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삼하 9:7-8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시 100:3
약속의 자녀로서 성도라면 약속의 자녀답게 이를 지키며 살아야겠다. 이를 오늘 다윗은 보여준다. 저는 원수였다 할 수 있는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하고 그의 후손을 찾는다. 이는 또한 요나단을 향한 마음이었다.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1).”
다윗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암살당한 후에 이스라엘의 통일 왕국을 이루고 난 뒤였다(5:1-3). 당시는 므비보셋이 13세의 아이였다(4:4). 본문에서 므비보셋은 젊은 아들을 둔 장성한 성인인 것을 감안하면 이와 같이 사울의 후손을 찾는 일이 지금 와서 충동적으로 일어난 것은 아닌 듯하다. 앞서 블레셋과 길보아 전투가 있었고(삼상 31장) 약 20여 년이 지난 때, 곧 다윗이 통치하고 중반이 되던 시기였을 것이다(5:4-5). 길보아 전투 당시 므비보셋은 5세였다(4:4).
다윗이 어느 정도 국정이 안정되고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그 약속을 이행하려 한 것이다. 다윗이 절박하게 쫓기던 시절에 요나단이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삼상 20:15).” 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더욱이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의 무참했던 학살을 떠올리며 사울의 집안에 보복하기를 바라기도 하였다.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삼하 21:1).”
곧 우리는 저마다의 상처를 가지고 사는데 누구는 이를 들어 그 노여움을 보복하려 하고, 누구는 이와 같은 노여움으로도 주를 찬송하게 된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곧 우리의 노여움이 찬송이 되게 하시는데 우리가 받은 주의 은혜로 오히려 이와 같은 감사의 찬송이 드려지게 되는 것이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이는 우리가 받은 은혜의 비밀이 크기 때문이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2).”
곧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딤전 3:16).”
바울은 자신의 고통으로 이를 알았다. 즉 우리가 받은,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이를 인정하는 날에 그토록 원망스러웠던 아픔이나 슬픔이 기쁨이 되어 주를 찬양하게 한다. 나의 인생에서 여러 걸림과 애통함에 대하여는 이제 그것으로 원망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의 고통이 나로 주 앞에 더 간절하게 한다.
어제도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면서 히스기야의 양면을 보는 듯했다.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쳐들어와 그의 장수 랍사게가 그토록 위협하며 조롱할 때에 잠잠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겉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주의 성전에 올라가 기도했다. 선지자 이사야에게 사람을 보내 상황을 알리고 기도를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로 단숨에 18만 오천 명이 시체로 널브러지고, 산헤립은 돌아가 자신들의 신전에서 아들들에 의해 암살당했다(사 36-37장). 곧이어 죽을병에 걸린 히스기야 왕은 주 앞에 기도함으로 병 고침을 받았다(38장).
그런 그가 바벨론의 사절로 온 자들에게 모든 보물, 곧 국가의 재정을 공개하고 국방력을 과신하는 교만에 빠졌다. 이에 선지자 이사야는 저의 후손의 때에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갈 것을 알리는데도 개의치 않는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39:6).” 하면 얼른 돌이켜 회개할 것 같은데, “또 네게서 태어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7).” 그런데도 저는 교만과 이기심으로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하고 또 이르되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8).”
그런 거 보면 사람의 죄성은 양면적이다. 시대가 바뀌고 기브온 사람들이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다윗에게 사울 왕의 아들들의 생명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들이 왕께 아뢰되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영토 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의 자손 일곱 사람을 우리에게 내주소서 여호와께서 택하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그들을 여호와 앞에서 목 매어 달겠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내가 내주리라 하니라(삼하 21:5-6).” 다윗은 그때 므비보셋을 아껴서 그를 그들에게 내어주지 않은 것이다. 이는 므비보셋이 이 사건 이전부터 다윗의 보호를 받았다는 것을 증거한다.
우리가 받은 은혜가 큰 것은 자신의 허물과 죄의 중한 것을 인정하는 때이다. 이를 오늘 므비보셋의 고백으로 다시 하면,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9:8).” 곧 우리가 주의 은혜로 고하게 되는 아룀은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 그와 같이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그러므로 은혜와 죄의식은 비례한다. 내가 얼마나 주 앞에서 죄인인가, 하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은혜는 더욱 값지고 소중해진다. 오늘 다윗은 요나단으로 인하여 이와 같은 은혜를 베풀었고, 우리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에게 이와 같은 은혜를 베푸신다. 고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오늘의 이 화평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이다. 이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오늘 이 다윗의 특별한 은혜는 자신이 받은 것에 대한 언약의 증표이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삼상 18:3-4).” 그리하여 다윗은 요나단의 생전에 그의 가족을 보호하기로 언약한 바 있다.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20:15-16).”
곧 오늘을 사는 우리는 또한 주의 언약의 자녀들인 것을, 그에 따른 은혜를 묵상할 때면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이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것 같이 주의 은혜는 영원하심을 붙들게 한다. 여기서 은총이란 은혜에 해당하는 말로 ‘헤세드’라 하여, ‘언약에 의한 사랑’을 의미한다. 곧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으로 인하여 오늘 우리를 사랑하신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6).” 곧 우리는 영적 이스라엘의 자손으로 택한 백성이 되었다.
그러므로 오늘 다윗이 베푸는 은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는 다윗이 요나단의 후손에게 베풀고자 하는 은총처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나타낸다. 즉 다윗이 요나단과 맺은 언약은 하나님을 증인으로 삼은 것이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니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읍으로 들어가니라(삼상 20:42).”
이는 무슨 일에서든지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잊지 않는 신앙의 발로이다. 아름다운 우리 신앙의 ‘하나님 제일주의’이다. 우리 신앙의 자세로 기초가 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하여 오늘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양 다리를 저는 므비보셋을 찾았다. 저는 다섯 살 때 사울과 요나단의 전사 소식을 듣고 급히 도망하던 유모의 팔에서 떨어져 불구가 되었다. 저가 불구인 사실이 두 번이나 언급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한다.
“왕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 저는 자니이다 하니라…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사니라 그는 두 발을 다 절더라(삼하 9:3, 13).”
이는 영적으로 우리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돌아보게 한다. 주의 도우심이 아니면 설 수도 걸을 수도 없는 영혼의 상태를 짐작하게 된다. 스스로 옳다, 괜찮다 하는 때가 교만이다. 우리에게는 절대적으로 그리스도의 언약과 영생의 축복이 따라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살 수가 없다. “보라 나는 그들을 북쪽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오리라(렘 31:8).”
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신 데 따른 바로 그 은혜와 사랑으로,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를 인정하는 데서, 나의 지난날을 후회와 탄식으로 주 앞에 세리와 같이 고개를 숙임으로,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2, 13).” 이와 같은 은혜를 알면서 더는 내 안의 원망과 슬픔과 서러움과 원통함이 더는 나를 짓누르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 12:12-13).”
오늘도 이처럼 주의 말씀 앞에 먼저 앉히고 나를 주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것은 이제는 죄의식이 아니라, 은혜의 감사였다. 이에 주가 손 내미시며, “무서워 말라.” 하신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므비보셋을 향해 그리 행하였던 것처럼,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삼하 9:7).” 하고 다윗은 사울의 밭을 다 그에게 주었다. 사울의 밭은 기브아에 있던 그의 사유지를 의미한다. 그 동안 이를 시바가 관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다윗의 이러한 약속은 간교한 시바에게는 큰 실망거리였겠다. 그래서 마길의 집에 숨어 살던 므비보셋에게는 더 없는 기쁨이 되었다.
그뿐인가? 저는 이제 왕의 상에서 왕자들과 같이 먹을 것이다. 이 말은 말 그대로 다윗과 함께 다윗의 자식처럼 아름다운 교제를 보장한다. 곧 양자된 우리로서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 사는 일을 상기하게 된다. 이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시 128:1-3).
따라서 다윗과 므비보셋이 함께 식사를 나누는 것은 우리가 주의 자녀가 되어 주와 함께 누리게 되는 서로의 아름다운 교제이며 특별은총으로의 영광이 된다. 그 앞에서 우리의 송구함은 ‘죽은 개 같은 나’로 비유될 수밖에 없이 면목이 없다. 나는 자주 주 앞에서 이와 같은 면구스러움을 느낀다. 하는 것도 없이 받은 은혜로 사는 자로서의 감사뿐이다. 그래서인지 누가 나더러 목사님, 하고 어떤 사연을 들려주거나 기도를 부탁할 때면 그렇게 민망하고 송구스러울 수가 없다. 나 같은 자가 어찌 그와 같은 소임을 감당하며 살고 있는지, 이 모든 게 은혜의 감격이 된다. 은혜의 감격으로 나의 노여움은 찬송이 된다.
하여,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100:1-2).
하는 오늘 시편의 세계가 나를 지목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오늘도 아이가 보내온 성경구절을 묵상하며 이따 나누게 될 말씀을 잠시 준비하면서 마친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5-16).”
미쁘다는 것은 믿음직스럽다는 것이고, 듬직하다는 것으로 이를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라 정의하고 있다. 곧 우리의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이다. 앞서 12-14절에서,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나는 이 말씀이 전적으로 나를 두고 이르시는 말씀으로 들린다.
바울이 죄인이었음을 인정하는 데서 그리스도께 받은 은혜로 감격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이 확실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3).”
아, 이 특별한 대상으로의 내가 나로 살면서 증거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즉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내가 주를 찾은 게 아니라, 주가 나를 죄인이었을 때 찾으셨다. 내가 주를 사랑한 게 아니라, 사랑할 수 없는 죄인으로 살고 있을 때 주가 나를 끝까지 사랑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하는 고백이 내 것이다.
나름은 아무렇지 않게 남들처럼 산다고 살았던 날들이 모두 죄였음을, 그러나 깊이 묵상하다 ‘내가 괴수 죄인들의 무리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내가 역사적으로 첫째가는 괴수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내가 가장 나쁜 죄인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차마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나의 부끄러움을 주 앞에 내어놓으며,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이루어진 사실이다.
곧 예수의 긍휼은 그의 오래 참으심에서 온다. 나의 날들이 반 이상은 주를 멀리하였고, 주 없이 살기를 바라며 세상을 사랑했다. 그런데 그런 나로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은혜가 너무 커서 다만 감사하고 찬송할 뿐이다.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7-8).”
이로써,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100:3-4).
이에 나는 오늘도 감사와 감격으로 찬송하며,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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