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기이한 일을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전봉석 2025. 4. 12. 04:19

 

아기스가 다윗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정직하여 내게 온 날부터 오늘까지 네게 악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으니 나와 함께 진중에 출입하는 것이 내 생각에는 좋으나 수령들이 너를 좋아하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이제 너는 평안히 돌아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수령들에게 거슬러 보이게 하지 말라 하니라

삼상 29:6-7

 

여호와여 주의 기이한 일을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들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하리이다

시 89:5

 

 

우리가 그릇 행하여 그 결과가 안 좋은 쪽으로 흐를 때에 하나님의 권능은 이를 끝까지 두고 보지는 않으신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블레셋에 몸을 의탁하였고 그들의 왕 아기스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 오늘 블레셋은 군대를 아벡에 모았다. 블레셋 족속은 다섯 방백에 의해 다스려지는 부족 연합체였다. 이에 아벡으로 집결지를 정하고 각 부족이 군사를 거느리고 총집결하였다.

 

‘아벡’은 요새란 뜻이다. 엘리 제사장 시절, 이스라엘을 공격할 때에도 이들은 에벤에셀 근처 아벡에 모였었다.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4:1).”

 

하여 오늘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군대를 아벡에 모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르엘에 있는 샘 곁에 진 쳤더라(29:1).” 여기서 ‘이스르엘’은 ‘하나님께서 씨를 뿌림’이란 뜻으로 길보아 산악 지대의 북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기손 강의 영향으로 토지는 비옥하고 긴 평원이 형성되어 있다. 여기 샘은 이스르엘 동남쪽 약 2.8km 지점에 있고 길보아 산지 북쪽에 있는 수원(水源)이 되는 우물이다.

 

다윗은 아기스 왕에게 의탁하여 시글락에 정착하였는데, 이번 전투에 ‘왕의 머리 지키는 자’ 곧 측근으로 같이 전쟁에 참여할 거였다. 이는 곤란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사울을 피해 숨어 있는 처지라 하나 이스라엘을 상대로 확장하려는 블레셋의 전쟁에 다윗과 그의 병사들도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한 번 그릇된 선택은 다른 그릇됨이 더해져 더욱 악한 길로 겹친다. 아기스의 참전 명령을 다윗이 거절할 명분이 없다.

 

다윗의 처지와 그 상황은 이해하나 블레셋으로 몸을 의탁하는 때부터 예정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여 성경은 누누이 강조하기를,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 하심도 그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해서 한 번 허용하면 사탄은 이 틈을 노려 더 많이 더 깊숙이 죄를 관여하게 한다. 하여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 2:11).” 그렇게 해서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도 사탄의 계략에 넘어갔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11:3).”

 

나는 안 그럴 자신이 있다고 여기는 그 순간부터 일은 시작된다. ‘에이, 설마’ 하는 때가 위험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죄악 중에도 구속사를 멈추지 않으신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 9:15-16).” 고난이 달가울 리 없으나 고난까지도 하나님은 주의 장중에 두셨다. 바울은 이를 잘 알았고 이를 가지고 주 앞에 더 간절하였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4-25).”

 

우리 안에 이 두 싸움은 공존하여 우리로 주 앞에 가까이 가게 한다. 결국 하나님의 작업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으로 일하신다.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이 이르되 이 히브리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느냐?” 하고 여러 부족의 방백들이 다윗의 참전에 반대 목소리를 내자, “아기스가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에게 이르되 이는 이스라엘 왕 사울의 신하 다윗이 아니냐? 그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여러 날 여러 해로되 그가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라!” 하며 다윗의 참여를 두둔하여 저를 신뢰한다(삼상 29:3).

 

블레셋은 다섯 부족으로 구성되어 각기 가사, 가드, 아스글론, 아스돗, 에그론를 중심지로 하여 각각의 왕이 있었다. “곧 애굽 앞 시홀 시내에서부터 가나안 사람에게 속한 북쪽 에그론 경계까지와 블레셋 사람의 다섯 통치자들의 땅 곧 가사 족속과 아스돗 족속과 아스글론 족속과 가드 족속과 에그론 족속과 또 남쪽 아위 족속의 땅과(수 13:3).” 그들은 수백씩 혹은 수천씩 영솔하여 와서 참전하였는데 다윗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블레셋의 다섯 방백들 밑에 각기 천부장과 백부장이 있어 그에 따른 권력 구조나 병력들도 있었고, 병력이 많을 뿐만 아니라 규모가 잡혀 있는데 저들이 히브리인 다윗을 모르는 바도 아니고, 그를 선뜻 신뢰하고 함께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블레셋 군대는 자신들의 1차 집결지인 아벡을 떠나 자신들이 진(陳) 칠 곳 수넴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윗이 아기스를 제외한 다른 블레셋 방백들의 거부에 봉착한 것은 어쩌면 정치적인 이유로 권력다툼의 하나이지만 그 덕분에 회군(回軍)할 수밖에 없게 된다.

 

또한 거기서 그런 반기에 봉착함으로 다윗의 거점인 시글락으로 3일만에 회군할 수 있었다. 이는 또 그 틈을 타서 주변국이 시글락을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사흘 만에 시글락에 이른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네겝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삼상 30:1).” 그러니 우리에게는 우리의 실수와 허물까지도 주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만일 다윗이 그 당시 수넴에 있었다면 시글락까지 돌아가는 데는 3일만으로는 어려웠다. 아벡에서 시글락까지는 약 75km 정도이다. 아벡에서 수넴 쪽으로 조금 더 진행한 지점에서 다윗의 군사가 다시 시글락으로 회군해야 하는 상황을 연출하신 이는 분명히 하나님이시다. 다윗이 아기스와 함께 나아가더니, 다른 방백들의 반대가 있어 결국은 다윗이 배제되는 상황은 주의 은총으로다. 물론 다윗의 의도에는 피치못할 상황에서 아기스의 절대적인 신뢰를 갖고 있던 터라,

 

“그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여러 날 여러 해로되 그가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라(29:3).” 하고 두둔하는 아기스의 설명과 함께 저의 입에서 “아기스가 다윗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정직하여 내게 온 날부터 오늘까지 네게 악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으니 나와 함께 진중에 출입하는 것이 내 생각에는 좋으나 수령들이 너를 좋아하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이제 너는 평안히 돌아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수령들에게 거슬러 보이게 하지 말라 하니라(6-7).” 하는 아기스의 평가가 인상적이다.

 

이방나라 블레셋의 왕 아기스의 입에서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하고 시작하는 선언이 특이하다. 이는 평소 다윗의 행실로 추론할 수 있는데, 이 또한 아기스의 평가로 들어보면 첫째, 다윗은 정직이 행하였다. “네가 정직하여.” 둘째, 다윗은 악인들과 있으면서도 악이 없었다. “내게 온 날부터 오늘까지 네게 악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으니.” 셋째, 비록 안 믿는 자들의 눈에도 저는 신뢰 받는 자였다. “나와 함께 진중에 출입하는 것이 내 생각에는 좋으나.”

 

이는 이후 한참 뒤 블레셋에 포로로 잡혀 갔던 다니엘과 그 친구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저들 왕이 신뢰하였던 것과 같다. 아니 그 전에 이미 앞서 요셉이 애굽의 종에서 총리가 되어 왕과 온 국민의 총애를 받았던 일과도 연관이 있다.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는 다윗을 신뢰하여 누구보다 ‘자신의 머리를 지키는 자’로 세울 정도였다는 게 이를 입증한다. 이는 올곧은 신앙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양심을 안 믿는 저들도 두려우면서 강한 신뢰를 갖게 한다. 그렇게 되어 다윗과 그 일행이 아기스의 후군(後軍)이 되어 본 전투에 참여하였을 것인데, 하나님의 작업은 다윗을 자기 백성을 치는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게 막으셨다.

 

우리는 더러 악인과 멍에를 같이 메는 처지에 놓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주를 신뢰함으로 주가 이를 지키신다. 우선은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 13:20).” 우선 이런 국면을 만든 다윗의 허물이 크다. 성경은 누누이 일러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와 더불어 사귀지 말라 대저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하리니 그 둘의 멸망을 누가 알랴(24:21-22).” 이는 가끔 사회생활을 하는 아이들에게 자주 언급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직장을 그만두고 모두가 성직자로 살라는 소리가 아니라,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고 저들 문화 가운데서 살지만 그 문화에 휩쓸리지 않기 위하여는 먼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그러므로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전 8:8).”

 

저들도 사람일 뿐 그 한계를 우리는 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빛과 소금이 되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3-15).” 이는 우리 신앙의 키워드로 어디에서든지 요셉과 같이 성실하고 다윗과 같이 정직하며 다니엘과 같이 그 마음을 정하여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자세를 우선으로 해야 한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하여,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5-16).”

 

오늘 다윗의 상황이나 그 처지는 차치하고 저를 아는 아기스의 평가에서 다윗이 주 앞에서 성실하였음을 짐작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지혜의 섭리는 악의 그 어떤 계획도 무색하게 하신다.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시 37:9-10).

 

당장 저들이 주권자 같고 ‘갑’ 같고, 믿는 자라 해서 우리의 처지가 ‘을’ 같아서 끌려 다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모든 판단은 측량할 길 없는 하나님의 지혜의 섭리 가운데서 진행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여기서 조금 더 지연됐더라면 다윗을 따르던 시글락이 곤경에 처했을 것이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사흘 만에 시글락에 이른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네겝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거기에 있는 젊거나 늙은 여인들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삼상 30:1-2).” 이 일로 결국 이 모든 국면이 정돈되어 바로잡히는 것을 본다. “다윗이 아말렉 사람들이 빼앗아 갔던 모든 것을 도로 찾고 그의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그들이 약탈하였던 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모두 다윗이 도로 찾아왔고(18-19).”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만이 드러나 영광 받으신다.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89:1).

 

오늘 우리로 이와 같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려고, 더러는 우리의 허물과 실수까지도 주의 섭리에 있어 동기와 목적으로 삼으신다. 그리고 기어이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엡 2:1-2).”

 

이로써 하나님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신다.’ 이는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심을 이루어서 우리로 찬송하지 아니할 수 없게 하신다. 종종 나의 지난날 나의 허물과 죄를 생각할 때 주의 긍휼하심 앞에 저절로 찬송과 경배가 나오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를 오늘 시편에서는,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내가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왕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셨나이다 (셀라)

(3-4).

 

이를 바울의 시선으로 되새기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의 기이한 일을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들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하리이다

(5).

 

이것으로 천국이고 우리의 구원이다.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37:9-10).

 

하여,

 

하나님은

거룩한 자의 모임 가운데에서

매우 무서워할 이시오며

둘러 있는 모든 자 위에

더욱 두려워할 이시니이다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력 있는 이가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

(89:7-8).

 

오늘을 살면서 이를 실감하고 인정할 때,

 

주의 팔에 능력이 있사오며

주의 손은 강하고

주의 오른손은 높이 들리우셨나이다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

(13-14).

 

이를,

 

즐겁게 소리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얼굴 빛 안에서 다니리로다

(15).

 

그리하여,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

(5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