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전봉석 2025. 4. 11. 04:20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 하니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다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하지 아니하시기로 내가 행할 일을 알아보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하더라

삼상 28:15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시 88:13

 

 

곧 있을 길보아 산 전투에서 사울은 블레셋에 의해 패하고 죽는다. 그만큼 죄가 사람을 붙들면 죽음에 이른다. 두려움은 우리로 주를 더욱 바라게 하여 경외심을 주지만, 대부분은 부지불식간에 죄로 이끈다. 여기 사울은 전쟁을 앞두고 두려움에 떨었다. 하여 자신이 행한 일을 번복하였다.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두고 슬피 울며 그의 고향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삼상 28:3).”

 

하나님의 침묵이 사울로 하여금 엔돌의 접신녀를 찾게 하였다. 그녀가 불러올린 사무엘은 사무엘이 살아생전에 예언했던 것을 그대로 전한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하는지라(19).” 문제는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 하고 묻자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다급하니이다.” 하는 말로 그 이유를 설명한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하지 아니하시기로 내가 행할 일을 알아보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하더라.” 결국 자신의 필요에 의한 것이다(15).

 

이를 어찌 이해해야 할까? 사람은 죽으면 그 영혼이 하늘로 가고 짐승은 죽어 땅으로 간다.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 3:21).” 이에 육신은 분리되어 낙원이나 음부로 가고, 음부로 간 영혼은 다시 올라올 수 없다.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 16:26).”

 

여기서 접신녀에 의해 사무엘의 영혼이 초혼(招魂)하여 올라왔다는 것은 그대로 보기 어렵다. 이는 여인의 접신(接神)을 그리 인정하고, 사울의 다급함이 그리 전하여져, 사탄이 가장하여 사무엘로 꾸며 사무엘이 앞서 예언한 것을 그대로 되풀이 한 것이다. 마귀는 이보다 더한 ‘광명의 천사’로도 위장하고 활동한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4-15).”

 

그러므로 사람은 그 일생에 천사와 사탄이 배정되어 공존한다. 천사는 돕는 자로 늘 같이 하고 사탄은 꾀는 자로 죄를 이끈다. 그렇게 일생을 같이하다 죽으면 천사는 그 영혼과 함께 천상으로 가고 육신은 땅속에 묻혀 저 아래에 남는데, 무당이니 박수니 하는 접신한 자들이 이 귀신을 불러내어 일생을 돌아보거나 마치 앞날을 말해주듯 알게 한다. 후에 예수의 재림 때 죽은 육신들도 들려져서 주의 자녀들은 그 영혼과 합하여 천상으로 올라가고 악인들은 끝내 음부에 떨어져 영원한 형벌에서 고통당한다. 그때에는,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계 20:14).”

 

앞서 이를 어찌 상술하기는 어려우나 사탄, 마귀, 그 졸개 귀신들 또한 위장하거나 예언하는 능력이 있다. 오늘 접신녀를 통해 불려올려진 사무엘은 사무엘로 위장한 마귀의 역사라고 이해한다. 당시에 사무엘은 죽어 장사되었고, 하나님의 영은 침묵하심으로 사울의 다급함이 이와 같은 불신앙의 자리에까지 든 것이다.

 

그렇듯 다급하여 사울은 이미 죽은 사무엘의 혼(魂)을 불러내려는 것이었다. 사울은 자신이 정리한 신접한 자와 박수를 다시 찾았다. 자신의 집권 초기에 무당과 박수를 쫓아내는 일은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려던 노력이다.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출 22:18).” 하심과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31).” 하심을 이행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자기 의에 따른 것으로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결국 오늘 우리의 의, 자신의 의지로 하는 노력으로는 모든 게 허사다.

 

‘사랑이 없으면’ 곧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하나님의 영, 성령으로 하지 않는 그 어떤 의와 사랑과 화평도 모두 선을 이룰 수 없고 악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신 18:10-11).”

 

하면 오늘 날 점점 더 버젓이 방송에서 아무렇지 않게 활동하는 무당이나 신접한 자들이 심각하다. 이와 같은 프로그램이 우리로 선악을 알게 하는 데 분별력을 흐리게 한다. 처음 사울은 나름의 열심으로 시행하였던 종교개혁을 스스로 또 부정하게 된 것이다. 여기의 ‘신접한 자에 대하여 여러 이론과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어쨌든 이와 같은 귀신, 사탄의 활동은 성경도 그대로 인정한다. 제의적(祭儀的) 구멍에서 유출되는 영혼 또는 유령이라 해석하는 것도 맞고, ‘조상’ 또는 죽은 자를 기려 그 영혼을 불러내는 모든 행위로도 해석된다. 이는 어리석고 공허한 일이다.

 

히스기야 왕도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왕하 18:4).” 이와 같은 우리의 신격화하는 무지함을 타파하였다.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 왕도 “그가 전심으로 여호와의 길을 걸어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들도 유다에서 제거하였더라(대하 17:6).” 이렇듯 어떤 형상이나 도구를 가지고 귀신을 불러내거나 사술(邪術)에 빠지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흔한 일이다.

 

사울은 블레셋의 엄청난 군대로 인해 심히 두려움에 빠졌다. 이는 저가 일생을 다윗을 두려워하였던 것과 같은 의미다. “사울이 다윗을 더욱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삼상 18:29).” 사울은 여러 번 다윗을 향한 마음을 뉘우쳤고 애통해하였으나 도로 돌아갔고, 그러한 절망감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하나님이 연승을 거두게 하셨음에도(14:21-23, 31, 47, 17:53) 허사가 되었다.

 

이제 있을 길보아 전투를 앞두고 저는 두려워 크게 떨었다. 때는 사무엘이 죽었고, 하나님은 그 어떤 형태로도 사울에게 응답하지 않고 계셨다.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28:6).” 그러니 저로서는 다시 자신의 수단으로 이 난국을 극복하려고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7).”

 

보면 저의 신앙이 한심한데, 나의 신앙은 또 어떠한가? 되짚어보게 한다. 사울은 분명 ‘나를 위하여 … 찾으라.’ 하였다. 그렇듯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교회를 찾고, 말씀을 찾고… 그러한 존재일 수밖에 없으나 이 모든 게 우상과 사교(邪敎)와 온갖 감언이설에 도취하게 하는 것과 같다. 이단이나 사이비종교가 그처럼 광적으로 신앙을 지켜가고 확장하는 이유도 같다. 그러나 사울의 심정과 같이 ‘나를 위하여’ 하나님을 필요로 하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합하는 자로 세워져야 한다.

 

기도와 같아서, 처음에는 나의 간절하고 다급함에서 ‘나를 위하여’ 주께 빌고 또 간구하다 어느 사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리’에서 ‘나를 위하여’는 지극히 사소한 게 된다. 일찍이 하나님이 금하셨던 것도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31).” 이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심을 알게 하려 하심이었다. 필연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서 찬송과 기도가 나오게 된다.

 

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시 9:11-12).

 

이에,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다 기리는도다

(111: 2).

 

오늘 사울의 행적이 기이한 것 같아도 그의 일생을 가만히 살펴보면 나름의 열심이 실은 ‘자기를 위하여’ 모두 그리하였다. 전쟁에 앞서 제사장의 구별된 제사를 자신이 지킨 것도, 다윗을 애틋해하면서도 극심한 두려움으로 평생을 죽이려 한 것도, 이 모두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령으로 인한 것이었으니…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삼상 16:14).” 상대적으로 다윗으로는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23).”

 

같은 것도 다른 것은 그의 안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이 어떠한가에 따라 다르다.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 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18:10).” 그렇듯 오늘 사울은 엔돌에 있는 신접한 여인을 찾았다.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 하나 앞서 사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번 전투를 맞으며 저는 힘의 원천이요, 전쟁을 주관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상실하였다.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에 이와 같은 두려움은 극심한 혼란과 공포에 휩싸이게 하였다. 하여 사울이 찾은 신접한 여인은 스울 곧 음부(陰部)에서 ‘사무엘’을 끌어올린다. 음부는 ‘죽은 자의 세계’로 인식되었다. 죽은 자의 혼과 교통할 수 있는 접신녀(接神女)는 스올에서 죽은 자의 혼(魂)을 불러냈다.

 

사울에게 있어 사무엘은 독보적인 존재였다. 자신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운 사람이다. 자신 곁에서 든든한 조언자로 있었다.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10:1, 15:1).” 그렇게 의존하던 사람이라 죽어서라도 불러내고 싶었겠다. 여기서 사울에게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무엘’이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자신의 하나님은 없었고 늘 사무엘의 하나님으로 만났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정말 나의 하나님이신지?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사 25:1).” 하는 고백으로 나의 삶에서 마주하고 함께 하는지…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미 7:7).” 하여 오늘도 나의 하나님께 고하고 아뢰며 살고 있는지….

 

저 의심 많던 도마도 고백하기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하였고 바울은 물론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 사울의 이 어처구니없는 ‘미신 짓’에 한숨이 날 정도인데, 행여 우리도 다급할 때 하나님의 침묵을 기다리지 못하고 이와 같이 별 짓을 다하는 것은 아닌지? 사울이 찾았던 ‘신접한 여인’과 같이, 어디 ‘용하다는 목사’나 ‘신통한 교회’를 찾아서 헤매고 있지는 않은지? 신유니 은사니 별의 별 신통한 것을 신령한 것으로 여겨 죽기 살기로 매달리며 이를 신앙이라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사는 동안에,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18:2, 6).

 

하는 정도의 고백도 가지지 못하고 사는 신앙보다 처량한 인생이 또 있을까? 이는,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22:10).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하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71:12).

 

오늘도 말씀 앞에 앉아 주 앞에 고하는 것은,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88:1-2).

 

더러는 하나님의 침묵으로,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6, 8).

 

그리하여,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9).

 

고로 하나님의 침묵은 나로 더욱 주를 바라게 한다.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