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
삼상 19:18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시 79:9
시기와 미움이 마음속에 들어오면 감정이 요동치며 자신도 살 수가 없다. 이에 사울도 “그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1).” 그 속에 다윗에 대한 살의(殺意)가 들어갔고, 살해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다, 이제 공개적인 선언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저를 죽이려 했던 까닭은 자신의 왕권과 세습과 세속적 아집과 욕심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좋아하였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좋아하므로” 이 또한 마음이 하는 일로 그리 기울었다. 마음이 향하는 것을 또한 어찌 막을 수 있을까? 실로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였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18:1).”
요나단은 이기적인 욕심을 떠나 변함없이 다윗을 사랑했다. 이러한 요나단의 자기부인(自己否認)과 자기희생은 후일에 세례요한의 마음에 깃든 주님을 향한 마음이었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이것이 본이 되어,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하신 말씀으로 이어진다.
하여 요나단은 부친 사울과 다윗 사이에서 중재를 하였다. ‘아침에 숨어 있으라.’ 하고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로 꾀한 이상 그를 신속히 먼저 숨겨야 했다. 그 은밀한 곳에 다윗을 두고 요나단은 간곡하게 사울의 마음을 설득한다.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칭찬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하지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까닭 없이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삼상 19:4-5).”
이를 보면서 대단한 용기와 사랑이란 생각을 하였다. 사울은 왕으로서 다윗을 죽일 작정인데, 그 앞을 가로막고 그와 같이 요동치는 마음을 다독이며 설득한다는 게 진심으로가 아니면 어려운 일이다. 미움은 이미 살인하는 마음과 같아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가? 미워하는 마음은 살인하는 것과 같고 그 속에는 영생이 거할 수가 없다!
요즘은 가끔 동생의 일을 생각하면 여러 의미가 든다. 본인도 감당하기 어려웠던 아이를 맡겨서 2년 넘게 보살폈는데, 아이가 꾸며낸 몇 마디 말에 한술 더 떠 미워하는 영이 그 속에 들어간 것이다. 이는 단지 동생을 향한 게 아니라 자신의 모진 세월에 대한 원한이겠다. 아이 아빠가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여러 남자와 생활하였던 일에서부터, 인격적으로 바르게 자라지 못한 아이는 결국 게임에 사로잡혀 이를 뭐라 나무라는 엄마도 거짓말로 경찰에 신고하던 아이인데… 그런 것을 돌보며 그 영혼을 사랑으로 보살피던 것이 결국은 사소한 거짓말로 부풀려져, 촉법소년법이란 게 참으로 필요악이라, 아이가 그렇다고 하는 주장에만 스무 가지가 넘는 혐의로 고소를 당한 것이다.
아이엄마는 자기 인생에 대한 미움이 이 일에 전가된 탓인지, 그 속에 투영된 미움은 악에 악을 더하는 듯하였다. 그런 상대를 우리는 감당하기 어렵다. 아이가 그렇다고 하면 법이 그렇다는데 아무리 억울함을 호소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 되었다.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훤히 다 보이는 죄를 두고도 법이 그렇다면서 서로가 짜고 치는 판에서는 정의란 게 얼마나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인지, 오늘 우리 사회가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결국은 하나님이 하신다! 졸지에 출국금지를 당하여 다시는 필리핀으로 돌아가지 못하자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었으나 그럴수록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께 아뢰고 주를 의지하는 것뿐이라, 그래서야 어찌 대응이 되겠나싶었다. 그런데 1심이 끝나고 항소가 이어지고 어느덧 3, 4년이 흐르는 동안 아이와 아이엄마의 형편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서로가 전해들은 소리라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처음에는 그렇듯 기세등등하여 무슨 로펌 변호사를 네댓 명을 사서 죽기 살기로 할 것 같더니, 항소에는 변호사도 사지 못할 형편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우리가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이여 이방 나라들이
주의 기업의 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시 79:1).
이렇듯 우리의 사정을 주께 아뢸 뿐,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 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 거리가 되었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질투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4-5).
하며 주께 아뢰었더니, 오늘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보낸 암살자들이 예언을 한다.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19:20).” 뒤미처 사울도 찾아왔다가 예언을 한다.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으며(23).” 때는 다윗이 피하여 주의 종 사무엘과 살고 있었다.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18).”
라마는 다윗의 출발지인 기브아에서 북쪽으로 약 3.2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선지자 사무엘의 고향이자 활동의 중심지였다. 다윗은 사무엘에게로 나아갔다. 우리가 어려움이 찾아오면 주의 전으로 나아오듯 다윗이 이처럼 사무엘에게로 갔다. 이는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곧 우리에게 어려움이 오면 우리는 주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다. 주 외에 누구에게 하소연한들, 어디 도움을 구한들, 법 위에 군림하는 권세 잡은 자들의 세상에서 우리가 어찌 저들을 당할까?
자신의 딸 또한 이런저런 청탁과 온갖 술수로 거짓으로 혜택을 누리거나 특혜를 받아 외교부에 채용되었으면서 이를 마치 당연한 것처럼 사과도 않는다. 그러면서 정적에 대해서는 같은 기준이 아니라, 가차 없이 법을 적용하여 탈탈 털어 한 가정을 매장시키는 게 이 땅의 권세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붙들고 의지하여 도움을 구할 이는 여호와 하나님뿐이시다.
사울의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 그러니 왕이 된 그를 누가 막을 수 있겠나? 다윗은 위협을 피해 선지자가 있는 라마로 갔고, 사무엘과 살았던 것이다. 우리의 상황이 긴박할수록 우리로서는 성전을 찾고 주의 곁에 머물 따름이다. 사무엘은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을 알고 있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13:13-14).”
하여 사무엘은 다윗과 같이 나욧으로 갔다. 나욧은 거처, 거주지라는 뜻으로 오늘날로 말하면 기숙사나 숙소 시설을 가리킨다. 나욧은 사무엘이 자신의 주변에 모여드는 제자들을 수용키 위해 세운 기숙 시설일 것이다. 나욧은 라마에 있는 ‘교육의 집’이라 할 수 있고, ‘선지 학교’란 의미도 내포한다. ‘초원 지대’라는 어근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하여,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삼하 7:9).”
그와 같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던 이 곳과 그 모든 성읍에 다시 목자가 살 곳이 있으리니 그의 양 떼를 눕게 할 것이라(렘 33:12).” 이에 나욧은 당시의 선지생도들을 양성하는 교육시설로 이해된다. 이곳에서 ‘선지자 무리의 예언하는 것’이 널리 퍼진다. ‘선지자 무리’는 사무엘을 교장으로 하여 그로부터 영적 지도를 받기 위해 모여든 주변 훈련생도들이었다.
저들이 ‘예언한다’는 성령에 감화되어 여호와의 영광을 찬양하며 노래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의 입에 담아주시는 신령한 ‘계시’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아지경의 황홀경이 아니다. 분명 자의식을 소유한 채 경건하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자발적인 참여다.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가령 나의 이 글쓰기도 그러하다. 혹은 이따 수요일 오전 출근 전에 아이가 자원하여 성경공부를 하는 일이다. 어제도 밤늦게 성경구절을 보내고 7시 반에서 한 시간 남짓 출근 전에 시간을 두고 말씀을 나누는 일도 그러하다.
우리가 예언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고, 서로가 말씀을 나누고 주를 인정함으로 주가 하시는 일과 주의 뜻을 바르게 알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다윗을 잡으러 간 사울의 군사들도 사무엘과 선지자 무리의 함께 ‘예언의 노래’를 하였다. 이는 위로부터 하나님의 영이 강권적으로 임하심을 의미한다. 스스로는 자제할 수 없는 ‘예언의 상태’에 사로잡힌 것이다. 예언이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것이다. 계시란 말씀을 열어 보여 알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로 주를 찬송하게 하는 일이다. 찬송이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 같아서 사울은 다른 사람들도 보냈으나 저들도 예언을 하였다.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어떤 사람이 그것을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다른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했으므로 사울이 세 번째 다시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19:20-21).” 그야말로 기가 찰 노릇이다. 그러자 “사울도 라마로 가서 …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으며 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22-24).”
결국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시니…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예언을 하였으며’ 사울의 이와 같은 체험은 그가 보낸 세 그룹의 전령들과 차이가 있다. 사울은 이미 선지자 무리를 만나기 전부터,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도착하여 물어 이르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하고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는 길에서부터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셨다. 그렇게 저는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다.
이렇듯 “이르기까지” 사울은 자신의 사자들과 달리 보다 강권적인 성령의 역사로, 보다 지속적으로 사로잡혀 그 강퍅했던 사울의 심령도 하나님의 영이 완전히 주장하시게 된 것이다. 그저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가던 길에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사울 왕의 강퍅한 심령을 사로잡은 것이다. 마치 바울이 사울 시절 다메섹에서 만났던 그와 같은 강권하심 같이 말이다. 그때에 바울도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행 9:4).” 이를 바울은 여러 차례 회고하며 증언하였다(22:7, 26:14).
오늘 사울 왕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수치를 드러낼 정도로 성령의 역사에 압도되었다. “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삼상 19:24).” 실제 우리는 성령의 강권하심 앞에서 자신의 폐부를 거침없이 고하고 자복한다. 마치 ‘벌거벗은 몸으로’ 누운 것처럼 우리의 아집과 교만은 무장해제 당한다. 체면이고 뭐고 없다. 주 앞에 엎드러지는 것이다.
그렇듯 오늘 아침도 아이와 나눌 말씀은,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골 2:16-19).”
즉 ‘그리스도의 완전한 승리’와 그리스도인들의 승리에 참여를 위한 것으로 이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먹고 마시는 것’으로 거짓 교사나 금욕주의자들 같이 외식하는 자가 되지 말라한다. 더욱이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 즉 우리가 지키는 ‘성일’ 곧 ‘특별한 날’에 의미를 부여하느라 형식적인 것을 삼가야 한다. 이를 바울은 ‘초등 학문’이라 표현한 바 있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9-11).”
억매이지 말 것과 마음을 다할 것을 동시에 우리는 분별해야 한다. 예배의 형식이 중요하나 내용보다 우선하지 않고, 내용은 귀하나 형식 없는 무질서로는 헛되다. 이러한 날들을 준수하는 데 있어 사람들의 판단을 받거나 비난 받을 이유가 없다. 이를 바울은 ‘장래 일의 그림자’라 하였고, 그러므로 우리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하고 강조하였다. 거짓 교사들 곧 오늘의 이런저런 그릇된 교리나 사상이 ‘절기’를 내세워 우리를 속박하게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상징하는 ‘그림자’에 불과할 뿐이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8:5).” 하였던 것 같이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10: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하고 충고한다. ‘일부러 겸손함’은 위선적인 겸손이다. ‘천사 숭배’는 온 우주를 채우고 있는 영적 존재를 과신하는 것으로 ‘거짓 교사들’이 즐겨 찾는 ‘헛된 가르침’이다. 심지어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는 것보다 성모나 성인을 추대하여 이들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경배도 그러하다. 미신적이고 샤머니즘적인 토속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우리의 감정을 부추겨 선동하는 것이다.
이번에 특히 깨달은 것은 <말씀은 선포돼야지 선동되어서는 안 된다.> 선동은 다른 지형지물을 이용해서라도, 온갖 잡기나 허상을 지어내서라도 경배를 강요한다. 이는 그 자체로 교만한 것이다. 그런데 천사에게 경배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에둘러 겸손한 행위라고 주장하는 것이어서 또한 거짓되다. 우리는 본 것을 의지하고,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는 것에 현혹된다. 그래서 ‘거짓 교사들’의 특징은 과장과 음모가 몸에 뱄다. 신비적 체험에 휘둘린다. 그것을 자랑한다.
결국 ‘육체의 마음’은 ‘성령의 마음’을 거스른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5-16).”
이렇게 오늘도 아이와 나눌 성경공부까지 묵상에 더하면서,
교회의 구성원인 각 지체들이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하여 긴밀히 연합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양육시킴으로 성장해 나간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거짓 겸손과 천사 숭배로 대처하여 자신들을 자랑하였다.
부디,
주를 알지 아니하는 민족들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나라들에게 주의 노를 쏟으소서
(시 79:6).
주 앞에 아뢰며,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9, 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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