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삼하 10:12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시 101:1
암몬 자손의 왕이 죽어 다윗이 조상(弔喪)하게 신하를 보냈다. 이는 그 아비가 다윗에게 은총을 베푼 것을 두고 그리한 것 같다. 이에 대해 그 아비 ‘나하스’가 언제 어떠한 은총을 베풀었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성경에 확실한 언급이 없다. 어쩌면 나하스가 다윗의 즉위식에 특사를 보내어 축하해서일지, 또는 그보다 앞서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 나하스가 어떤 도움을 주었을지…. 아마도 사울에게 패한 나하스(삼상 11장)가 사울에게 쫓기고 있는 다윗을 동정하여 도와주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다윗은 나하스에게 은총을 입었다고 기억한다. “다윗이 이르되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의 아버지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 같이 하리라 하고 다윗이 그의 신하들을 보내 그의 아버지를 조상하라 하니라 다윗의 신하들이 암몬 자손의 땅에 이르매(삼하 10:2).” 여기서 은총은 히브리어로 헤세드이다. 언약적인 호의를 뜻한다. 그러므로 나하스와 다윗 사이에 쌍방의 불가침 조약 같은 모종의 계약을 체결한 것 같다. 하지만 이에 대한 성경의 뚜렷한 설명이 없다. 그럼 그에 대한 내용보다 오늘 다윗이 이를 기억하고 은혜를 갚고자 한 인격에 주목하게 한다.
그런데 저들 신하가 이를 보고할 때 악의적으로 하였다. “암몬 자손의 관리들이 그들의 주 하눈에게 말하되 왕은 다윗이 조객을 당신에게 보낸 것이 왕의 아버지를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다윗이 그의 신하들을 당신에게 보내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하니(3).” 하여 조문하러 온 사절을 모욕을 더해 쫓아냈다. 즉 다윗의 호의에 대한 암몬 방백들의 불순한 태도가 나타난다. 당시 가나안 지역의 강자 블레셋과 그 이웃한 모압을 다윗 군대가 처참하게 이겨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8:1-2). 이에 경계하여 저들 신하가 그리 판단하였을 것 같다. 따라서 다윗의 호의를 저의로 오해하고 그리 조문을 받았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조문객으로 온 다윗의 신하들의 ‘수염 절반을 깎고’ 돌려보냈다. 이는 당시 남자의 수염은 명예와 권위를 상징하는데, 수염을 기르는 것은 자유인의 권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윗의 특사들의 수염을 깎은 것은 노예처럼 취급하는 수치였다. 더욱이 수염의 절반을 깎았다는 것은 얼굴 한쪽만 수염을 깎아서 수치심을 더한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잘랐다.’ 당시의 의복은 발목까지 길게 내리운 옷을 입었는데, 그 긴 옷을 엉덩이 윗부분까지 잘랐으니 이는 조롱과 수치를 더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다윗은 저들로 여리고에 머물다 오게 한다. “사람들이 이 일을 다윗에게 알리니라 그 사람들이 크게 부끄러워하므로 왕이 그들을 맞으러 보내 이르기를 너희는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서 머물다가 돌아오라 하니라(5).”
분명히 호의를 이처럼 모욕으로 되돌리는 것은 잘못이다. 정중한 거절도 아니고 대놓고 이리 대하는 것은 경계하는 게 아니라 싸우자고 드는 것이다. 여리고는 랍바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위치하였다.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약 28km 지점이다. 그래놓고는 암몬이 용병을 사서 무장을 하였다. “암몬 자손들이 자기들이 다윗에게 미움이 된 줄 알고 암몬 자손들이 사람을 보내 벧르홉 아람 사람과 소바 아람 사람의 보병 이만 명과 마아가 왕과 그의 사람 천 명과 돕 사람 만 이천 명을 고용한지라(6).”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 사회의 적대감이나 어떤 대립을 연상하게 된다. 서로의 호의가 순수하게 여겨지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를 오히려 경계하고 더 나아가 싸우자고 드는 꼴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성경은 이르시길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17:13).” 그런 점에서 같은 민족을 이루어 살면서도 서로에 대한 적대감은 어느 때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고로 우리는 더욱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
이에 전쟁이 난다. 악인이 망하는 것은 스스로 악을 자처해서이다. 곧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할 때 징계가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암몬 자손이 용병을 고용하고, 이는 곧 선전포고와 다를 게 없었다. 암몬 왕 하눈은 인근 4개국에서 군대 3만 3천명을 고용하여 다윗 군대와의 일전을 대비하였다.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킬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회개하는 마음이란 쉽지가 않다. 그릇된 행동은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또 다른 거짓으로 자신을 합리화할 뿐이다.
결국,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잠 1:32-33).”
성경의 가르침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기이다. 늘 그렇지만 사람과 사람의 일이란 게 참으로 아둔하고 어리석을 뿐이다. ‘같이’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 하긴 어둠과 빛이 하나 될 수 없고, 악과 선이 같아질 수 없는 것처럼 이는 확연하게 갈린다. 이에 성경은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렘 22:21).” 도무지 듣지를 않으니 이것이 죄의 습관이다.
말씀 앞에 앉을 때마다 나의 삶이 그러하고, 누구와의 대화에서 저에게 말씀으로 권할 때도 전혀 다를 게 없다. 도대체 우리의 죄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는 습성을 가진 게 분명하다. 그렇게 해서도,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0-13).”
그런 거 보면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신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알겠다. 성령으로가 아니면 들을 수 없다. 들어도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본래 죄성으로는 들으려하지도 않지만 들어도 알지 못함은 이와 같은 권세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0-23).”
이러한 성경의 이치가 이와 같은 성경의 역사와 같이 오늘도 우리들 이야기로 여전한 것이어서 교회의 호의를 세상은 적대시한다. 성도의 섬김을 사람들은 악의적으로 받아들인다. 오늘 다윗의 선의를 암몬의 하눈이 그리한 것과 다르지 않다. 이를 보면서 우리는 회개의 참 기회를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된다. 뉘우칠 수 있고 주 앞에 고하여 회개할 수 있을 때가 복이다. 아직은 우리가 살아서 사는 날 동안 의식이 있다는 것으로도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범죄한 영혼은 더욱 그 죄를 감추려할 뿐 인정하기 어렵다.
일련의 우리 사회 현상이나 그로 인해 탄핵을 당하고 재판을 받으면서도 전혀 돌이켜 잘못을 반성할 줄 모르는 인사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본성을 느끼게 된다. 이에 시인은,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시 32:3-5).
두 갈래의 선택이 있다. 끝내 이를 고하지 않고 있을 때 그 영혼은 오히려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하고 호소한다. 그러나 죄를 아뢰고 숨기지 않을 때 우리 죄가 어떠하든지 주는 사해주신다. 결국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9-10).”
앞서도 보면 곁에 어떤 이들이 포진하여 있는가도 중요하여, 저들의 충고가 또는 권면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암몬 자손의 관리들이 그들의 주 하눈에게 말하되” 하고 저들이 바르게 판단하고 올바로 전하였다면 이런 일은 없었겠다. 보면 오늘의 정치현실도 같다. 나만 이상한 것인지, 정말이지 이상한 사람들만 장관으로 뽑아 앉히고, 어떻게 저런 사람에게 저런 자리를 맡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유난히 이번 정권은 막무가내였던 것 같다. 물론 나와 다른 시선으로 보면 나의 이런 판단이 옳지 않게 여겨지겠지만….
중요한 것은 사실을 사실 그대로 전하지 못하는 자들을 곁에 두고 있을 때 이것이 화가 된다. 하눈의 신하들이 고한 것도 그러하다. “왕은 다윗이 조객을 당신에게 보낸 것이 왕의 아버지를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다윗이 그의 신하들을 당신에게 보내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하는 저들의 저의가 의심스럽다(삼하 10:3). 보면 늘 그렇듯 부정적이고 악의적인 말로 평가하고 그러한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더욱이 요즘 어느 어린 연예인의 자살 이후 그를 부추겨 계속되는 의혹을 들추어 죽은 자는 물론 산 자의 날들도 죽을 지경이게 하는 무리를 본다.
부정적인 말이나 시선은 병적이라, 저들의 삶은 늘 삐딱하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정의이고 의로운 자들이라 여긴다. 부끄러운 것을 알지 못한다. 우리의 이러한 악성 태도는 누구나의 본성에 가깝다. 보면 참 못 됐다. 요즘은 점점 아파트 단지마다 울타리를 치고 아예 외곽의 출입구도 입주자 위주로만 한다. 처음에는 지상으로 오토바이들이 마구 드나드는 것을 방지하려 그런다고 들었는데, 그러다보니 일일이 자신들도 불편하다. 나는 매번 산책을 하고 들어설 때 동, 호수, 비밀번호를 쳐야 열리는 유리문 앞에서 한참씩 지체한다. 아내는 내게 카드키를 주었는데 번번이 두고 다니기 일쑤다.
결국은 안전하자고 문을 만들었지만 닫고 보면 벽이라, 자신들이 갇히는 꼴이다. 그렇듯 팬스를 설치하고 각 출구 쪽으로 문을 설치하는 데 드는 비용이 고스란히 주민들 몫으로 지불되었다. 자처하여 감당하며 사는 삶이 무겁다. 왜 굳이 화해로 풀 것을 전쟁으로 풀려하여 사상자를 내고 결국은 자신의 슬픔으로 안고 사는 것인지… 죄의 늪이 참으로 기이하다. 이는 단순하다.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따라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가 쓸 수 없음 같이 되리라(렘 13:10).”
자업자득이란 말처럼 죄의 결과는 고스란히 자기들 몫이다. 숱하게 말씀은 이를 상기시키며 죄를 멀리하게 하시는데도,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결국은 죄를 일삼아 살인을 저지른 가인의 후손들로 살아가고 있다.
이에 암몬 자손은 성문 어귀에 진을 쳤다. 다윗의 병사 요압이 정예군을 두 대로 나누고 양쪽에 포진하여 적의 협공에 대비한다. “그 백성의 남은 자를 그 아우 아비새의 수하에 맡겨 암몬 자손과 싸우려고 진 치게 하고(삼하 10:10).” 그런 뒤 저의 다짐이 인상적이다.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12).” 곧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다르다. 요압은 이번 전쟁이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을 위한 명분 있는 싸움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주께 맡기고 전투에 임하였다. 하나님의 성읍은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확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 17:47).”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요지경인 세상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뢰한다. 가타부타 덩달아서 맞장구치듯 말씨름할 게 없다. 오직 주께 맡김으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 14:12).”
오늘을 사는 게 능사가 아니라, 그 너머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오직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세상이 점점 더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의 믿음은 강철처럼 단단해진다.
우리의 최선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삼하 7:11-12).” 이에 마침 오늘 [다윗의 시]에서,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시 101:1-2).
주 앞에 다짐하고 다시 고함으로,
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교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오리니
나는 그 어느 것도 붙들지 아니하리이다
(3).
그러므로
사악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
(4).
하는 전심으로,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로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5-6).
그리하여
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
(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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