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
아 8:6, 14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셀라)
시 21:1, 2
‘동산’은 ‘에덴’을 연상하게 한다. 하나님이 세우신 곳, 오늘의 교회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동산에 거한 여자’란 교회에 속한 성도를 의미한다. ‘동무들’은 같이 뜻을 합한 주의 천사들로 주께 기도하고 찬송한다.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 1:12).”
곧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하심으로 우리의 기도는 힘이 있다. 우리가 아룀은 단지 호소나 비명이 아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혹은 죄를 자백하는 자들처럼 사실을 진술하고 용서를 구하거나 사랑을 고백하고 구애하는 일처럼 그 어떤 용기보다 강하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그래서도 누가 기도를 부탁하고 그 사연을 말해줄 때 나는 더러 듣기만 하다 주 앞에서 수다스러워진다. 저의 이러저러한 사정을 말하며 주께 간구한다.
일련의 사태에서 피고인으로 섰던지, 증인으로 섰던지 사실대로 말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새삼 알 수 있었다. 내란 재판 가운데 전 총리의 최후진술이 중계가 되었는데 여든이 다 된 자의 비굴하고 참담한 자기변명이 안쓰러웠다.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몰랐다, 기억이 안 난다 하는 등의 최후 진술이 어느 훗날 우리 모두가 주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와 같이 최후진술에서도 자기변명으로 일관할 것이라 여겨졌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결과적으로 우리가 오늘 기도하는 데 힘든 점은 자신의 억울함으로 주 앞에 아뢰는 것이다. 마치 히스기야의 기도처럼 자신의 업적을 고하며, 한 줌의 생을 더 연장하려 하듯… 그리하여 15년의 생명을 더 연장 받은 히스기야는 차라리 그냥 죽음으로까지 감사하게 여기며 순종하였더라면 어땠을까? 더해진 날들에 므낫세를 낳았고, 온갖 우상을 섬겼으며, 저는 교만하여졌다. 그때 낳은 므낫세는 역대 어느 왕보다 폭정을 행하였고, 심지어 하나님의 선지자 이사야를 톱으로 썰어 죽이고 자기 어린 자식들을 산 채로 이방 신전에 제물로 불살랐다.
이에 주님은 심판대에서 명하신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3).” 기껏 내가 행한 일, 나의 수고와 애씀을 가지고 주께 요구하는 기도란, 주의 은총이 아니면 그저 그 열심을 다하였던 것들이 ‘불법을 행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마치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2-3).” 그러니 우리의 열심이 얼마나 조악한가?
하여 지혜자는 권하기를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곧 우리가 스스로 ‘지나치게’ 자기 의와 판단으로 신앙을 삼아, 신념을 믿음으로 착각하여 믿음조차 자기 의지로 자신의 결단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하는 것에 대하여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아니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자신의 지나침을 물리칠 수 있다.
우리가 믿음의 성장에 있어 이를 성령의 열매로 놓고 보는데, 그 열매 가운데 사랑은 맨 앞에 두고 절제를 맨 뒤에 두신 이유가 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곧 사랑은 말씀으로 오신 예수를 의미한다. 저는 빛으로 오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 성령으로 오셨고, 우리에게 사랑의 빚이 되셨다. 곧 우리는 사랑에 빚진 자들이다. 그러므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그렇게 성령의 열매는 주가 이끄시고 우리의 순종으로 참여가 이루어져서 맺어진다. 그럴 때 절제는 이 모든 열매를 밀어올려 온전하게 한다. 곧 절제가 없으면 사랑도 자기연민으로 자기애에 빠지기 십상이다. 사랑을 조금만 비틀면 질투가 된다. 사랑보다 잔인하고 무서운 공격도 없다. 절제 없는 사랑은 집착이 된다. 어쩌다 신앙도 맹신이 되는 것이다. 절제 없는 희락은 쾌락주의로 빠져들게 한다. 절제 없는 화평은 일종의 평화주의자가 되어 ‘종교화합’을 운운하여 예수와 함께 다른 기타 신들을 더한다. 절제 없이 오래 참음은 안일함의 극치다. 모든 것을 허용한다. 절제 없이 자비한 것은 오히려 악당보다 악하다. 좋은 게 좋은 식으로 흘러간다. 절제 없는 충성은 맹목적인 헌신으로 자신을 파괴한다. 절제 없는 온유는 우유부단하여 죄를 죄라 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 절제 없는 절제는 분리주의나 근본주의를 낳는다.
우리의 절제는 앞서 사랑이 이끌어갈 때 유용하다. 이는 믿음과 같이 주의 선물로 성령이 주셔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을 구해야 하는데 여기에서도 절제가 필요한 것은 자칫 성령의 은사만을 구하다가 사이비종교나 이단을 능가하는 성령의 능력만을 바라기 일쑤다. 다들 ‘성령 받았다’ 하면 무슨 희한한 능력으로 여겨 양탄자라도 타고 하늘을 훨훨 날아다녀야 할 것 같다. 오히려 성령은 무심한 듯 전심하다. 전심(全心)이란 온전한 마음으로 일심(一心)으로 통한다. 성령으로 우리는 한 마음이 된다. 한 마음으로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여 고난의 종 욥은,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설령 나를 죽이신다 해도 하나님은 선하시다. 나를 오늘의 고통 중에 내어주신다 해도 하나님은 이를 선으로 이뤄 가신다. 가정예배를 드리며 신약을 지나 구약으로 이어지면서 우리는 하루에 한 장씩 말씀을 서로 나누는데, 늘 보면 우리의 악행으로도 하나님은 선을 이루신다. 가령 이번 주에 유다가 다말을 통해 베레스를 낳았는데 저는 다윗의 혈통을 이어 예수의 계보에도 올랐다. 가나안 여인으로 며느리였던 다말도 그렇고 모압 여인 룻의 경우도 그렇고, 기생 라합도 그렇고,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마리아도 그렇고… 우리로 선을 이루게 하심은 성령으로다. 저들이 어떤 선을 행하여 그 업적을 기리는 게 아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산다. 성령은 무심(無心)하여 더러는 있는 듯 없는 듯 우리를 이끄신다. 우리는 일상에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성령의 능력으로 산다. 오늘의 어떤 어려움으로나 기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때도 성령으로다. 욥이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주를 신뢰하여 아뢰었던 것은 성령으로다. 내년 4월에 결혼을 정하고 이런저런 것을 준비하다 딸애가 청첩장에 들어갈 성경구절과 문구 한 구절을 부탁하였다. 처음 떠올렸던 구절이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 8:6).”
하는 것으로, 술람미 여인의 소원을 기록하고 있다. 도장은 옛날부터 자신의 인(印)을 대신하는 것으로 일종의 표적이다. 오늘에도 서류에 어디 중요한 문서에는 서로의 도장을 찍어서 증표로 삼는다. 유다도 다말에게 이 도장을 맡겼다. 중요한 만큼 그것을 가슴에 품어 보관하였다. 혹은 오른손에 항시 건사하기도 했다. 더러는 반지로 새겨 끼고 다녔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 인장반지라 할지라도 내가 빼어(렘 22:24).” 즉 결혼이란 우리가 서로에게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서로의 증표로 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대속(代贖)의 죽음을 죽으시기까지, 교회를 사랑하셨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이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8).” 곧 우리가 뭘, 어떤 의와 선을 행하여 얻은 게 아니다. 아직 죄인일 때, 하나님을 거역하고 함부로 살고 있을 때,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9-10).”
그러므로 어떠하든지 하나님과 화목 하는 것이 귀한 사명이다. 그래서 바울은 죽기까지 자신은 주의 것이라 하였고, 욥은 죽이신다 하여도 주를 의지하였다. 오늘의 어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를 의지함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나는 이를 알았고, 그의 강권하심으로 고꾸라져 두 손 들었다. 그때 심정은 그야말로 꼼짝 마라, 하심이다. 지금도 더러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딜 함부로 가거나 누가 오거나, 어느 자리에서 어떤 만남으로, 힘들어하게 하시거나 못하게 하실 때… 주 앞에서 승복하는 것을 배운다. 가령 아들을 필리핀에 보내놓고 한 번도 못 간 것, 딸애 졸업식장에 한 번도 못 간 것.
주의 강권하심이란 때로 너무 힘들다. 서럽고 눈물겹다. 지금도 나 없이 아이들 졸업 사진이나 필리핀 사진을 볼 때 눈물이 난다. 미안해서 자주 운다. 딸애 결혼을 두고 나는 혼자 서러움이 복받쳐서 어깨를 들썩거리며 눈물을 삼키기도 한다. 그렇게 성경은 여러 곳 찾아보다 딸애에게 보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엡 4:4, 창 2:24).”
나는 내 곁의 상한 영혼들을 주의 사랑으로 사랑하게 하시기를 위해 자주 기도한다. 이제 고작 초등학교 3학년 아이가 조울증 약으로 버틴다. 약을 먹지 않으면 아이가 혼자 실실 웃거나 까부라져 허공만 쳐다본다. 또 어느 아이는 이번에 중학교에 올라가는데 지능이 60이고, 강박증을 보이면서 같은 행동을 반복함으로 곁의 사람을 염장 지른다. 아이의 부친과 형은 화가 나서 아이를 때리고 아이엄마는 그것이 서러워서 또 아이를 혼낸다. 사춘기까지 와서 아이는 삐딱한 말투와 건들거리는 행동으로 학교에서는 물론이고 학원들이 아이를 받아주지 않는다. 열다섯이 되는 어느 아이는 전신마비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가운데 좋고 싫음만 표시할 줄 안다. 그 부모는 이 한 아이를 건사하느라 날마다 교회로 올라와서 운다.
이상할 정도로 점점 더 사람들의 정신이 혼탁하여 간다. 누가 말하길 앞으로는 정신과적인 직업이나 노인관련 사업이 성공한다고 한다. 벌써 그런 것 같다. 두 모녀가 양극성장애에 망상과 우울을 겪는데 저들의 삶은 점점 더 피폐해져 간다. 도무지 하나님이 무얼 원하시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에 오늘 말씀은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이 모든 게 이 땅에서 비참한 현실인 것 같으나 사랑으로 인한 것임을 묵상한다. 우린 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우리의 죄성과 하나님의 사랑이 충돌하는 것이다. 사랑은 죽음처럼 막기 어려운 것이라, 사는 날 동안 감당해야 한다.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도 그러하시다. 우리도 그를 사랑하는 데 있어 필사적이어야 한다. 어쩌다 사랑은 잔인한 것이 되었다. 에덴 이후의 일이다.
이에 용기를 더함은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아 8:14).” 하고 사랑의 노래, 아가서는 끝을 낸다. 이것은 단도직입적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의 재림을 갈망하게 한다. 교회의 탄원이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계 22:7).” 누구보다 바울은 우리의 재림 신앙을 유난히 강조하였다. 이를 위하여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곧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우리는 지치지 않고 달려가야 한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들 때도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이다. 주가 어떤 뜻으로 오늘에 나를 두셨는지 알지 못한다.
이에,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7-28).” 고로 그 사랑은 우리의 죽음까지도 능가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29).” 하여 오늘 내게 주시는 이와 같은 어려움과 고통까지도 주의 사명으로 감당해야 한다. 그것으로 주를 바라여야 한다. 나는 나의 나됨으로 복되다. 이를 인정하기까지 날마다 나는 나와 싸운다. 때론 너무, 지겹다.
늘 어디가 아프고, 아픈 것으로 몸은 물론 마음까지도 힘에 겨워 정신과적인 어려움으로 약을 먹기도 하는 것이겠으나… 그리하여 저 아이들을 또는 어떤 이의 말도 안 되는 사정과 그 어려운 심정을 헤아리다 서러워서 같이 눈물을 흘릴 때,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9).” 이로써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18).” 하는 이 말도 안 되는 말씀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 앞에 앉아, 누구의 사연으로 또한 저의 고통을 함께 호소하면서 한 영혼을 사랑하려 애쓰다 주께서 그런 나를 사랑하셨음을 느낄 때면 또 운다. 이 땅에서의 고난으로 참 평안의 주의 날을 사모하게 된다.
그러할 때에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이와 같은 말씀으로 새 힘을 얻고 주 앞에 아뢰기를,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셀라)
(시 21:1-2).
이를 체험하고 간증하며 사는 삶이 복되다. 나는 늘 어느 한 순간도 편할 때가 없다. 그리하여 주의 이름은 간절하였고, 나의 이 간절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며 애통해하는 상한 심령을 사랑한다.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그를 영접하시고
순금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그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그에게 주셨으니
곧 영원한 장수로소이다
(3-4).
오늘도 주의 이름으로, 그 영광과 존귀로...
주의 구원이 그의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을 그에게 입히시나이다
그가 영원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
…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5-6, 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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