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삼상 26:9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시 86:11
다시 또 느끼지만 악은 참 부지런하다. 또한 같은 일을 반복한다. 분명히 사울은 다윗을 인정하고 다시는 안 그럴 것처럼 굴다 오늘 또 십 광야로 달려갔다. ‘십 사람’이 사울에게 알렸다. 저의 밀고가 두 번째다. “그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이르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쪽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23:19).” 하였고, “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매(26:1).”
이는 동일한 사건을 두 번 서술하고 있는 게 아니라, 악의 특징인 같은 일의 반복을 의미한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 26:11).” 그러니 앞서 그러했으면 다시 그러지 않을 것 같은데, 여기서 ‘십’은 헤브론에서 남동쪽으로 약 8km, 마온 북쪽으로 약 10km 지점에 있는 유다의 성읍이다.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23:14).”
거기다 ‘기브아’는 사울의 고향이자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였다.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있다. 처음 ‘십 사람들’의 밀고는 광야 남쪽에 있었다. “그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이르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쪽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23:19).” 오늘은 ‘광야 앞’으로 “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매(26:1).” 같은 곳이지만 다른 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처음 밀고 때는 다윗이 여기처럼 ‘하길라 산’이 아닌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있었다. 하길라 산 수풀 요새는 십 황무지의 또 다른 부분으로 ‘수풀’은 특정한 지점을 가리키는 지명이었다. “다윗이 사울이 자기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 광야 수풀’에 있었더니(23:15).” 이를 주목하여 보는 것은 그때마다 반복해서 되풀이하는 악의 끈질기고 같은 유형의 특징을 주목하게 된 것이다.
그렇듯 사울이 또 다윗을 찾으려고 병사 3천을 거느리고 간다. “사울이 일어나 십 광야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과 함께 십 광야로 내려가서(23:2).” 분명 앞서도 다윗을 아들아, 부르며 심지어는 축복하고 돌아갔다.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라 하니라(24:20-21).”
이는 ‘십’ 사람도 ‘사울’도 모두 악신(惡神)의 영향 하에 있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16:14).” 그러니 저도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 것으로,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 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18: 10).
그러니 악한 감정은 지극히 불안정하여 변덕스럽고 같은 짓을 되풀이한다. 더욱이 사울의 성격이 스스로 억제하여 될 일이 아니었다. 이는 다윗에 대한 증오심을 그 안에 두고 있어 언제든 다시 발화하는 불씨 같다. 그래놓고는 다시 안 그러겠다하고 돌아서면 되풀이하게 되는, 죄는 중독이다. 이번에도 사울은 정예병 3천 명을 이끌고 다윗을 잡으러 갔다.
여기서 다윗의 일관된 중심을 돋보이게 한다. 저는 사울을 친히 죽여 복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다윗을 억제하게 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었다. 곧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는 것으로 ‘여호와께서 택하사 기름 부은 자’는 여하한 경우일지라도 그 생명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임을 그는 분명히 하였다. 이는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그를 세우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서 오는 존중과 예의와 경건한 마음이다. 그것은 여호와의 주권을 침해하고 모독하는 일이라 여기는 것이다.
다윗은 이러한 원칙에 철저하였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24:12).” 하였듯이 이번에도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26:9).” 하고 그의 종 아비새를 제지한다. 이어 예언과 같이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10).”
하여 결국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잡으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에게 중상을 입은지라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 무기를 든 자가 사울이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31:3-5).” 이와 같은 비극이 현실이 되었다.
결국 우리의 어떤 ‘노여움’에 대하여 하나님은 금하신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나는 자주 이 원리의 말씀을 되새긴다. 내가 어찌 해보려하는 어떤 수고나 앙갚음은 아무리 스스로에게 분풀이가 되고 정당한 것이다 해도 이는 죄가 된다. 누가 어떤 일로 힘들어하다 자신이 어찌 되갚으려할 때 나는 이 말씀으로 위로하고 권면한다. 이는 늘 나 자신에게도 동일하다. 신기한 것은 충분히 억울하고 분하여 병이 날 지경인데, 어디쯤에서 주가 이루신 것을 보게 된다. 그때마다 나는 주께만 아뢰고 호소할 것은 그래서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못할 말이 없다. 억울함을 토로한다. 이에 하나님이 선악간의 판결을 이루신다.
공의의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성경의 복수이다.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신 32:35).”
나 역시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없던 일 같겠나…. 예전에는 울면서 깨고 보면 꿈에서도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거나 모두가 둘러서서 이상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뚜렷했다. 나는 지금도 어떤 이의 이름을 기억한다. 유난히 그 친구는 좀 그랬다. 나는 자주 상상하기를 그 애에게 여러 번 복수하는 것이었다. 우습지만 지금도 복수나 통쾌한 앙갚음을 소재로 한 영화를 좋아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는 그때 그 일들이 서러움이나 노여움으로 남아있지 않다. 심지어 누가 그와 유사한 일로 힘들어할 때는 자진해서 내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께만 의뢰하였을 때 가능하다. 우리가 정말 아무 것도 안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사회는 종종 서로에게 실토하고 서로 술 한 잔을 권하여 어깨를 툭툭, 쳐주면 풀어질 일이라고 착각 한다. 내 경험으로도 그럴 리 없다. 말이란 게 또 부풀려지는 풍선 같아서 내 뱉은 만큼 더해지는 감정이 어느 순간 뻥, 하고 터지기 마련이다. 참으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주께 아뢰는 일은 더러 막연할 수 있다. 그래서 주가 내게 행하신 일을 참고하면 나는 이를 손으로 썼다.
청소년기에는 한 친구를 곁에 두어 그 친구와 그렇듯 편지를 서로 주고받았다. 하긴 그 친구 역시 부친은 나환자였고 모친은 심한 절름발이였다. 위로 언니와 밑으로 남동생은 사실 서로가 친자매나 남매가 아니었다. 먼 친척이나 어디 보육원에서 입양되거나 호적을 옮겨 암묵적으로 서로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가족 이상의 어떤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살았다.
그런 가운데서 오는 어떤 외로움과 서러움, 고마움과 미안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를 그 애는 참 맛깔스런 언어로 잘 서술하여서 나는 자주 그 애 글을 읽다 울고는 했다. 그러니 나의 서러움은 저 애 앞에서 초라할 정도였다. 어린 게 그리 자주 느끼면서 나 역시 내 이야기를 덤덤하게 글로 쓰곤 했었다. 당시는 서로 만나서 그런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고 다만 글에 쓰고 서로는 잠잠하였는데, 그건 그 애 성격이 차분하고 조용해서였다. 하나님은 그렇듯 그런 적절한, 천사 같은 이들을 내 곁에 두셨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히 10:30-32).”
어떤 일에 함부로 감정을 드러내거나 화풀이를 하고 나면 그곳이 지옥이다. 상대를 지옥에 던진 줄 알았는데 내가 그 속으로 떨어진 셈이다. 하여 항상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 것을 성경은 은연중에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우린 약함으로 기도할 뿐이다. 주께 아뢰는 것이 힘이 된다. 이후에 어떤 결론이 와도 더는 마음이 요동치지 않을 것은 주께 맡긴 만큼으로, 10중에 7만 주께 맡겼으면 3으로 씨름하게 돼 있다. 10을 전부 맡기기까지는,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
여호와여 주께서 이를 보셨사오니
잠잠하지 마옵소서
주여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시 9:13, 35:22).
내가 두려워 손을 휘저으며 “…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마 14:30).” 처음에는 나의 서러움과 원통함으로 고하나 기도하다보면 어느덧 그 내용과 상관없이 의미가 달라져서, “…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이 차이를 알기까지는 거듭 같은 일의 반복인 것 같다. 우린 모두 아둔하고 미련하여서,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4).” 하여 나는 나를 의식해야 한다. 나는 언제든 저들과 다를 바 없이, 개처럼 토한 것을 도로 먹고 돼지처럼 씻고 난 뒤에도 다시 오물에 가 몸을 비비적거리기 일쑤다.
하여 바울은 진리의 경지에 올랐고, 나이 들어 경륜이 깊어졌는데도,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곧 자신이 가르치고 설교한 내용에서 벗어날까 하여,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15:31).” 그리하여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고, 날마다 죽는 심정으로 하루씩을 하루하루 산다는 일이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분량에까지 자라가는 믿음이겠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3-14).”
우리의 날들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참된 승리’의 삶으로 드려져야 한다. 오늘 21절,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하게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 하는지라.” 이번에도 사울을 굴복시킨 것은 다윗의 선으로였다. 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하는 것으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12:21).” 곧 하나님의 지혜와 판단으로,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19-20).”
하는 바울 사도의 깊은 울림이 우리 삶에도 변혁을 일으킨다. 어떻게 해서 C. S. 루이스가 그토록 <고통의 의미>에 점철되어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았는지, 그의 <생애와 변증>을 읽으면서 알 수 있었다. 그의 모친도 부친도 모두 암으로 돌아가셨고, 그의 처도 그 자신도 결국 암으로 생을 마쳤다. 유년시절은 기숙학교로 전전긍긍하였고, 세계 1차 대전이 터져 전쟁터에서 보냈던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저는 점점 무신론자가 되었으나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이끄심으로 끝내는 누구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고 변증하는 학자가 되었다.
훗날에 다윗이 성군이 되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설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오늘과 같이 사울의 수고가 한 몫을 했다. 죽어라하고 다윗을 죽이려하는 사울의 악령으로 인하여 다윗은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긴 것이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우리로 주를 바라며 경외하는 힘은 강하여져서,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엡 2:3-5).”
오늘도 주께 아뢰기를,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시 86:1-2).
그러므로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3-4).
이에,
무릇 주는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 주만이
하나님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10-11). 아멘.
덧붙여서, 오늘 아침에 아이와의 성경공부 요약.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2-6).”
앞서도 언급한 것 같이 “기도를 항상 힘쓰고” 이는 저절로 생겨나는 믿음의 결과가 아니라 신앙의 열매다. 곧 성령의 열매는,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라는 농작물’ 같이 우리의 기도의 수고와 비례한다. 하여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셨다(눅 18:1). 바울도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2-13).”
결국 기도는 오늘 우리 신앙의 척도이다. 신앙의 중추신경과 같다. 하여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왜 그래야 하냐 하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오늘 우리 사회와 지구의 현상을 보면 이는 입증이 된다. 점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온다.
이에 오늘 바울은 여기서 보면 먼저, ‘기도를 계속하라’는 것이다. 또한 그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는 것이다. 이를 부탁함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중보기도를 맡긴다. 무엇을 위한 것인가?
첫째,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시기를.
둘째,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기도는 구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나의 필요와 요구가 대부분이지만 기도를 하다보면 나의 요구는 희미해지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되는 기도로 바뀐다. 바울은 이에 과감하다.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이는 두 시각이 동시에 작동한다.
하나는 자신의 매임으로 자신으로서는 기도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매임으로 곁의 성도들에게 기도의 대상이 되는 일이다. 요즘 같은 때에 나의 치부와 같은 매임을 숨기려 서로가 가면을 쓰고 친절한 타인으로 경건을 위장하지만, 이는 교회 안에서 어울리지 않는다. 더러는 나의 약함과 흉 될 일이 다른 이에게 기도할 수 있는 중보의 대상이 되는 게 특별한 복이다.
이에,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곧 여기서 우리가 마땅히 할 말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비밀, 저가 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제물이 되셔야 했는지… 이는 결국 나의 죄 때문으로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그러므로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 여기서 우릴 구속하시려고 이 엄청난 일을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택하신 일이다(1:4-6).
그러므로 “곧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저 개인적이고 허튼 주장으로 자신을 놓아두지 말고 더욱 철저하게 말씀으로, 그 말씀의 비밀을 가지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믿는 자로서의 티가 나야 한다. 행실과 생각은 물론 판단과 선택이 남달라야 한다. 더욱이 안 믿는 내 곁의 사람들에게 어찌할까, 하기보다 자신을 말씀 안에 바로 하면,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이는 주가 알게 하실 것이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까지도(골 4:2-6).
그러므로,
항상 기도하라. 이는 어떤 특정의 소원을 가지고 그것을 위해 심령을 부단히 단련하는 일이다. 그것은 일생에 그 소원으로 간절하도록 힘쓸 것인데, 기도의 주요 목적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이다.
그때에 기도에는 감사함이 필수다. 항상 기도에 힘쓰는 자는 간구에 몰두하다 감사로 끝맺는다. 축복을 갈망하다, 이미 받은 축복으로 감사가 저절로 나온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함에 있어 ‘깨어 있으라’는 것이다. 아차, 하고 돌아보면 이미 늦은 때이다. 하여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하심인데, 기도는 각성을 위한 게 아니라 결과에 따른 당연한 결실이다. 하여 서로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를 부탁한다.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전도할 문을 열어주시기를 위한 거였다.’ 전도할 문은 말씀의 문이다. 전도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기를 구하는 것이다.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빌 2:24).”
우리로 ‘마땅히 할 말’은 복음이다. 복음은 ‘복음 이외에 구원의 길이 절대로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바울은 교회에 기도를 부탁하며, 이는 또한 교회의 책임으로 기도는 필수다. 이를 위하여 ‘세월을 아끼라.’ 곧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황혼이다. 그러므로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이 하라.’ 쓸데없는 말들을 피하면서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로 알게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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