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렘 2:13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 23:5-6
하나님은 우리밖에 없다. 다른 무엇도 안중에 없다. 가령 가나안은 이미 여러 우상과 이방 족속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들어가서 살 비옥할 땅일 뿐이다. 곧 그들의 악함은 본래 그런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걸림이 될 게 아니다. 하여 “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에 인도하여 그것의 열매와 그것의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렘 2:7a)” 이를 위하여,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6).”
그러다 보니,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으며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에게 반역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랐느니라(7b-8).” 이는 마치 농부의 시선으로 땅이 비옥하고 해가 들고 바람이 잘 지나는 곳으로 추수할 때에 곡식들이 먼저 눈에 들어올 뿐이다. 수풀이 우거지고 온갖 잡초들로 무성하여 쓸모없을 것 같은 땅이 그리 보인다.
하나님의 눈으로 그의 백성만이 눈에 들어온다. 이미 우상과 온갖 죄악의 온상인 가나안이 주를 경외하는 백성들로 찬송과 경배가 넘칠 것을 보인다. 이를 위하여 광야에서 이끌어 오셨는데 어찌 주를 찾지 아니하는가? 하고,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6).”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우리의 죄악 두 가지를 주목하게 한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13).”
우리가 이처럼 헛되이 산다. 살아서 주를 찾지 않는다. 나름은 믿는다, 주를 따른다고 하지만 실상은 이 땅에서 남들처럼 살 궁리로 어처구니가 없다.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하고 예레미야는 선포한다. 즉 우리는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하고 말씀으로 알고 말씀으로 증거를 삼아야 한다. 말씀 그대로, 말씀에만 권위를 가지고, 말씀으로만 만족할 줄 알고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선이고 의이며 지혜이다.
이에,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2).”
어쩌면 우리의 오늘이 고단하고 피곤한 것은 순수하였던 적의 신앙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를 처음 사랑이라 말씀하신다. 오늘의 열심도 신앙도 그동안의 노력도 다 좋은데,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 2:2-3).” 그럼 뭐하나?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4).” 마치 주가 이르시길, 다 안다. 다 안다. 나도 다 안다. 하시면서 ‘그러나 책망할 것이 있으니 처음 사랑을 버렸다.’ 하심인데….
아무런 계산도, 어떤 요구나 바람보다 그저 하나님의 사랑에 놀라워하면서 그저 주 앞에 사랑 받는 자로 사는 것에 감사하였던 때가 있다. 곧 ‘출애굽 당시에 여호와를 좇은 행위’로써 하나님께서 택하여 세우시던 그때의 감격과 충만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를 ‘결혼할 때’로 비유하시는데, 마치 청춘남여가 서로 사랑을 고백하고 들뜬 마음으로 결혼을 준비하고 처음 신혼생활을 할 때의 순수하고 유일하였던 사랑이 시간이 흐르면서 퇴색하여 무덤덤해지면서, 사랑도 요구의 조건이 되는 것으로 식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결혼 때의 사랑’ 같이 사랑했던 적이 있었던가? 기억조차 멀어서 이젠 그저 형식과 의무만이 남았다면…. 이를 오늘 말씀은 찾으시는 것이다. 애굽을 떠나 광야와 같이 황막한 지역도 개의치 않고 여호와의 인도하심으로만 따라 만족하였던 시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옛적 경건하였던 때를 기억하고 계신다.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전혀 붙들 게 없고 의지할 수도 없던 막막하던 시절에도 주만 의지하여 주의 말씀으로 살려 했던 그 시절. 소위 뭣 모르고 따르고 순종하였던 그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의 사랑을 하나님은 요구하시는 것이다.
출애굽 초기 비교적 하나님께 거룩 되어서 바침이 되었던 시절의 의지와 소망을, 믿음으로밖에는 감당할 수 없었던 때를 말이다. 나에게 그 시절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모든 걸 다 주께 걸고 죽든지 살든지 주만 바랄 수밖에 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한참 같이 어울리던 친구나 선생은 나의 처신을 어처구니없게 여겼고 어리석어하였다.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고, 기껏 잘 살아서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 될 것인데 이를 박차고 뜬금없이 신대원을 가고 목사가 되겠다고 하니… 저들 눈에는 나의 그러한 선택과 변화가 못마땅하였다. 해서 가까웠던 누구는 사이비 교주가 되려는가? 하였고, 누구는 그런 나를 현실도피자라고 하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자주 만나고 늘 가까이 하던 친구는 슬슬 피하다가 포기하는 듯하였고, 누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자신도 믿는 자로 나를 광신도가 되려는가? 하고 꺼려하였다.
곧 애굽에서 나올 때 그처럼 끝까지 바로는 이스라엘을 놓아주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붙들고 강제하였던 것과 같다. 상대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만 전념하려 할 때는 세상은 그만큼 더 필사적으로 우릴 붙들고 놓아주지 않으려 한다. 같이 글방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로 시작하였던 아이들이 한두 해 잠깐 북적거리며 모여서 같이 성경공부를 하고 학습세례를 준비하여 초기에만 일곱 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이어서 두어 명으로 줄더니 거짓말처럼 모두 사라졌다. 현실적으로는 모두가 대학을 가고, 직장을 들어가고, 누군가를 사귀면서…. 이와 같이 또한 신앙도 익숙해질 때 우리의 믿음도 안이함에 빠져든다.
우리의 순수했던 시절, 하나님은 우릴 대적하는 것들로부터 방어하셨다. 예컨대 출애굽 후 아말렉 족속이 이스라엘을 침해하다가 징계를 받은 일과 같다(출 17:8-16). 그러나 출애굽 후 서서히 사막생활에 눈을 뜨면서 타락은 들어와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동은 주변 족속의 우상 신과 나올 때에 들었던 신상을 겸하여 섬기기 시작하였다. 이를 ‘불의’라 하시고, ‘나를 멀리하고’ 나오는 결과로 보았다. ‘나를 멀리하고 떠나갔다’는 뜻이다. 그렇게 ‘허탄한 것’으로 목표를 삼고, 우상을 따라가듯 하나님을 겸하여 다른 것도 소중히 여기다가 하나님을 저버리게 된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전 8:3-4).”
그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의미를 두면서,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10:19-20).”
흔히 우리가 말하는 우상은 어쩌면 우리 스스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허용하는 문화의 일부다. 이 땅에서의 즐거움 정도다. 신앙생활이 수도승의 삶도 아닐 바에 희락을 쾌락으로 둔갑시키는 것은 한순간이다. 성경의 희락은 하나님으로 만족함인데, 세상의 쾌락은 육신으로의 추구와 목표와 기쁨이다. 이 둘은 같을 수 없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것이다. 다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돈도 명예도 나름의 추구하는 가치관도 필요하다. 이를 신앙으로 한데 묶어 다 그렇고 그런 것으로 여기는데, 돈이 어디 순수하게 하나님 것으로 전부인가? 헌금은 인색하고 이상과 꿈을 위한 투자에는 너그러운 법이다. 명예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순전한가? 사람들의 기대와 자신의 만족으로 우선하지 않고 과연 비루한 때에도 명예로운가?
우리의 이중적인 신앙을 스스로는 인정하기 싫어서 억지를 쓴다. 외면하여서 자신의 기준으로 괜찮다는 선을 긋는다. 우상을 다른 표현으로 바꾸면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성경으로나 자신의 신앙 밑바탕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인 것을 알면서도 다들 그러고 살고, 그게 뭐 어때? 하는 식으로, 그게 왜 나빠? 하고 하나님을 곁들이듯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세상의 문화에도 편승한다. 사람들의 인정과 과시에 집중한다. 이것이 놀랄만한 죄악이다. ‘깃딤’은 지중해안에 있는 지방을 의미하는데, 흔히 서쪽나라들을 가리킨다. ‘게달’은, 아라비아 사막 동쪽에 있는 유목민족을 가리킨다. 이 이방 민족들은 거짓 신을 섬기면서도 대대토록 그것을 변경시키지 않았다.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도 그런 의미다.
“너희는 깃딤 섬들에 건너가 보며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 이같은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라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10-11).”
곧 세상은 여전히 세상으로 일관되게 하나님 아닌 신들로 꾸준하고 성실하게 죄악 되다. 각 민족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신(神) 외에는 다른 것을 허용하지 않음으로 저희도 자신들의 신을 끝까지 섬긴다.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도 끝까지 그것을 고집하는데,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을 섬기는 백성으로 우리는 얼마나 오합지졸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가령 내란재판을 보면서 꿋꿋하게 거짓말하는 자의 거짓에 거짓으로 의연함을 보면서 놀란다. 각각의 정치진영에서 한 사안을 놓고 서로가 꿋꿋하게 자기들 이익과 신념을 내세우며 굳건한지 놀란다. 저들도 자신의 참 신을 저버리는 일이 없는데, 하물며 주를 믿는 우리들이 어느 순간부터 혼합하여 이래도 괜찮은 듯 저래도 좋은 듯 헛된 신, 무익한 것을 따르며 살고 있는지?
정작 우리가 언제 말씀 앞에 순수하였던 적이 있었던가? 하나님으로 모든 게 만족하였던 적은 있었나? 너무도 까마득하여 이제는 성경만 어렵고 다른 것은 쉽고 유용하다. 그래서 유튜브를 보고, 영어 성경공부를 하고, 누가 풀어주며 같이 어울려 옳거니 그르거니 하는 모임에 열을 올린다. 정작 자신은 하나님 앞에 혼자 앉지 못한다. 말씀 단 몇 구절도 혼자서는 읽어낼 수 없다. 누가 쓴 글을 보고, 어떤 해설을 곁들이지 않으면 뭐가 뭔 소린지… 누가 하나님이고 뭐가 말씀인지, 정말 우리는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여 사는 게 맞는가? 오늘 본문은 이를 확인한다.
하여,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니 네가 어찌 말하기를 나는 더럽혀지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아니하였다 하겠느냐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이니라 발이 빠른 암낙타가 그의 길을 어지러이 달리는 것과 같았으며 너는 광야에 익숙한 들암나귀들이 그들의 성욕이 일어나므로 헐떡거림 같았도다 그 발정기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 그것을 찾는 것들이 수고하지 아니하고 그 발정기에 만나리라(22-24).”
그저 돈 되는 일이면 양심이고 뭐고 아랑곳하지 않고, 양잿물도 먹을 위인으로 산다. 주일이고 뭐고 누구의 결혼식이 우선이고, 어떤 모임에서의 관계가 제일이며, 사람과 사람 사이를 그처럼 우선하다가도 자기 잇속에 따라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서기 일쑤고 뒤통수 맞기 십상이면서도 그게 옳다고 여기면서 오늘도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산다. 그러다 영적으로 병들어서 생수를 곁에 놓고 삽질하는 꼴이라니!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13).”
과연 나는 아니다, 하고 자신할 수 있을까? 믿음으로 산다면서도 돈돈거리며 돌아버리게 살고 있는 중이다. 세상에 흡수되었으면서도 주의 이름으로 산다고 자부하는 게 태반이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다투는 일이다. “그러므로 내가 다시 싸우고 너희 자손들과도 싸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9).” 그리하여 하늘도 놀랄만한 일이다.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2).” 그런데도 자신들만 멀쩡하단다. 스스로는 아무렇지 않다고 한다. ‘갈수록 태산’이라는 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
하고 말씀은 되묻는다. 그럼에도 ‘모든 높은 산 위와 모든 푸른나무 아래서 몸을 굽혀 행음’ 하는 형국을 신앙이라고 한다. “네가 옛적부터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 나는 순종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모든 높은 산 위에서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너는 몸을 굽혀 행음하도다(20).” 즉 다른 더 좋은 것, 자기가 좋아하는 다른 것을 우선 바라면서도 마치 하나님으로 인한 것이라고 착각하게 하는 것이 우상숭배이다. 우상이란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 자신의 의지니 노력으로의 결과로 만족하려는 것이고, 이를 마치 올바른 신앙이라고 억지를 쓰는, 오늘 날 거짓말의 주역들 같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필경 자기 생각으로 자신이 옳다 여기는 한, “네가 어찌하여 네 길을 바꾸어 부지런히 돌아다니느냐 네가 앗수르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함 같이 또한 애굽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라(36).” 하여 오늘 우리의 수고와 애씀과 노력이 우리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할 것이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21).” 하고 오늘 말씀은 안타까움으로 놀라며 묻는다.
하여 시편은 되묻듯 의연하게 찬송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1).
하늘이 두 쪽이 난들? 세상이 무너진다 해도, 나의 나된 것으로 오늘 주께서는 나의 순수하였던 참 시절, 그 신앙을 찾으시며,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2-3).
엄연히 우리가 알 것은 우릴 위한 사랑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로 의의 길로 인도하심이다. 내 의지나 노력으로가 아님으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4).
이 확실하게 분명한, 내가 믿는다는 이 하찮은 믿음보다 더 분명하게….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5-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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