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전봉석 2025. 4. 6. 04:13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삼상 23:14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시 83:18

 

 

다윗이 사울을 피해 광야를 떠돌았다. 하나님은 다윗을 사울에게 넘기지 않으셨다. 그런 가운데 블레셋이 그일라를 쳤다. 그일라는 헤브론 북서쪽 약 13km 지점으로, 아둘람 굴에서는 남쪽으로 약 5km에 위치하였다. 가나안 정복 후 여호수아에 의해 유다 지파에게 할당된 지역이다.

 

이곳은 당시 다윗이 머물고 있었던 헤렛 수풀에서 북쪽으로 약 9km의 거리였다. 그리고 아둘람이 당시 블레셋의 영토였다는 점에서 그일라는 블레셋의 국경에 가까운 위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블레셋은 그일라 타작마당을 탈취하였다. “사람들이 다윗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마당을 탈취하더이다 하니(1).” 블레셋이 그일라를 침공한 목적은 바로 이 타작마당을 차지하려는 것이었다. 추수된 양곡을 탈취할 목적이었고, 이에 상대가 농민들이라 침탈이 쉬웠을 것이다.

 

다윗은 이 소식을 접하고 주께 물었다.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2).” 이때에는 당시 ‘우림과 둠밈’을 두어 질문하고 제사장이 답하는 형식이었다.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 흉패 안에 넣어 아론이 여호와 앞에 들어갈 때에 그의 가슴에 붙이게 하라 아론은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흉패를 항상 그의 가슴에 붙일지니라(출 28:30).”

 

이때 아비아달 제사장의 에봇을 갖고 다윗에게 온 것은 다윗에게 대단한 격려가 되었다.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그일라 다윗에게로 도망할 때에 손에 에봇을 가지고 내려왔더라(삼상 23:6).” 당시에 다윗에게는 갓 선지자가 있었다. ‘이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할 때 이들은 그일라를 친 자들로 저들의 약탈 행위에 의분하여 주께 물은 것이다. 이에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고 주가 허락하신다. 이는 다윗을 사사로서, 왕으로서 그 직분을 수행하여 민족의 구원자로 인정하심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이 같은 뜻은 요단 건너 모압 땅에 있던 다윗을 유다로 불러내신 의도와 부합된다.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22:5).” 우연처럼 일이 그렇듯 전개가 되는데 이를 우리가 이해하는 서사는 시간의 흐름으로 일직선에서이다.

 

곧 우리의 시간과 그 때의 의미를 이해하는 한계이다. 하나님의 시간은 수직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곧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 어찌 이해하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마치 그 시간의 범주는 수천 년 전과 후가 수직적인 게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 다윗의 시간이 오늘 이 시간 교회에 나와 말씀을 묵상하는 나의 시간과 겹치기도 하여 하나이기도 하다. 주 안에서 우리의 시간은 늘 현재진행형이다.

 

어제 오후 친구가 성경 어느 부분을 놓고 질문하여 이를 설명하는데도 이를 어찌 보여주어야 할지, 야곱의 그때와 오늘 우리의 이때가 하나이다. 성경의 모든 사건과 인물과 그 배경과 역사적인 시간의 범주는 오늘 나의 시간과 역사와도 연결이 되어 하나이다. 그렇듯 모든 성경의 말씀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그러므로 다윗이 ‘황무지 요새’에 있을 때에 우리의 처지와 사정도 그와 같을 때가 있고, ‘십 황무지 산골’에 있을 때도 우리 또한 그렇듯 쫓기거나 숨거나 궁지에 몰려 주 앞에 엎드릴 때가 있다. ‘황무지’는 유다 광야로 유다 지역 중앙의 산지와 사해 사이에 있는 광야를 가리킨다. ‘요새’는 산과 수풀 등 자연적 지형지물 등으로 안전을 도모하는 은신처이다. 우리가 주 안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 모든 시간과 환경의 범주가 그러하다.

 

‘십 광야’도 유다 지파에 속하였다. 그 위치는 그일라 남동쪽에서 약 21km, 헤브론 동남쪽에서 약 8km 지점이다. 그리고 산악 지대에 있는 산 중의 하나이다. “그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이르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쪽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삼상 23:19).” 곧 유다 안에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매일 찾되’ 하나님은 그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사실이다. “다윗이 사울이 자기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 광야 수풀에 있었더니…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찾으러 온 것을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아뢰매 이에 다윗이 바위로 내려가 마온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듣고 마온 황무지로 다윗을 따라가서는(15, 25).” 도대체 이와 같은 일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오늘 우리 사회의 갈등과 반목으로도 짐작이 간다.

 

이는 결국 “사울이 다윗을 더욱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18:29).” 하는 말씀으로 집약된다. 그만큼 분열로 인한 미움과 원한이 삶을 소비하게 하고 온통 그 관심을 악으로 물들인다. 누가 어느 글에 댓글을 남겼는데 질문이 아닌 지적과 자신의 주장을 전달하기 위한 일방적인 표현이었다. 순간 기분이 상해서 무시하고 지우려하다 답글로 저의 지적에 근거가 되는 성경구절을 적어주었다. 그렇듯 우린 순식간에 감정의 골에 처박히고는 한다.

 

우리 안의 격분과 내분은 사탄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다. 오늘 본문은 사울이 다윗에 대하여, 그처럼 사로잡혀 이와 같이 다윗을 죽으려는 데 혈안이 된 것을 보면서도 느낄 수 있다. 하여 성경은 이르시길,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2-3).” 이는 권고가 아니라 명령이다. 그리 해야 하는 것이지, 그렇지 못할 경우 사탄은 얼씨구나 한다.

 

더욱이 곤경에 처한 성도를 돕는 일은 의무다. 그일라의 타작마당이 공격당했을 때, 현재 다윗의 처지에서 저들을 도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를 외면하지 않고 주께 물어 주의 뜻을 구하는 것은 성도로서의 당연한 책무이다.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신 15:7-8).”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몸으로서,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막 10:8).” 너와 나의 존재의 이유이고,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3).” 하여 우리가 하나로 통일되어져 가는 것이다.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8-10).”

 

그리하여 구약의 오늘 이 본문의 내용이 오늘 이 현실의 나의 이야기와 중복되면서,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23).” 어느 훗날 우리는 모두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설령 서로 얼굴도 본 적 없고, 누구인지 알지도 못한다 해도 우리가 함께 주의 이름을 부를 때에,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시 25:5).

 

그렇듯 주말 오후께 뜬금없는 친구의 전화로 나의 시간이 활력을 얻었다. 그 전까지는 궂은 날씨로 온 몸에 파스를 바르고 온열기에 몸을 지지며 끙, 하고 늘어져있던 것이 성경 어디, 그 이야기 속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자 나는 얼른 책상에 앉아 같이 성경을 펼치고 이를 살피며 설명했다. 그렇듯 묻고 답하다보니 한 시간 남짓 훌쩍 우린 한 공간에 하나로 충만하였다. 고로 우리가 하나님을 의뢰한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할 수 없으나 우리로도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안의 범주에서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6).”

 

오늘 다윗이 그의 처지에 누굴 도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도, 그일라가 공격당함을 듣고 주께 묻고 저들을 물리치는 일에서 알 수 있다. 여전히 서슬 퍼런 사울의 살기에도 요나단이 다윗을 주의 사랑으로 사랑함으로 새 힘을 얻게 되는 것과 같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16-17).”

 

단순히 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우정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주를 신뢰함으로 주의 마음으로 가능한 천상의 영역에서의 관계이다. 사람으로는 본디 자신의 왕권을 위해서도 정적인 다윗을 부친 사울과 함께 적대시해야 할 것인데, 요나단은 알고 있었다.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이를 저의 부친 사울도 알고 다윗을 죽이려 하나,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다윗을 살리려 한다. 이것이 다윗에게 용기를 더한다.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우리가 서로 서로에게 있어 어떠한 존재인가를 이 표현으로 충분할 것 같다.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을 더욱 힘 있게 의지할 수 있도록 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 살아가는 이유이다. 갑작스런 친구의 전화와 질문이 귀찮지 않아 오히려 끙, 하고 늘어져 있던 나의 약한 육신에 새 힘을 주었다. 그 시각에 친구 역시 책상에 앉아 주일에 서로 나누어야 할 성경을 읽다 그리 묻고 알고자 하는 마음도 주의 것이다. 주가 주시지 않으면, 요나단도 다윗도 서로가 이처럼 사랑할 수 없다.

 

때는 ‘십 황무지 수풀’에 숨어 있을 때이다. 요나단이 일부러 다윗에게 찾아왔다. 요나단의 이 같은 행동은 사울에게 쫓겨 심한 곤경에 빠져있을 다윗을 위로하기에 충분하였다. 또한 다윗과 자신이 맺어진 언약의 확신이다. “너는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서 나를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20:14-16).”

 

이에 저들은 ‘그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였는데’ 요나단이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도록 한 위로와 격려의 말은,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17).” 하는 것으로, 다윗의 왕권에 대한 인정과 보장이었다. 여기서 ‘두려워 말라.’ 하고 서로 권하고 힘을 주는 이 문구는 ‘하나님께서 함께 계셔서 적극적으로 도우실 것’에 대한 서로의 확신을 기반으로 한다.

 

이는 성경에 자주 언급되는 표현으로,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또는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오늘 이 말씀이 나에게 들려지는 것이면 너에게도 보여지기를. 나에게 보이는 것이면 너에게도 들려지기를. 서로가 당면한 현실이 어떠하든지, 온갖 세속과 사탄의 위협으로 우리가 늘 도전 받고 더러는 시들하여 좌절하기도 하나,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31).” 저 하찮은 것들보다 우리는 엄연히 귀하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32-33).” 당장 이 현실은 녹록하지 못하다 해도 분명한 사실은,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14:27).”

 

이렇듯 우리는 ‘내 곁의 그일라의 곤경’을 외면할 수 없고, ‘수풀에 숨은 다윗’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우리는 다윗과 요나단이 서로 의지하였을 새 힘으로 힘을 얻는다. 힘들고 지쳐 넘어지고 쓰러져 숨어있고 싶을 때도,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무릇 주의 원수들이 떠들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 머리를 들었나이다

(시 83:1-2).

 

우리의 현실은 시편의 세계다. 기도와 찬송으로,

 

나의 하나님이여

그들이 굴러가는 검불 같게 하시며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 같게 하소서

(13).

 

이 모든 현실의 처지와 사정은 곧 사라질 것임을 알고,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