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아의 아내는 그 남편 우리아가 죽었음을 듣고 그의 남편을 위하여 소리내어 우니라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삼하 11:26-27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시 102:26-27
오늘 이 말씀은 늘 읽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진다. ‘이제 좀 섰는가하고 생각하려니까 넘어지는 꼴이랄까?’ 그렇듯 성경은 일러,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우리의 자만과 이기심은 두 팔과 같아서 동시에 움직인다. 하여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완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의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의 영광을 빼앗기고 사람 중에서 쫓겨나서 그의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나귀와 함께 살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의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사람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자리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에 이르렀나이다(단 5:20-21).”
우리 사람의 위대함은 두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도 성경은 우리에 대하여 정직하고 진실하게 서술한다. 우리의 본성과 성향과 기질 등에 정확히 드러내고 알게 한다. 오늘 본문은 요압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전쟁에 있었다. 때는 ‘그 해가 돌아와’로 시작하는데,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삼하 11:1).” 하면 이 때는 아빕월로 1월이고, 태양력으로는 3, 4월에 해당하는 겨울이 지나 봄이다. 겨울은 우기(雨期)로 전쟁하기 적합하지 않아, 왕이 돌아왔고 다시 건기(乾期)가 되어 2차 출정을 해야 할 때였다.
다윗은 성에 남았고 요압이 병사들을 이끌고 다시 전장으로 나갔다. 다윗은 암몬의 랍바 성이 험한 요새지임을 알고 요압과 더불어 모략에 뛰어난 군사들을 파견하고 뒤로 빠져 있었다. 이때 ‘온 이스라엘 군대’가 참여하였다. 앞서 ‘랍바 전투(10:6-14)’에 이어 랍바 제 2전투가 재개된 것이다. 전세는 이스라엘이 압도적으로 유리하여, 곧 적의 수도 랍바 성 함락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12:27-31). 랍바는 암몬 족속의 수도로 얍복 강 상류 계곡에 자리하고 있었다. 요단강에서 동쪽으로 약 37Km정도 떨어진 지점이다.
그런 가운데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본래는 같이 전투에 임해야 할 터인데, 전세를 잡았고 굳이 왕이 두 번째 전투에까지 참여할 필요는 없다고 여긴 모양이다. 전시 중 상황이었지만 편안히 예루살렘 궁에 머물던 다윗은 영적 긴장이 플렸다.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2).” 순간 그 속에 음욕이 일었고, 결국 밧세바를 범하고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모살하는 엄청난 죄악에 빠지고 만다(2-27). 저는 천하의 다윗이다. 누구보다 하나님과 함께 하였고 주를 경외함으로 항상 모든 왕의 기준이 되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한순간에 이와 같은 일을 저질렀다.
순간 그러했을까?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 8:2).” 삼가 우리가 또 조심해야 할 것인데,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벧후 3:17).” 스스로 자신을 과신할 때가 아니다. 자만은 자신으로 흡족해하는 것이다. 마침 이번 주 설교원고의 주제도 그러하였다.
히스기야는 다윗 다음으로 유다의 경건한 왕으로 알려져있다. 저는 앞서 앗수르와의 전쟁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었다. 곧 하나님의 은혜로 ‘주의 사자들이’ 앗수르를 진멸하였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사 37:36).” 또한 주의 백성과 예루살렘을 침범하고 능욕하던 산헤립 왕은 그의 신전에서 아들들에 의해 암살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이에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자기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그의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도망하였으므로 그의 아들 에살핫돈이 이어 왕이 되니라(37-38).”
이와 같이 극적인 전투 후에 저는 죽을병에 걸렸다.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38:1).” 하여 히스기야는 돌아누워 울며 기도하였고,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니(2-3).”
하나님은 저의 생명을 또한 15년 더 연장하시며 표적을 행하셨다. 이에 해시계를 뒤로 십도 물리시었다. “보라 아하스의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 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 도를 물러가니라(8).”
그러자 방심하고 자만하여서일까? 앞서 앗수르와의 전쟁에서 승리와 죽을병에서의 고침 받은 것에 대하여, 저는 이를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자신의 영광으로 돌린 것이다. 블레셋에서 사절단이 보냈고, 저는 자만하여 국고를 열어 마치 자신의 위신을 과시하듯 그 모든 것이 주의 은혜였던 것을 저버렸다. 여기서 문득 바울 사도의 일갈을 떠올렸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우리가 살면서 순간 이러한 상황과 처지에서 자만하여 자고하기가 한두 번이었던가? 아이가 대학을 앞두고 열심을 다해 기도하며 주의 도우심을 구하다 지망했던 이상의 대학에 합격했을 때, 취업을 앞두고 열심을 다해 준비하던 이상으로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시험에도 무난히 합격했을 때… 어느 순간 간절함은 사라지고 주일마다 교회에 오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성경공부하고 묵상하던 일이 대수롭지 않은 게 되어 기어이 교회를 떠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더욱 주를 바라며 그의 은혜에 감사하기란 그처럼 쉬운 게 아닌 모양이다.
하여 바울은 자신의 고통에 대해 진술하기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나는 자주 이와 같은 말씀으로 오늘의 어떤 고통이나 어려움으로 주께 간절하여서 감사한다. 자만이란 순식간의 일이라 스스로 자신을 흡족해하는 것에는 장사가 없다.
다윗은 느긋하게 ‘저녁때에 그의 침상에서 일어났다.’ 아직 전쟁 중인데도 낮잠을 자고 일어나 한가로이 성 위를 배회하던 중이다. 국가적으로는 초긴장 상태에도 다윗은 낮잠을 잘 정도였으니, 그가 얼마나 해이하고 나태한 영혼의 오후를 보냈는지 알려준다.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하필 그때,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2).” 이게 참 죄란 게 마치 잘 들어맞는 퍼즐조각 같다.
전장 중에 기도하여야 마땅했을 시간인데, 다윗의 영적 상태는 나태하였고 나른하여서, 한때는 치열하였던 저의 삶이 “다윗이 새벽부터 이튿날 저물 때까지 그들을 치매 낙타를 타고 도망한 소년 사백 명 외에는 피한 사람이 없었더라(30:17).” 모두 옛 이야기가 되었다. 하필, 또 그럴 때 맞춤하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고 있었다.’ 일이 되려니까 그리 또 연결된다. 밧세바의 목욕 행위가 다윗을 유혹하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라 볼 수는 없다. 당시 고대 근동에서는 집 안마당의 우물에서 목욕을 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다. 이를 눈여겨 본 게 문제지, 그리 행한 게 문제는 아니다.
더욱이 다윗은 그리 보고 만 게 아니라, ‘데려오게 한다.’ 다윗은 왕이다. 명령으로 모든 게 이루어진다. 다른 가정에서 이와 같은 일이면 극형인 사형에 해당한다.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레 20:10).” 그런데도 누가 감히 왕의 명령을 저지할 수 있었겠나? 다윗의 나태는 음욕으로 이어졌고, 의도적으로 그릇된 명령으로 나아갔다.
다윗의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였다.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27).” 우리 안에 이는 정욕을 다스리지 못할 때 이러한 결과는 끔찍하다. 단순한 음욕이란 없다. 죄란 욕심이 잉태하는 것이고,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하심과 같이 “그들은 두루 다니는 살진 수말 같이 각기 이웃의 아내를 따르며 소리지르는도다(렘 5:8).” 어느 순간 개의치 않는 범행으로 이어진다.
그런 가운데도 하나님의 율례를 지킨 것이 역겹다.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삼하 11:4).” 여기서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하는 것은 “남녀가 동침하여 설정하였거든 둘 다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레 15:18).” 하는 것으로 의식적 정결에 치우쳐 그것으로 없던 일(?)을 삼으려 했다. 분명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20:10).” 하신 말씀 앞에 아차, 하는 거리낌도 없었던 것 같다.
이어지는 다윗의 모사가 더 악하다. 전장에 나가 있는 ‘헷 사람 우리아를 내게 보내라.’ 하고 슬그머니 밧세바의 잉태가 저와의 동침으로 마무리될 줄 알았다. 모종의 음모다. 자신의 아이를 마치 우리아의 아이인 것처럼 꾸미기 위한 간계다. 그렇듯 선심 쓰듯 왕으로서 다윗은 우리아를 소환하여 밧세바와 동침케 하여 무마할 거였는데, 우리아는 강직한 종이었다. 전쟁 중인 동료와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고 그리할 수 없었다. 결국 저를 정장 깊숙이 몰고 이제는 대놓고 살인을 모해한다.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15).”
도무지 다윗이 이런 일까지 행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자신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여 잉태하게 하고, 우리아를 죽음으로 몰아 과부로 취하려 한 것이다. 성경은 일갈한다. “우리아의 아내는 그 남편 우리아가 죽었음을 듣고 그의 남편을 위하여 소리내어 우니라(26).” 밧세바는 우리아의 아내다. 왕의 권력에 짓밟힌 성폭력의 피해자다. 이처럼 밧세바가 우리아의 아내였음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까닭은 분명하다.
밧세바가 우리아의 아내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왕의 완력으로 부정한 관계를 저질렀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여인의 이름을 들지 않는 게 히브리인의 관습인데, 여기서는 저가 우리야의 아내이지만 동시에 한 인격체인 밧세바인 것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남편 우리아에 대하여, 밧세바로서 조의(弔意)를 표한다. 그녀가 울었다. “그의 남편을 위하여 소리내어 우니라.” 밧세바는 남편 우리아를 위해 7일간 호곡하였을 것이다. 그런 뒤 다윗은 밧세바를 데려왔다.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27).”
여기서 우리아의 장례식을 마치자 곧바로 밧세바를 궁으로 데려온 것도 그 속셈을 알 것 같다. 다윗은 이때도 회개하거나 통회하는 마음으로는 아니었다. 이러한 처사는 밧세바의 임신이 백성들에게 알려질까 하여, 왕의 위신으로 마치 또 왕으로서 충복의 죽음을 애도하는 차원에서 선처를 베푼 것처럼… 어쩌면, 설마, 하는 마음으로 다윗의 의도를 짐작해본다.
그런 가운데서도 “아들을 낳으니라.” 곧 밧세바가 낳은 아들은 다윗과의 부정한 관계에서 출생한 악의 씨앗이었다. 따라서 다음 12장에서 하나님은 다윗을 징치하시는 차원에서 아이의 생명을 거둬가셨다. 밧세바는 이후 다윗에게 네 명의 아들을 더 낳았다. 곧 시므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이다(대상 3:5). 오늘 본문은 이러한 다윗의 소행을 악하다고 규정하면서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악의 결과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원인이 되는 불의한 것을 본다. 예를 들어 사사들이 치리하던 시절,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을 때, 유다 베들레헴 사람 엘리멜렉이 그의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이방 땅 모압 지방으로 가서 거류하였다. 이를 나오미는 훗날 악하였다고 돌이켰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룻 1:21).”
악은 이렇듯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부도덕한 행동이다. 이에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의 말씀들을 변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들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들을 치시리니(사 31:2).” 이는 두려운 일로서 당장은 아닌 듯 괜찮은 듯 해도, “그 때에 내가 예루살렘에서 찌꺼기 같이 가라앉아서 마음속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습 1:12).”
악의 생각과 모양도 두려운 결과가 따른다. 오늘 다윗이 보여주는 악한 생각과 행실과 계획과 실행은 모두 정욕에 사로잡혀 순식간에 벌어진 일 같다. 이에 성경은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하여 우리가 삼갈 것은,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시 119:9).
후에 다윗은 절규하며 자복하고 회개하기를,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51:2-3).
이에,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4).
오늘 말씀에서도 보여주듯이 우린 누구도 완전할 수 없고,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 며칠간 히스기야의 양면성을 지켜보고 저의 어처구니 없는 반응 곧 후손들에 대한 경고와 예언의 말씀에도 좋다고 하는 데서 혀를 찼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또 네게서 태어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사 39:6-7).” 이쯤 되면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 엎으려 통회하고 회개하였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하고 또 이르되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8).” 아, 우리의 이기적이고 너무 뻔뻔한 죄성에 대해 치를 떨었다.
아,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
(102:1-2).
우리가 우리 죄로 인하여,
나의 탄식 소리로 말미암아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5-7).
이와 같은 심정으로 주께 회개하고 고할 때,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니이다
(13).
그러므로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
(26-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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