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라 하니라
삼상 24:20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 84:5
악은 참 부지런하다. 사울은 곧바로 다윗이 있다는 ‘들염소 바위’로 갔다.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1-2).” 이를 두고 다윗은 자신을 겸손히 낮추며, 사울의 허물을 겸하여 속담으로 말한다.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13).”
덧붙여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의 뒤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14).” 하고 다윗은 사울의 부지런함에 대해 헛된 일임을 알게 한다. 당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돌아오자마자 사울은 다윗을 쫓아 서둘렀다. 사울은 다윗을 잡기위해 필요한 병력을 주저하지 않았다. 사울은 다윗의 은신처를 알았고 밀고자의 말에 따라 갔다.
엔게디는 ‘염소의 샘’이란 뜻으로, 사해 서부 중앙에 위치해 있다. 석회석 고원 지대로 온천수가 있는 오아시스이다. 후일에 솔로몬은 사랑하는 자를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 같다’고 에 비유하였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아 1:14).”
사울은 다윗을 추적하러 ‘택한 사람’을 이끌고 그곳으로 갔다. 그 숫자가 무려 3천이나 되었다. 이 병력은 앞서 블레셋을 무찌를 때 동원했던 숫자와 동일하다. “이스라엘 사람 삼천 명을 택하여 그 중에서 이천 명은 자기와 함께 믹마스와 벧엘 산에 있게 하고 일천 명은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기브아에 있게 하고 남은 백성은 각기 장막으로 보내니라(13:2).” 이 정도 규모의 병력으로 다윗과 그의 추종세력을 쫓았다는 게 의아하다.
다윗을 따르는 6백 명을 일거에 제거하려 했던 것 같다. 사울이 다윗의 군대보다 5배나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엔게디까지 간 것은 사울 속에 필히 다윗과 그 세력을 섬멸하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을 반증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호는 언제나 다윗을 피할 수 있게 하셨다. 그런 가운데 ‘사울이 뒤를 보러’ 굴로 들어왔다. 그 굴 안쪽으로는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4).” 저들의 말이 백 번 옳다. 그래도 되고 그러는 게 마땅할 것 같다. 그러나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는 것으로 그쳤다. 그것만으로도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5)” 이를 보면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철저히 자신을 바로 세우려 하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다윗의 설명도 그래서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6).” 곧 우리가 한 사람을 대하는 일에 대하여 저를 주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셨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리 두심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사람이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서 그러하다.
아울러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7).” 자신뿐 아니라 행여 자기 곁의 사람들로도 행여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에 대한 태도를 바로 잡아준다. 다윗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있었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시 3:6-8).
여기서 ‘들염소 바위’는 사해로 내려가는 벼랑의 한 지점이다. 그 가파름이 심하여 들염소나 산양만이 생존하기 적당한 곳이었다. 당시 이 지역은 충분한 풀과 샘에서 흐르는 신선한 물로 들염소가 많이 야생할 수 있었다. 다윗은 사울의 뒤에서 저를 불러 절하고 자신이 자른 옷자락을 보이며 결백을 주장하였다.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10).”
평소 우리를 노리는 사탄은 호시탐탐 기회만 엿본다. 하여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하고 베드로 사도는 일깨운바 있다. 바울 역시도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3-34).”
이렇듯 우리 곁의 누가 해주는 어떤 충고나 권면에 함정이 있을 수 있다. 저의 말이 옳은 듯하고 더욱이 다수의 뜻이라면 그래야 마땅할 것 같다. 그래서들 사회생활이 어렵다고 하는 게 믿음을 지키며 어떤 무리에서 함께 공존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한 사역이다. 오늘날에는 여론에 밀리고 다수에 의해, 이건 아닌데… 싶으면서도 자신의 분명한 의사를 밝히기 어려운 때가 많다. 믿는 자로 사회에서 그 구성원들과 산다는 일은 그 자체로 사역이고 소명이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 5:5-6).”
그렇다보니 나로서는 선뜻 사회생활을 하는 내 곁의 친구나 젊은 성도들에게 뭐라 말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권하고 또 주의를 주어 깨어있게 해야 할 것이다. 그만큼 우리 영혼은 아차, 하는 순간에는 이미 늦은 경우가 허다하다. 다윗이 굴 안에서 저를 따르는 자들의 말에 사울을 죽였다면 어땠을까? 그런 가운데서도 다윗의 신앙의 양심은 작동하여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의 옷자락을 벤 것으로도 마음에 찔린 것이다. 이는 무언가 우리 안에 확실한 확신이 자동하는 게 필요하다. 사랑의 증거는 사랑이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누구에 대해 뭐라 욕하고 저주할 수 있으나 그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해서이다. 어떤 아이를 그만 오게 하고 싶은데 그럼에도 받아주고 같이 하는 것은 주가 보내시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내에게 이르고 그 어려움을 달랬다. 이상할 정도로 지금 가르치는 아이들이 하나 같이 이상하다. 한 아이는 아예 정신과 약을 먹지 않으면 이상 행동을 보이며 실실 웃거나 멋대로 행동한다. 그의 형인 아이는 폭식과 나태로 이제 5학년이 거구에다 비대하고 거짓말을 너무 천연덕스럽게 해서 야단치고 타이르고 별 수를 다 써도 소용이 없다. 집으로 오는 두 아이 가운데 한 아이는 지능이 낮고 다소 조현증상도 보인다. 자꾸 헛소리를 하고 허공에 혼잣말을 한다. 아이엄마는 그럼에도 자기아이는 정상이라고 억지를 쓰며 학교의 권고도 무시하고 있다.
어제도 아이들 이야기를 하며 오후에 산책을 하는데, 아내 입에서 지겹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안 왔으면 좋겠어, 그 애는 그만 뒀으면 좋겠어, 하는 말인데 그 심정이 이해가 간다. 아흔이 넘은 친정엄마까지 돌보느라 아내의 영혼은 황폐할 지경이다. 짜증이 늘고 막말도 자주 쓴다.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는 지금의 처지가 곤욕스럽다. 나는 지난 금요일 장모를 휠체어에 태워 언덕을 따라 동네 한 바퀴를 돌았을 뿐인데, 어쩐지 주말 내내 옆구리가 결리고 어깨가 아팠다. 왜 그런가했더니 늙으신 장모의 몸무게가 장난이 아닌데, 무리해서 언덕으로 밀고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그런 거였다. 어제는 결국 진통제를 먹고 오후 한 때 끙끙 앓기도 했다.
그러니 우리 삶이란 게 얼마나 다양하고 힘에 겨운지…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살후 3:3).” 주가 아니시면 살 수가 없다. 내 안에 다윗을 따르는 무리의 음성이 가득하다. 누가 대놓고 요양원 이야기를 했는데, 또 그게 정신은 멀쩡하신데 장모를 그리 모시기가 안쓰럽다. 그러고 또 말은 그렇지만 아이엄마들이 더는 다른 데서 아이를 받아주지 않고 못 가르치겠다고 하는데 우리까지 박대하는 것은 아닌 듯하여….
한 걸음 사이에 원망과 저주가 있다. 죽음이 보폭 하나에 있다. 사울의 목숨이 그러했으나 다윗의 마음을 잡고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그 양심이 찔려 사울을 살렸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4-25).” 말씀으로 오늘도 버틴다. 마음을 부여잡을 수 있는 것은 주의 마음으로 뿐이다.
집으로 오는 ‘똥싸개’는 그 와중에 또 사춘기까지 겹쳐, 사람을 놀리듯 하지 말라고 하면 더한다. 아내는 미칠 것 같다. 아내가 힘들어할 때 ‘아픈 아이야…’ 하고 이해를 구하고, 장모로 인해 짜증이 고조되었을 땐 ‘곧 우리도 그럴 거야…’ 하고 위로하지만 소용이 없다. 현실은 야박할 정도로 거듭된다. 오늘 저 다윗의 형편도 그러했다. 악은 부지런하여 사울은 블레셋을 쫓다 뒤미처 다시 다윗이 있다는 곳으로 병력을 이끌고 달려갔다. 그럴 때 성경은 이르시길,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7).”
곧 오늘의 이 모든 현실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뜻에 따른 것일 테니, 온전한 마음으로 주를 바란다는 것은 다들 ‘좋은 기회’라 할 때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말씀을 의지해야 한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 4:15-17).”
나의 안팎으로 그럴듯한 주장과 이해가 나의 믿음을 굴복시키려 든다. 믿음으로 산다는 일은 더러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묵묵히 주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할 수 없다. 하게 하시는 이의 권능으로만이 가능하다. 나 역시 생각 같아서는 ‘그런 아이들’은 그만두고, 장모는 이제 어디 가까운 요양원으로라도 모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가끔은 아내가 힘에 겨워 악에 받칠 때는 이러다 먼저 무슨 사달이 나겠다싶다. 그래서도 요즘은 점심때면 같이 산책을 하는데, 아내는 그것도 나를 운동시키려고 그런다고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동네 한 바퀴를 돌다 어디 카페에서 아내가 좋아하는 라떼라도 한 잔 사주는 것으로 위로한다.
“무릇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행하거니와 미련한 자는 자기의 미련한 것을 나타내느니라(잠 13:16).”
우리의 행함에 답이 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6-18).” 오늘 다윗의 행함에서 이를 보여준다. 열 마디 좋은 말이 아니라, 한 번의 행함이 이를 증명한다.
하여,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눅 6:43).”
그러니 오늘도 무던하게 또 하루를 주의 뜻으로 합당하게 사는 일, 자신이 속한 현실에서 주신 바 그 한 날의 수고를 준행하면서, 이는 주를 인정하는 것으로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말씀 앞에서 다시 나의 행실을 돌아본다. 다윗은 또한 사울로 하여금 자신에 대하여 어떠한 적의나 질투나 적개심을 갖지 않도록 전하였다.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의 뒤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삼상 24:14).” 결국 자신을 낮춤으로 저가 맡은 임무를 일깨우고자 한다. 누구를 적대시하거나 경계하면 자신의 영혼이 황폐할 뿐이다. 이를 주께 맡기고,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시 84:1-2).
사는 날 동안 주의 궁정에서의 삶이란,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4).
그리하여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5-7).
이에 기도한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
…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8, 10-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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