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삼상 22:1-2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시 82:3-4
다윗의 도피생활은 끝이 없는 듯하다. 그런 와중에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이란…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1-2).” 도대체 자기 앞가림도 못하고 있는 처지였다. 때는 다윗이 아둘람 굴로 도망하여 있었다. 아둘람은 피난처란 뜻으로 그 위치는 가드와 베들레헴의 중간, 가드 남동쪽 약 14km 지점이다.
저에게 모여든 4백여 명은 금세 6백여 명으로 불어난다. “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 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다윗이 그일라에서 피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말하매 사울이 가기를 그치니라(23:13).” 곧 저가 도망하여 가는 곳마다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 하니 각기 칼을 차매 다윗도 자기 칼을 차고 사백 명 가량은 데리고 올라가고 이백 명은 소유물 곁에 있게 하니라(25:13).”
아둘람 굴은 본래 유다의 영토였으나 당시 블레셋의 지배 하에서 다윗은 이 국경지대의 굴로 숨어들었다. 그런 가운데 저를 찾은 그의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은 실제 저를 무시하고 핍박하던 자들이다. 또한 같이 온 이들의 행적이 참으로 가관이라,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다윗은 이들을 박대하지 않았다. 자신의 형편을 고려하여 돌려보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저들로 정예부대로 삼았다.
아둘람 굴은 다윗의 가족이 살던 베들레헴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졌다. 그런 가운데 환난당한 모든 자들이 그리로 모였으니, 당시 사울의 학정(虐政)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던 사람들이다.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사 51:13).” 이에 오늘 시편으로 연결하면,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시 82:3-4).
이는 우리의 사명이자 주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기초가 되겠다. ‘빚진 자’는 채주의 강압적인 고리(高利)로 경제적으로 억눌리고 고통을 당하는 자이다. 마음이 원통한 자는 애매히 고통당했던 한나의 경우처럼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고통 중에 있는 자이다. 이들이 스스로 모여들었다. 자신들의 처지가 그러하지 않았더라면 다윗을 찾아 그와 같이 숨으려 하였을까? 더러는 우리의 처지가 같은 처지의 사람에게 위로가 되고 저들을 품을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종종 아내는 내 이야기로 어느 아이의 엄마를 위로한다. 신기하기도 하지, ‘그런 자들’이 온다. 현재 6년째 다니는 아이는 모든 학원에서 쫓겨나고 학교에서도 요주의 인물로 분류되었다. 아이를 가르치고 뭐라 이르다 보면 제풀에 성질이 나고 짜증이 일기 일쑤다. 말이 통하지 않고 이해가 부족하며 자기 고집은 강하다. 그러니 자칫 아이의 행동이나 말투가 사람을 놀리는 것 같을 때가 있다. 하지마, 그러면 더한다. 화를 내면 오히려 그러는 것이 이상해져 나만 우스워진다. 점점 그 상태가 심각한데 어찌 할 능력은 우리에게 없다. 그러니 주의 마음으로 주의 사랑으로가 아니면 같이 하기 힘든 사람들이 곁에 늘 있다.
이처럼 여러 환경의 사람들이 스스로 뜻을 세우고 다윗에게로 모였다. 저들을 박대할 수가 없다. 여러 사람들 중에 많은 용사들과 선지자, 그리고 지사(志士)들도 있었다. “다윗이 기스의 아들 사울로 말미암아 시글락에 숨어 있을 때에 그에게 와서 싸움을 도운 용사 중에 든 자가 있었으니(대상 12:1).” 그런 가운데 “그 때에 성령이 삼십 명의 우두머리 아마새를 감싸시니 이르되 다윗이여 우리가 당신에게 속하겠고 이새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함께 있으리니 원하건대 평안하소서 당신도 평안하고 당신을 돕는 자에게도 평안이 있을지니 이는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도우심이니이다 한지라 다윗이 그들을 받아들여 군대 지휘관을 삼았더라(18).”
그렇듯 작고 보잘것없는 무리와 조직이 구성되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점점 타락하고 쇠퇴해가는 사울 왕국에서 침묵하던 자들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안주하기보다 장차 이스라엘을 새롭게 할 자로 부름 받은 다윗과 더불어 고난당하기를 기뻐하여 이처럼 모였다. 그렇게 함께한 자가 4백 명 가량이었다. 이들은 전투에 참여할 만한 용사들만 의미한다. 다윗이 그 부모를 위해 모압으로 들어갔을 때 선지자 갓이 찾아왔다.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은 다윗이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22:4-5).”
여기서 선지자 갓이 갑작스럽게 등장한다. 갓은 사무엘이 지도하는 선지 학교 출신으로 사무엘의 명을 받아 다윗에게 와서 하나님의 뜻을 전했을 수 있다. 또는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을 때 모여든 사백 명 중의 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가운데 모압 땅으로 들어가자 하나님의 뜻을 받아 다윗에게 전했을 수 있다. 여러 해석이 분분하나 같이 온 무리 가운데 있었을 것이 타당하다. ‘갓’의 뜻은 ‘행운’이다. 동일한 명칭의 지파, 갓 지파가 있다. 이 선지자는 그 지파 소속의 사람인 듯도 하다.
향후 갓 선지자는 다윗의 도피 생활 중 그의 조언자 역할을 하였다. 다윗이 왕이 된 후 궁전의 선지자로 봉사하였다. “여호와께서 다윗의 선견자 갓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대상 21:9).” 또한 다윗의 범죄를 지적하기도 했다. 때는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삼하 24:10).” 하고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의 선견자 된 선지자 갓에게 임하여 이르시되(11).”
어쨌든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다윗은 어떠한 위험과 역경 속에서도 같이 하는 자들과 언약의 땅,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로 돌아가야 했다. 사실 다윗은 유다로 돌아가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는 등 자신의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시기였다.
갓 선지자의 충언으로 모압에서 나와 헤렛 수풀에 이르렀다. 헤렛은 그 위치가 헤브론 남서쪽 약 8-9km 지점으로 그일라와 인접 지역이다. “사람들이 다윗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 마당을 탈취하더이다 하니(23:1).” 곧 이어지는 그의 사명의 연속을 알게 한다.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2).”
그 와중에 도엑이 다윗에 대해 사울에게 고하고, 사울은 도엑을 보내 85명의 선지생도를 살육하였다.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오 명을 죽였고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22:18-19).”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도엑은 에돔 사람으로 사울의 목자장이었다. 도엑은 놉의 제사장 대학살 사건의 주범으로 사악하고 간사한 인물이다.
저에 대해서는,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 (셀라)
간사한 혀여 너는 남을 해치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
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 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셀라)
(시 52:3-5).
이 얼마나 비참하고 안타까운 일인지,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2-6).”
어느 누군들 자신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자가 있을까? 어제 나는 또 한 번의 우리나라 역사의 비극을 보면서, 대통령을 탄핵하는 헌법재판소 대법정의 풍경과 주문을 낭독하는 주심판사의 모습을 보면서 가까운 훗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우리의 모습을 상상하였다. 우리들 믿는 자들 또한 예외는 아니겠으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대언자로 서 계신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우리 죄가 아무리 엄중하다 해도 우리 주의 사랑이 이 모든 죄를 다 덮고도 남은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나는 어제 당사자는 물론 저를 변호하던 이들 누구 하나 진심어린 뉘우침과 사과가 없다는 데 더 놀라웠다. 심지어 승복의 말도 없이 그저 억울한듯, 뒤늦게 지지자들에 대한 메시지가 나오기는 했는데 여전히 분열을 책동한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저를 변호하던 이들의 짧은 말에서도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아하!’ 하는 탄식과 함께, 훗날 우리가 모두 주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그러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식은땀처럼 소름이 돋았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그러하겠구나, 결국은 끝까지 자기 죄를 인정하지 못하다가 바깥 어두운 데까지 끌려가겠구나…. 물론 사울 왕이 도엑에게 가서 죽이라 명하였지만, 도엑이 제사장들을 죽이는 일에 그처럼 주저함이 없었던 것에서 치를 떤다. 죄란 자기 명분을 항상 우선하여 자신이 보고, 알고, 믿는 대로 행한다, 은혜를 구하지 못하고, 용서를 구하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아우성치는 곳이 지옥이다. 지옥은 그저 분하고 억울함으로 독이 가득하다.
인생의 고난이 우리로 주 앞에 겸허하게 한다. 그때 고난의 참된 위로자를 만나게 된다. 그때에 주님은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사 63:9).” 돌이켜보면 늘 우리는 주를 배신하며 산다. 그런 가운데도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4).” 이에 우리 죄가 아무리 주홍빛 같다 해도,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 10:12).”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오늘도 말씀을 통해, 자신의 처지도 모자라 그 부모 형제와 여러 환난 가운데서 찾아온 이들을 함께 하였던 다윗을 통해 주의 인자하심을 묵상하게 된다. 이에 오늘 우리에게 이르심은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롬 15:1-2).” 그러므로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
도엑 같은 자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오늘 우리 안에 내재하는 육의 소욕이 다르지 않다. 하여 우리 사람이 존귀한 것은 우리의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하나님의 영을 모시고 사는 삶으로 가능하였다. 하여 다윗은 기도하였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시 40:1).
이에 우리도 이와 같은 말씀으로, 이와 같은 현실에서, 이와 같은 사람들과 살면서,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82:3-5).
나는 할 수 없으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6-7).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8).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이 있나이다 (1) | 2025.04.07 |
---|---|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0) | 2025.04.06 |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0) | 2025.04.04 |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0) | 2025.04.03 |
우리 죄를 사하소서 (0) | 2025.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