되새기게 된다. 주장과 주장이 난무하고 서로의 입장이 현저하게 갈라져 이를 적대시하면서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다. 이에 오늘 사무엘이 자신에 대해 증언하며 왕을 원하는 백성들을 향해 일깨우고자 하는 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공의로우심이다.

 

누구의 판단이나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일에 투명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기본자세이겠다. 이는 내 자신이 완전하고 흠결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 앞에 나를 세움으로 날마다 자신을 점검하는 것이어서,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말 2:6).” 하는 자로 하루하루씩을 살아가야 한다.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8).”

 

이에 바울은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하였고,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주 앞에서 근신함은 자칫 세상이 교회를 조롱하고 희화화하는 것에 휩쓸릴 수 있어서이다. 그런 자들은 그런 대로 사는 것이겠으나 그런 가운데서 주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고 교회가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다. “랍사게가 이르되 내 주께서 이 일을 네 주와 네게만 말하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냐 너희와 함께 자기의 대변을 먹으며 자기의 소변을 마실 성 위에 앉은 사람들에게도 하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냐 하더라(사 36:12).”

 

때는 히스기야 14년, 앗수르의 산헤립이 쳐들어왔을 때이다. 당시 앗수르는 유다의 성읍 46개를 취하였다. 그러면서 히스기야 왕을 조롱하며 예루살렘을 봉쇄했다. 주전 701년에 일어난 역사이다. 이를 이사야 36장에서 언급하였고, 그 내용은 열왕기하 18장 13-16절에 기록하고 있다. 랍사게는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보낸 장수로서 그의 입담에 조롱과 저주가 들어있다.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신뢰하게 하려는 것을 따르지 말라 그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시리니 이 성이 앗수르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할지라도(사 36:15).” 그때에 히스기야가 명하였다. ‘잠잠하라.’ “그러나 그들이 잠잠하여 한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왕이 그들에게 명령하여 대답하지 말라 하였음이었더라(21).”

 

오늘 본문에서 사무엘도 두 번씩 이와 같이 전한다. “그런즉 가만히 서 있으라 여호와께서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행하신 모든 공의로운 일에 대하여 내가 여호와 앞에서 너희와 담론하리라…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서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삼상 12:7, 16).” 더러 우리는 그럴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휘말린다. 덩달아 목소리를 높이며 이쪽에서든, 저쪽에서든 각자의 주장으로 함몰되기 일쑤다.

 

세상은 본래 악하고 어지럽다. 시인은 이를 두고,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시 34:19).

 

하고 이 모든 일의 주관하심이 주께 있음을 알린다. 어제는 넷플릭스에서 하는 영화 <계시록>을 보았다. 제목 때문에도 그러했는데, 생각했던 내용은 아니었다. 보는 내내 불편하고 불쾌했다. 어쩌다 교회를 소재로 범죄가 동일시되고 우리의 기도와 신앙이 어쩌다 이처럼 희화화된 것인지 안타까웠다. 교회는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한다. 이는 교회의 숙명이다. 그러나 이를 자처하는 것은 우리의 속된 바람 때문이다. 세상보다 세상 같아서 세상 가운데 교회로 서지 못하고 세상 속에서 교회가 세상 속으로 잠식당한 결과이다. 

 

앗수르의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하고 그의 장군 랍사게가 유다를 농락한다.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불리고, 주가 하신 일이 조롱거리가 된다. <계시록>을 이틀에 걸쳐서 보다말다 하고, 틈틈이 설교원고를 작성하느라 이사야서 36장을 마주하면서 내 안에 중첩되던 감정이 그러했던가? 교회가 이익을 취하면서 비대해지고 온갖 탐욕과 불의에 사로잡힌다.

 

이는 아간과 같은 탐욕이라, “여호수아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오늘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물건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수 7:25-26).” 또한 가룟인 유다와 같이 끌려감이고,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 27:5).” 초대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일과 같다.

 

하여,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우리는 이러한 때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해야 한다. 자신의 믿음을 확증해야 한다. 나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가?” 스스로 확증하는 데 있어,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하심을 오래 자주 늘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하고 자신에 묻고 답하기를 거듭함으로 하나님과 나의 관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하는 이 단호한 말씀 앞에서 자신을 경계할 때이다(고후 13:5).

 

사무엘은 이제 오늘 6-7절에서 법적 근거로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을 책망하려고 한다.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을 세우시며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는 여호와이시니, 그런즉 가만히 서 있으라 여호와께서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행하신 모든 공의로운 일에 대하여 내가 여호와 앞에서 너희와 담론하리라.” 여기에 ‘가만히 서 있으라.’ 하는 것은 먼저 필요한 우리의 마음 자세를 살피게 한다.

 

곧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출 8:20).” 하시는 것으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서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9:13).” 하나님의 목적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데 있어, <모든 의로운 일> 곧 ‘거룩한 일’에 대해 하나님께서 베푸신 모든 일이 ‘의로운 일’이었음을 알게 한다. 이는 모든 일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의로운 언약’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일을 전하라 이스라엘에서 마을 사람들을 위한 의로우신 일을 노래하라(삿 5:11).”

 

이는,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공의롭게 행한 일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미 6:5).”

 

곧 나의 일생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복음의 순전함이 어떻게 전파되었고, 우리 사회를 교육하고 정화하는 데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를 바로 알아야 한다. 나는 이처럼 묵상글을 쓰면서 자주 나의 지난 일들을 떠올리며 하나님이 어떻게 나의 일생에 관여하시며 인도하셨는지, “나 여호와가 공의롭게 행한 일을 알리라.” 하심에 근거하여 묵상하고 글로 쓴다. 이는 곧 “여호와 앞에서”의 “담론하리라.” 하는 오늘 사무엘의 표현과 같다.

 

‘담론하리라’ 하는 것은 단순하게 이야기하자는 게 아니다. 엄격하게는 ‘재판하리라’, ‘판단하리라’, 하는 의미다. 곧 나의 허물과 죄악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참고 또 기다리심은 오늘에 이르러 나로 하여금 이와 같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서 영광을 받고자 하심이라, 이를 기뻐하실 것을 확신한다. 이는 오늘 본문에서도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삼상 12:22).” 하심으로 나는 안도한다. 그러므로 ‘담론하자’ 하심이 ‘국문하리라’ 하는 의미로 엄숙하고 두려운 일이나,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 (셀라)

(시 67:4).

 

고로 ‘나의 죄가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하심을 붙들고 선다. 나는 이를 붙듦으로 요지경인 세상에서 잠잠히 주 앞에 선다. 나를 피고석에 세우고, 재판관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를 심문한다. 그리하여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이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빌 3:15-16).”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우리가 온전히 이루었다함은 더는 노력할 게 없다는 소리가 아니라, 이전의 연약함과 나의 무지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얼마나 성장하였는가를 살펴, 더 높은 목표를 향한 노력을, 아직도 남은 길을 달려가야 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로 하나님께 속한 자들로, 하나님께 구별되어 ‘온전히 이룬 자’가 되었다. 이를 알면 알수록 아직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더욱 더 성숙해야 할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하는데, 이는 각각 ‘믿음의 분량대로’ 최선을 다해 ‘영적 성장’을 이루어가야 함을 가르친다. 이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하여,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히 6:11-12).”

 

이러한 내용으로 오늘 아침, 아이의 출근 전 같이 나눌 성경공부를 준비하고,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빌 3:16).” 하심에 따라 보조를 맞추고, 일치하여 행하기를 오늘도 ‘여기까지’ 하게 하심을 감사하며… “무릇…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갈 6:16).” 아멘.

 

그는 벤 풀 위에 내리는 비 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이 내리리니

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시 72:6-7).

 

그리하여,

 

산 꼭대기의 땅에도 곡식이 풍성하고

그것의 열매가 레바논 같이 흔들리며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 같이 왕성하리로다

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16-17).

 

이는,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18-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