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삼상 18:12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시 78:72
작은 불쾌감이 그 속에 악령을 부른다. 오늘 말씀에 앞서 사울의 마음이 진행되는 과정을 눈여겨보게 된다.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8-9).” 결국 저 불쾌함은 시샘 때문이었다.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7).”
우리 안에 너그러움이란 그처럼 쉽지가 않다. 하여 예수님은 이르시길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곧 두신 바 오늘의 ‘땅’에서 그 형편과 사정을 주의 뜻으로 받을 것이다. 이에 또 한 인물 사울의 아들 요나단을 주목하게 된다. 다윗의 순수한 마음을 요나단은 알았다. 하나님을 향한 전인격적인 사랑과 충성을 요나단은 사랑하게 되었다.
이는 요나단의 마음이 그러하여서이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14:6).” 하고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였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같은 마음을 하는 이가 그 자신일 것이다. 그렇듯 요나단은 다윗에 대한 특별한 우정을 가지게 된다. 하여 그 마음이 연락한다는 것은,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3-4).” 마음을 ‘매다’, ‘묶다’, ‘짜다’ 하는 말로 뜻을 같이 하여 ‘마음의 띠’를 단단히 동여매는 것이다.
이는,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잠 3:3).”
하심과 같이 마음에 두어 묶고 매어서 새기는 일이다. 이를 요나단이 다윗을 생명같이 사랑하였다고 한다. ‘생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로는 ‘영혼’이란 의미를 가진다. 곧 다윗에 대해 요나단이 품은 우정이 그만큼 고상한 것으로,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20:17).”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이에 영속적으로 지속되어 다윗과 요나단은 혈연관계 이상으로 진한 형제애를 맺게 된다. 저 둘 사이는 무엇보다 변치 않는 여호와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니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읍으로 들어가니라(20:42).”
결국 저 둘이 죽기까지 신실하여서 요나단은 사울의 살기 앞에서 다윗을 칭찬하였고,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칭찬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하지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19:4).”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뒤에도 그 마음은 이어졌다.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삼하 9:1).”
우리가 신앙 안에서 서로가 하나 됨은 이처럼 귀하고 아름답다. 하여 형제를 사랑함이 아름답다. 이는 서로의 신분과 처지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다. 바울은 디도에 대하여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고후 8:23).” 하며 저를 추천하였다.
시인은 노래하기를,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시 55:13-14).
이처럼 성도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연락하는 자들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를 친구로 부르셨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 그러니 상대가 될 수 없는데도 부끄러워하거나 꺼리지 않으시고,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 11:19).” 이에 대하여 바울은 서술하였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하여,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이 놀라운 사랑을 알면 알수록 우린 현재, 우리 곁에 두시는 한 사람, 그 한 영혼을 사랑하는 데 있어 주의 마음으로 하게 된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이 하나님을 우러러 주의 사랑으로 섬기고 나눈다. 겉옷을 필요로 하면 속옷까지, 오리를 가자 하면 십리도 함께 가는 마음으로 하늘에 닿을 낮아짐이고 밑동이다.
이에 오늘도,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그리하여 오늘 요나단은 자신의 ‘겉옷을 다윗에게 주었다.’ 요나단의 이 같은 행위는 언약을 확증이고 표징이다. 당시 ‘겉옷’은 상류층 인사들이 입는 외투로, 자신이 사울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공적으로 과시하는 외적 표시였다. 따라서 합법적으로 인정받던 왕의 후계자 요나단이 자신의 겉옷을 다윗에게 주는 행위는 복선이 있다. 언약의 징표로 인계하는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또한 그뿐 아니라 그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다. 자신의 의복을 벗어주고, 자신의 무기를 상대에게 주는 것은 우정이상의 혈맹으로 돈독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윗이 요나단으로부터 의복과 함께 이 같은 무기를 넘겨받은 것은 정치적으로 사울에게서 무기를 일시 넘겨받은 것과는 다르다. “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 투구를 그의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17:38).” 이는 당대의 영웅이었던 골리앗으로부터 무기를 탈취한 사건과도 연결된다. “다윗은 그 블레셋 사람의 머리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고 갑주는 자기 장막에 두니라(17:54).” 곧 이 모든 것이 다윗의 소유가 될 것을 알게 한다.
그런 가운데 사울의 불쾌함이 악령이 되어 저를 괴롭힌 것은 사울 자신이 백성들의 요구에 의해 왕이 된 것으로 결국은 백성들의 주목과 관심이 떠나면 자신의 존재 가치도 무너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8:5).” 하여 저는 왕이 된 인물이다. 백성들의 요구는 일시적으로 그들의 선택은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돌어설 수 있는 마음이다.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20).”
오늘 날 우리의 민주주의나 대통령제란 그와 같아서 사람들의 마음에 달린 결정이라, 그 지지는 일정하지 않고 언제든지 올리기도 내리기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백성들이 다윗을 환호하자 사울이 조급하여 그 마음에 ‘왕의 자리마저 그에게 돌아가겠구나.’ 하는 불안이 엄습하는 것도 당연하였다.
이와 같은 사울의 우려와 불안 기저에는 일찍이 사무엘의 선언도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13:14).” 궁극적으로 사람들의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것으로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15:28).” 하여 언제든지 자신의 자리는 폐위되고 다른 후임자가 등장할 수 있다는 불안이 사울에게는 있었다. 곧 사람에 의해 사람을 보고 사는 삶이란 이와 같이 불안하다.
이에,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그럼에도 주목 받는 생이 돈이 되는 세상에서 이를 떨쳐내고 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상대적으로 연예인들의 추락이 극적인 까닭도 사람들의 관심으로 세워진 명성이기 때문이다. 목사로서도 그렇다면 삯군이다. 여느 위정자로 선출직에 있는 자들이면 더욱이나 그러하겠다. 그러나 목사 직분의 사람이면 사람을 보고 서서는 안 된다. 하여 그처럼 기를 쓰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세를 불리고, 국민들의 지지도에 따라 정치 생명이 좌우되는 사람들처럼 주의 사명자로서 '목사'가 이러한 세상 시스템으로 편승하여 축적하는 모든 명성은 저주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일갈한다.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사 51:12).”
오늘 사울의 위기감은 사람들의 지지에 따른 내적불안이었다. 한 작은 목동 소년의 등장이 공고할 줄 알았던 자신의 왕의 자리를 이토록 허무하게 위협할 줄은 몰랐다. 곧 왕직(王職)이란 게 얼마나 부질없고 일시적인 것인가 하는 것을, “사울이… 주목하였더라.” 하는 대목에서 저의 불안요소를 상상하게 된다.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18:9).” ‘주묵하다’는 ‘의심에 찬 눈으로 관찰하다’는 의미다.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하는 ‘들보’다.
하여 예수님은 이르시길,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 곧 다들 들보가 씌어 그런 눈으로는 무엇을 봐도 바로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눅 6:42).” 이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이고, 저마다는 자신들이 옳다 여기는 이유이다.
이때에 ‘하나님의 부리신 악령’이 그 속에 머문다.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18:10).” 극심한 피해 의식과 불안이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여 스스로를 무장시킨 결과다.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하는 일이다. 그 결과 사람들 앞에서 마구잡이로 떠들어대고 선동한다. “정신없이 떠들어대므로” 이에 평안을 구하나,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도 저는 이를 못 견뎌,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오늘 이 사회를 위협하는 것은,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가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잠 26:9).”
다들 배울 만큼 배웠고 가질 만큼 가졌으며 그 권세 또한 누릴 대로 누린 자들로, 알만하나 미련한 자들로 그 입의 잠언이 사람들의 영혼을 미혹하는 것이다. 그랬을 때 “민족들은 불에 굽는 횟돌 같겠고 잘라서 불에 사르는 가시나무 같으리로다(사 33:12).” 곧 파국으로 치닫는 듯한 현실을 보며, ‘요나단’의 우정과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다. 악령의 적극적인 활동은 하나님의 묵인 하에 이루어지는 일로, 이는 ‘사울의 종말’ 곧 이 땅의 위선자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들에게 임할 결국을 암시한다.
기어이 자기 분에 못 이기고 “창을 던졌으나” 하나님은 이를 적중시키지 않으시고, 다윗이 그 창끝을 피할 수 있게 하셨다. 사울이 연거푸 두 번 던졌어도 그 결과는 다르지가 않다. 그런 가운데 다윗은 그의 용맹과 기지로 이에 대항하거나 저항하지 않았다. 저는 다만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의 부리시는 악령까지도 인정하는 사람으로, 다만 ‘사울의 창’을 두 번 피했다.
이에,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
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3-14).”
결국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그러므로 오늘의 이 모든 어지러움 속에서도 주의 뜻을 살피고 주를 인정함으로,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하는 찬송이 흘러나온다. 다들 두려워서 저러는 것이다. 가진 것을 잃을까 하여 저런다. 그 모든 게 주의 것임을 인정하기까지 오늘의 이와 같은 혼란은 가중될 터,
하나님이 그들의 날들을
헛되이 보내게 하시며 그들의 햇수를
두려움으로 보내게 하셨도다
(시 78:33).
이에 우리는,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39).
그러나
그가 자기 백성은 양 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 떼 같이 지도하셨도다
…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52, 7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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