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전봉석 2025. 4. 8. 04:54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하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삼상 25:32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시 85:10-11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만나 새로운 생을 열어가는 일은 전우주적인 역사이다. 한 사람으로 인하여 한 사람의 새로운 길은 개별적인 것 같으나 계통적이고, 개인의 날(生)인 것 같으나 더하여진 날들로 씨실과 날실처럼 지구의 자전들이 모아져 별개의 우주가 펼쳐지는 일이다. 여기 나발과 아비가일이 있고 더해져 다윗이 있다. 나발의 완고함을 아비가일의 지혜로 덮어서 아비가일은 다윗의 생에 들어온다.

 

성경은 일러,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잠 31:10).” 이를 나발은 알지 못했고 다윗은 이를 발견하여 차지하였다. 하여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모든 여자보다 뛰어나다 하느니라(29).” 그러므로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30).” 하심과 같이 아비가일을 일컬어 하시는 말씀 같다.

 

어제는 두 헌재재판관의 이야기를 읽고 저들에게 있어 각각의 개별적인 만남이 저들의 생을 어떻게 이어져오게 하였는지 감동하였다. 헌재재판관 문형배는 1965년 경남 하동에서 가난한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하였던 시절, 고등학교 2학년 때 ‘남성당 한약방’을 운영하는 김장하 선생을 만나 대학교 4학년까지 장학금을 받으며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선생에게 마음의 빚을 지었고, 이를 사법 시험에 합격하여 선생의 마음을 본받게 되었다.

 

‘자유에 기초하여 부를 쌓고, 평등을 추구해 불합리한 차별을 없애며, 박애로 공동체를 튼튼히 연결하는 것’이 저에게 있어 법의 기초가 되었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곳이 대한민국이라고 몸소 깨우치게 한 이가 선생이라 진술하였다. 선생은 ‘이 사회의 것을 너에게 주었으니 갚으려거든 내가 아닌 이 사회에 갚아라.’ 하는 말로 문형배에게 받을 것이 있다면 사회로 돌리하고 하였다.

 

선생 김장하(81)는 경남 진주에서 ‘남성당 한약방’을 운영하며 39살이던 1983년에 진주에 세운 명신고등학교를 1991년에 국가에 헌납했다. 저는 1000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다. 그중 한 명이 문형배였다. 선생의 도움으로 많은 학생이 공부할 수 있었고,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여성과 아이들을 위한 쉼터가 세워졌다.

 

또 한 사람의 헌법재판관은 김형두이다. 저는 1991년에 결혼해서 아들 둘을 두었는데, 둘째가 자폐성 장애 1급 진단을 받은 자폐아였다. 둘째 아들의 자폐로 인해 가족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부부로나 부모로나 저들의 날들은 고단하였고, 둘째와 외출이라도 할 때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특별한 시선을 받아야 했다. 그의 처는 천직으로 생각하였던 교사직을 포기하고 둘째 아들을 뒷바라지하였다. 큰 아들은 자폐아의 형이라는 이유로 여러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저의 몸과 처의 몸에는 둘째로부터 꼬집히고 물린 상처가 여전히 흉터로 남아있다.

 

그런 가운데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었고, 이를 도와보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법관의 길을 걸었다. 김형두는 헌재재판관 임명을 위한 청문회에서 “헌법재판소는 헌법 가치를 수호하고 진정한 사회 통합을 이뤄내기 위한 중추적 역할을 요청받고 있다”고 하였고, “만약 헌법재판관으로 일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헌법의 이념이 어떠한 형태로 구체화되어야 하는지를 항상 고민하겠다”면서 “이를 통해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소수자, 약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실질적 평등의 원칙을 실현하는 한편 헌법 질서가 존중되는 사회를 이뤄나가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그는 20년이 넘게 둘째 아들과 매주 산에 오른다. 그는 ‘한국자폐인사랑협회’가 자폐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진행하는 달리기 대회나 세계자폐인의 날 기념식 등에도 꾸준히 참여한다. 오늘 본문에 앞서 어제 오후께 읽게 된 두 사람의 기사와 더해져,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인연에 대하여 생각하였다(한겨레 신문, 참고).

 

오늘 본문의 첫 언급은, ‘사무엘이 죽었다.’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두고 슬피 울며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 다윗이 일어나 바란 광야로 내려가니라(삼상 25:1).”

 

사울의 추격과 다윗의 도피가 계속되는 상황 가운데서, 사무엘이 죽었다. 향년(享年) 83세로 주전 1017년경의 일이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다. 그때는 미스바 전투가 있은 지 5년 후로 주전 1055년이다. 사무엘 나이 50세 때였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였고, 최초의 선지자였다. 사무엘은 자신이 하나님에 의한 소명으로 부르심을 받아 그 목적을 바로 알고 신정왕국을 완료했다. 이어 사울을 대신하여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삼상 16:13).”

 

이에 온 이스라엘이 애곡하였다. 사무엘의 죽음은 백성들 모두의 슬픔으로 아비 잃은 자식들과 같은 슬픔이었다. 사무엘은 선지자로서 영적, 정치적으로 쇠퇴했던 이스라엘을 회복시켰다(7:3-16). 사무엘이 사사로서는 청렴결백하였고 그의 인품은 남달랐다. “그들이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누구의 손에서든지 아무것도 빼앗은 것이 없나이다 하니라(12:4).”

 

당시 사울 왕을 견제할 수 있던 유일한 인물 사무엘이 죽자, 다윗은 사울에게서 더욱 멀리 도피하여 그 일행이 엔게디 황무지를 떠나 바란 광야로 내려갔다. 그런 뒤 다시 자신들이 이전에 머물렀던 마온 광야에 있었다. ‘마온’은 거처, 장소란 뜻으로 십 광야와 갈멜산 부근에 있는 유다의 구릉지였다. 마온은 사울이 아말렉 전투 후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기념비를 세운 곳이다.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15:12).”

 

따라서 이 마을은 사울을 영웅처럼 여겼고, 사울의 영향력이 다른 곳보다 컸을 것이다. 여기서 나발은 ‘양이 삼천이요 염소가 일천’이 넘는 부유한 자였다. 눈여겨볼 것은 나발에 대한 신상보다 저의 소유에 대한 언급이 더 상세하다는 것이다. ‘나발’의 뜻은 ‘시들다’, ‘바보처럼 행동하다’란 의미의 동사 ‘나벧’에서 파생된 형용사로, 성경에서 이 단어는 ‘어리석은’, ‘우매한’, ‘괴악한’ 등으로 번역되는 것으로 암시하는 바가 크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 14:1).

 

나발이 저의 본명인지, 별명인지는 모르겠으나 주목 받는 것은 그 아내 아비가일이다. ‘아비가일’의 뜻은 ‘기쁘게 하는 자’ 또는 ‘기쁨을 주는 자’라 한다. 곧 후에 나발이 죽고 아비가일은 다윗의 아내가 되어 다윗의 둘째 길르압을 낳았다(삼하 3:3). 각기 그 이름이 암시하는 것과 같이 오늘 본문은 아비가일의 총명하고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고 있다. 총명하고 명철함은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는 사람’으로 전달된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111:10).

 

한 생을 사는 동안 여러 환경과 여건만큼이나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끝이 없는데, 돌아보면 나의 생에 있어서도 손에 꼽을 수 있는 위인이 몇 명 있다. 그런데 또 이 일이 한참 지나고 난 뒤에야 알 수 있는 것이라, 어릴 적 애양원교회에서의 소경장로님과 이어지던 나환자촌에서의 한 소녀와 고등학교 때의 영어 선생과 신학을 시작하는데 학비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어떤 이와 심지어는 그로부터 십 수 년 후에 신대원을 공부하는 6학기 동안의 후원의 손길에 대하여는 어찌 말로 다 표현이 어렵다. 서로의 만남은 이처럼 전방위적으로 환경과 여건이 서로 얽혀 어쩌다 우연처럼 만난 것이나 이는 모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역사였다.

 

상대적으로 나발은 완고하였고, 저의 완고함은 거칠고 굳은 성품으로 난폭하기 일쑤다. 종들도 이를 알고 아비가일에게 고할 때,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 하는지라(삼상 25:17).” 하였으니, 나발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줄 모르는 ‘목이 곧은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목이 곧았다하는 것은 악을 일삼는 것으로,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출 33:3).” 이스라엘은 그러하였다. 즉 이는 ‘그 마음의 소욕을 따라’ 사는 사람으로 자기 마음대로 하는 자를 일컫는다.

 

나발은 사울에게 우호적이어서 그랬을까?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하고 능멸하였다.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삼상 25:10).” 술 때문인지 평소 다윗에 대한 인식인지 알 수 없지만 나발의 부정적 시각은 다윗의 정중한 요청을 거칠고 경박하게 거절하며 경멸하였다.

 

이를 전해들은 아비가일은 급히 수습을 하였다. 여섯 종류의 음식을 세심한 정성으로 준비하였고, 이에 지혜는 “사람의 선물은 그의 길을 넓게 하며 또 존귀한 자 앞으로 그를 인도하느니라…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품 안의 뇌물은 맹렬한 분을 그치게 하느니라(잠 18:16, 21:14).” 더욱이 그녀가 준비한 ‘떡 이백 덩이’는 한 가족이 보통 ‘떡 세 덩이’면 한 끼니를 해결한다고 하는데, 이는 육백 명의 병사 이 정도 양은 필요하였겠다. 그만큼 아비가일은 넉넉하게 여러 음식을 준비하여 서둘러 다윗에게로 갔다.

 

하고 다윗을 인정하고 그 앞에 사과한다.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엎드려 그의 얼굴을 땅에 대니라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에게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23-24).” 이 모든 일을 자신의 허물로 돌린다. 그러면서 고하길,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26).”

 

이는 행여 다윗으로 하여금 헛된 살육으로 하나님의 보복이 임할까 하여 그 뜻도 전하였다. ‘여호와께서 반드시,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다윗의 왕권을 굳건하게 하실 것인데, 행여 지금의 일이 과오가 될까 하여 총명을 더한 것이다. 곧 아비가일의 말은, “주의 여종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28).”

 

이는 다윗과 그의 후손을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실 것과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아가 나실 것을 ‘알고 있었다.’ 곧 하나님의 나라를 영원히 통치하실 것으로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고전 15:25).” 이는 성경이 성경으로 이어져 그리스도를 나타내심 같이,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1).” 하신 말씀을 우리 입으로도 증언하게 하심이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잘 알고 있었고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었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29).” 곧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된 자임을 알았고, 하나님의 도우심에 따른 다윗의 형통으로 나실 성자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내 주의 생명은,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하고 오늘도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였다. 이와 같이 신중한 행동은 분별력 있는 판단, 그와 같은 지혜에서 나온다. 하여 이를 아는 자는 더욱 바로 알기를 원한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믿었사오니

좋은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119:66).

 

할 때에,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셀라)

(85:1-2).

 

하는 오늘 시편의 시각으로 다시금 기도한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거두소서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4, 6).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7-8).

 

하여,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10-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