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삼하 12:7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시 103:8
우리는 저마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하다. 이와 같은 속성을 알고 여호와께서는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셨다. 그리고 비유를 들어 말씀을 전하셨다.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부자고 한 사람은 가난하였다. 부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고,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이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가 전부였다. 어떤 행인이 부자에게 왔다. 부자는 자기 양과 소를 아껴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다.
이를 듣고 다윗이 노하였다. 그리고 맹세하기를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하고 정죄하였다. 하고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한지라.’ 하고 말할 때 선지자 나단은 다윗에게 이른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 (1-6).
그 동안 시간이 흘러 1년 가까이 되었다. 이미 밧세바는 다윗의 아이를 해산한 뒤였다.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14).” 이를 보면서 또 하나 느낄 수 있는 것은 마치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처럼 죄는 우리들로 하여금 태연하게 살게도 한다. 이를 일깨우는 것이 말씀이다. 나단을 보내서 이를 전하게 하신 이가 오늘도 말씀으로 우리 곁에 계신다. 하여 죄로 말미암은 영적 고통의 실상을 경험케 하여 다시는 죄를 범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지 못하도록 하신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시 32:3-4).
또한 그 마음이 완악해진 것을 하나님께로 열리길 기다리신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5).
하나님은 우리로 회게하게 하시려고 말씀을 주신다. 이를 나누고 듣고 전하게 하신다. 오늘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보여 준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겔 34:11-12).”
오늘을 살면서 말씀이 새삼스러운 것은 늘 주가 나를 찾아오셨다는 것이다. 죄악 중에 있을 때도,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일에 함부로 그 삶을 허비하고 있을 때도, 하나님은 그때마다 나를 먼저 찾아오셨고 나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셨다. 마치 평소에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와 같이 살다, 그러는 동안 죄 중에 있는 나를 하나님은 ‘때가 차매’ 찾아오셨다. 그러나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한 번 한 번 주의 부르심을 외면할 때마다 나의 인생은 10년씩 훅훅, 지나갔던 것 같다. 그럴 때도 가만히 생각하면 내 곁에는 늘 ‘나단’과 같은 주의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인연으로 우연처럼 만나기도 하여 저들과의 친분과 권면으로 나를 돌이키셨던 것을 이제야 보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은 '나단'으로 세우신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신기하지? 그때를 생각하고 있으면 그때마다 내 곁의 ‘나단’은 왜들 그처럼 헌신적이었나? 싶을 정도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그 어떤 가족보다 더 마음을 다하여 물질로나 마음으로나 모든 걸 다 퍼주었던 것 같다. 굳이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잘해주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가령 한참 어려웠던 시절, 부친의 개척교회 건물이 부도가 나고 이미 성도들은 다 떠나고 빚더미에 있을 때에 학비와 생활비를 대주면서 그처럼 나에게 신학을 공부하게 하였던 어떤 이의 권유도 이상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결국 건물이 넘어가고 우리도 따로 집을 얻어야 할 때, 수중에 가진 것이 없는데도 아래층에 아내의 학원과 위층에는 살림을 같이 할 수 있는 건물과 이를 얻을 정도의 돈을 누가, 아무 조건 없이 몇 천을 빌려주었던 부부도 있었다. 저들은 때로 신앙도 그 삶도 달랐지만 그때 그 시절, 내 곁에 보내신 저들과 같은 ‘나단’이 늘 있었다. 그 외에도 늘 곁에 있어 이런저런 모양으로 의지가 되고 힘이 되게 하셨던 ‘나단들’이 무수하다.
그런 가운데 이내 나를 굴복시킨 것은 ‘나단’이 아니라, 그들이 전하는 말씀으로였다. 나의 완악하고 어리석은 고집을 꺾는데, 결국 말씀으로 나를 꿇리셨다. 그때마다 말씀은 비유였고 나의 영혼을 송두리째 흔드시는 상징이었다.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수수께끼와 비유를 말하라(겔 17:2).”
그와 같이,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사 5:1).”
말씀은 언제나 문학적이나 직설적이고, 비유이나 삶이어서,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마 13:34-35).”
하여,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막 4:9).”
그때도 들려주실 때면 들을 귀도 열어주셨다. 오늘에 이르러 나의 지난날들을 돌아볼 때 주의 음성이 나의 ‘나단’의 입을 통해 전하여졌다. 따라서 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수 천만 개의 비유와 ‘나단’과 모든 상황과 여건이 전우주적으로 합하여 선을 이룬다. 곧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다윗은 그 일이 있은 후 짧지 않은 동안에도 이를 외면하였거나 부정하며 자신을 합리화했다. 자신의 수치를 남의 이야기로 들을 때 판단하게 되고 비판하게 된다. 하여 주님은 이르시길,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
그렇듯 우리는 남 얘기하듯 자신의 허물을 투영시킨다. 유난히 어떤 일에 예민하다는 것은 자신의 그와 같은 모습을 감춘 까닭이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아이의 어떤 면이 마뜩찮고 그것으로 감정이 상할 때 보면 그게 고스란히 나의 한 면이었던 것을 인정한다. 그러다보니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3-4).”
우리의 허물에도 정점이 있다. 아무도 모르는 것 같지만 자신은 안다. 나단이 때를 기다렸다가 “당신이 그 사람이라!” 할 때 다윗의 완고하였던 영혼은 무너졌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을 때는 이와 같은 완고함은 보강되어 더욱 강퍅해진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하고 베드로는 마치 다 알겠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1, 22).”
곧 우리의 죄는 완고한데 이를 회개하는 강도는 상대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정도와 비례한다. 이에 다윗은 즉시 죄를 인정하였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 이에 오늘 시편은 주를 경배하면서,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103:17).
하고 자신의 오늘의 경험을 바탕으로,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8).
하고 찬송하였다. 이는,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10-11).
곧 우리가 죄를 짓지 말아야 하나 죄가 늘 문 앞에 있는 터라, 알고 짓는 죄와 모르고 짓는 죄가 수두룩하다. 그렇듯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12-14).
하나님은 우리를 아신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15).
결국 다윗은 ‘이 일로 말미암아’ 낳은 아이가 죽었다. 아이가 앓고 병들었을 때는 금식하고 성전 안에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다. 그러나 결국 이레 만에 아이가 죽었다. 신하들이 이와 같은 소식을 감히 전하기를 두려워했다. 그것은 아이가 살았을 때도 다윗이 그처럼 슬퍼하며 상심이 큰데, 죽은 것을 알면 오죽할까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듣고 다윗은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음식을 그 앞에 차려 먹었다. 다소 의아한데 슬픔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를 배우게 된다. 이를 다윗은 설명하길,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22-23).”
이는 훗날 솔로몬의 지혜서에서도 밝히는 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곧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일은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14).” 우리가 사는 동안에 죄도 짓고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나단의 비유’도 듣게 된다. 이때는 죄를 인정하고 주 앞에 굴복하는 것이다. 또한 슬픈 일에서는 돌아보아 주께 기도하고, 기쁜 날에는 찬송하는 것이다.
이는,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 44:22).”
나의 허물과 죄를 가리시고 덮으시며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알 때,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9).” 결국 우리로서는 죄를 인정하고 주 앞에 굴복할 때 주는 자비하심으로 이를 감추신다. 하여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103:3-5).
이 놀라운 주의 은총을 우리는 우리의 죄를 통해 깨달아 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벧전 3:18-19).” 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베드로 사도는 이내 우리에게 전하기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7-18).” 곧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17-18).
그러므로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그에게 수종들며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20-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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