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하현. 2025. 12. 1. 05:42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렘 1:8-9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시 22:10

 

 

나는 주의 것이라는 것. 이 땅에 나기 전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앞에서 감탄과 찬송이 나온다. 아가서를 지나 이사야는 주일 날 설교 본문으로 삼았음으로, 오늘부터는 예레미야로 건너왔다. 예레미야서는 이사야에서 말라기까지 구약의 예언서 17권 가운데 그 모든 내용의 모티브가 된다. 핵심 주제는 예루살렘의 함락과 유다의 멸망, 바벨론 포로와 귀환을 통한 선민 역사의 회복을 다룬다. 이는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승배하는 둥 하나님께 대한 배역의 역사로 타락과 범죄에 빠져드는 선민을 향한 말씀이다. 하나님은 오래 인내하며 여러 선지자를 보내셨고, 간곡히 권면하셨다. 그러나 저들은 돌이키지 않았고 마침내 공의의 심판이 전개되었다.

 

비록 심판하셨으나 결코 영원히 멸하신 것은 아니어서, 오히려 징계를 통한 그들 영혼의 정화와 용서와 회복을 이루시는 데 목적이 있다. 이를 통한 여호와의 크신 사랑과 무조건적 은혜에 대한 구원의 역사가 진술되고 있다. 구약 예언서들은 창조자요 주권자이신 여호와를 향한, 집요하고 타락과 악착같은 불순종에 대하여 공의의 심판으로 파국의 질곡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대비된다. 아무리 죄악이 극에 달했어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단 한 번도 단절되지 않았다.

 

예언서들은 각각 그 시대적 배경에 따라 이러한 주의 인자하심을 상대적으로 선민 이스라엘의 타락의 역사에서 보여준다. 예레미야는 모든 구약 예언의 1차적 분수령이라 할 수 있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의 제 3차 침입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을 정점에서 유다의 최종 멸망까지 광범위하게 그 현장에서 기록하고 있다. 예레미야는 치열하게 저 역사적 현실 속에 참여하며 활동하였다.

 

예레미야는 주전 627-586년에까지 살았다. 실제 그의 활동은 바벨론이 3번째로 침입한 588년에 마침내 예루살렘이 함락된 586년 사이에 집중되어 있다. 그 가운데서도 주전 586년 4월 9일, 예루살렘 함락 직전 몇 개월의 활동으로 집약된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그 어떤 구약의 예언자들보다 예루살렘 함락과 유다의 멸망에 있어 전후 사정을, 특히 유다의 멸망 이전 상황에 집중하여 가장 영향력 있게 활동한 선지자이다.

 

예레미야서는 구약의 예언서 중에 가장 방대한 분량의 책이다. 이 같은 예레미야서의 내용 중 에루살렘 함락을 통한 유다의 심판에 대한 경고에 대해 거의 그 내용을 차지한다. 이후 바벨론 포로 귀환을 통한 선민으로의 회복에 대한 내용은 나머지 부분에서 다루고 있다. 단적으로 예레미야가 시기적으로 유다 멸망 직전에 보내심을 받았고, 그러므로 예레미야서의 기본 문체는 모든 예언서 중에 가장 직설적이다. 예레미야서는 유다 멸망의 원인으로 이스라엘의 범죄를 지적하고 그로 인한 여호와의 심판의 당위성과 심판의 참상을 경고한다. 다른 성경에 비해 단순 명료한 직설적 선언들로 열거된다. 그야말로 파상적 반복으로 열거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들도 모두 예레미야 본인이 파국으로 치달아가는 예루살렘 한 가운데 그 주역으로 서있었다. 다른 선지자들보다 더 가까이 현장에서 백성들과 부대끼며 직접 그들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야 했다. 예레미야서는 구약 예언서의 전반적 시대 배경인 남북 분열과 후기 바벨론 포로시대는 이스라엘이 앗수르와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고 남방의 기존 강국인 애굽 등등 연이어서 발흥하는 대제국들의 각축의 마당에 휘말리던 격동의 시대였다. 이런 시대의 한가운데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과 구원을 선언하시고 이행하셨다. 이스라엘은 물론 주변 대제국 모두의 역사를 주도하셨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소명을 받은 사실과 그때 받은 두 가지 환상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예레미야 역시 한 사람의 유약한 자연인으로서 선지자의 소명을 사양하였으나 오직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 은혜 가운데 선지자로 세워졌음을 밝힌다.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4).” 하며 말씀이 그를 찾아오셨음을 주목하게 한다. 이는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5).” 곧 오늘 우리의 신앙과 이 믿음에 대하여 어쩌다 우연히 어떤 날에 어떤 계기로 얻어진 게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는 바울의 서신에서도 명확히 하여 그 의도가 분명하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곧 우리를 부리시고 택하신 것에 그 목적은 분명하다.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는 오늘 본문의 역사 가운데 이스라엘의 타락과 주변국들의 강성함이 어쩌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연히 일어난 것이 아님을, 궁극적으로 그러한 죄악의 현장과 심판의 귀결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때에 주의 부르심은 두렵기도 하다. 그러하여 예레미야도 자신을 두고 사양한다.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6).” 이는 애굽에서 피신하여 미디안 광야에 숨었던 모세를 부르실 때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마찬가지로 오늘 예레미야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강권하심도 결코 물러서지 않으신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7).”

 

이를 묵상하다, 나 또한 신대원에 들어가서도 울면서 다녔던 기억이 떠오른다. 정말 못하겠고 하기 싫었고 안 하면 안 되는가, 하고 운전을 하고 등교하면서도 여러 번 울었다. 그때는 이미 하나님의 강한 손길이 나를 붙들고 계셨고 그로 인하여 파산과 아들을 필리핀으로 쫓아 보내신 것과 공황발작에까지 전방위적으로 나를 압박하고 포위하여서 꼼짝할 수 없게 하신 때였다. 어제는 사위될 아이가 와서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어쩌다 그때 그 이야기와 함께 지금은 같이 있는 아들을 옆에 두고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해 서로들 말이 오갔다. 그때마다 나는 감회가 새로워져 눈물이 핑, 돈다.

 

예레미야는 말한다.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는 심정이 고스란히 나와 같다. 나는 그럴 자격도 인격도 형편도 여건도 안 된다면서 싫다고, 싫다고 하면서 끌려온 게 사실이다. 그런 가운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하심 같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결국 신대원으로 보내셨고, 그 해 12월 겨울에 첫 주일예배를 글방에서 시작하면서 교회로 삼으셨다. 이 또한 내가 자의적으로 개척을 하려고 해서 하게 된 게 아니었다.

 

돌아보면 그야말로 어쩌다 우연히 이루어진 일 같은데, 나로서는 사역의 길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런 거 보면 나의 부친도 그러했을 것이라, 사업이 실패하고 온통 빚더미 위에 앉았을 때 죽고자 하여 올라간 기도원에서 사역자로 붙드신 것이다. 이후 나의 기억으로는 부친의 사역의 길은 전투적이었다. 모든 게 죽기 살기로 덤비듯 하였다. 무모하고 착잡하였다. 어린 나이에 나는 그 현실을 고스란히 감내하여야 했다. 가난도 말도 안 되는 잦은 이사와 터무니없는 생활환경으로 어린 마음으로도 무책임할 뿐이었다.

 

기본적인 생활은 물론 자식들에 대한 책임조차 모두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언제 어디로든 가라, 하시는 곳이면 앞뒤 안 가리고 떠났다. 그러다보니 당장 식구들은 잘 곳조차 없어 남의 건물 옥상에 터를 잡고 살기도 몇 번이고, 어디 빚으로 망하기 직전인 교회는 물론 나환자촌이며 어디든지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옮겨 다녔고, 그로 인해 나는 전학을 수도 없이 하였다. 그러나 한참 때 친구들은커녕 개인적인 안정조차도 얻을 새가 없었다. 그런 것을 보며 자랐으니, 막상 내가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부터는 더더욱 목회의 길로 뛰어들 리 없었다.

 

동생 둘도 그러했을 것이고 누이 또한 매형도 서로 목회만은 안 하겠다고 그렇게 도망치듯 발버둥 쳤는데도 결국 다 주 앞에 끌어다 목회자들로 삼으셨으니…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심이 없다. 돌이켜 보면 오늘 예레미야와 같이 하나님에게는 신속(迅速)한 복종이 현명하다. 이는 그가 불러 세우신 게 어제오늘 어쩌다 그리 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5).” 그런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어찌 저항하여 거부할 수 있겠나? 나의 부친이 그렇듯 주 앞에 고꾸라져 두 손 들고 항복한 것과 같이 매형도 그러했고, 당시 매형의 그러한 승복에 나는 반감이 들어서 모진 말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나는 죽어도 목사는 안 한다면서 기를 쓰고 세상 속으로 도망치다 다 늦게 붙들려온 셈이니….

 

희한하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포인트는 ‘내가 할 수 있다’ 하는 자신감이 아니라, 나는 못한다고 하는 나약하고 부족함으로 그리하여 주가 아니시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모세도 그의 부르심에서 저로서는 사양할 수밖에 없었음을 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겸손할 때 더욱 강하게 밀어붙이신다. 그러면서 더욱 하나님이 ‘보내시는 데로 갈 뿐이라는 것’을 알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7).”

 

그리하여 하나님에게 사명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순종할 뿐이다. 그 뒤에 감당할 것은 하나님이 맡으신다. 누구에게 위로의 글을 보낼 때 이 말을 적었다. 그렇듯 맡기지 않고는 감당이 안 된다. 또 하나는 ‘그가 주시는 말씀만 전할 뿐이라는 것’이다.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7b).” 즉 선지자가 말할 줄 모르는 것이 문제가 안 된다?! 못 하겠다고 자신감이 없는 것도 문제가 아니다! 나의 형편과 사정도 못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나의 부친의 사역으로 나의 유년시절이 그러했고, 나의 붙들림으로 나의 아이들의 생활이 그러했을 것이다. 어제도 딸애와 아들 앞에서 나는 고백하기를 이렇듯 주 안에서 잘 자라준 것만으로도 나는 그저 기적을 본다! 이는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이로써 나는 지금 교회도, 말씀 전하는 일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전하고 감당할 뿐이다. 누가 권유하듯 교회에 대한 어떤 포부나 앞으로의 비전이 어떻고, 교회 성장을 운운하여 무슨 계획이란 게 내게는 없다. 그러다 보니 이게 전부이고 이런저런 사연과 상한 영혼들의 외침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에서 주가 행하신다. 나 역시 안정제를 먹어가면서 말이다. 이에 오늘 말씀이다.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8).”

 

하여 나는 내 주제에 내 앞가림도 안 되는데, 이런저런 정신적 어려움으로 신음하는 이들과 그러해서 교회에조차 여느 사람들처럼 나올 수 없는 처지의 사람들을 상대한다. 그때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하시는 말씀이 아니면 대체 이 한 아이를 데리고 무슨 교회를 유지할 수 있겠나? 속된 말로 저들 돈도 안 되고 뭐라 이른들 말도 안 듣는 자들의 사연을 두고 시달리듯 기도한다고 어찌 교회가 되겠나? 나는 교회에서 자고 새벽에 일어나면서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교회를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없어서 주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시위하듯 떼쓰듯 내가 여기 있음으로 이곳이 교회인 것을 주 앞에 항변하는 마음도 있다.

 

이에 오늘 말씀은 나를 붙드시는 것으로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8a-9).”

 

하심이니,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하시는데 뭘 더 어쩌겠나? 더불어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이 말씀이 허투루 주어지는 게 아님을 알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하심으로 오늘도 이렇게 말씀을 묵상하고 글로 써서 나로 되새기게 하고 누군가로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람이다. 어쩔 수 없다. 나는 부친과 같이 죽기 아니면 살기로 버틴다. 앞으로 달려갈 뿐이다. 될 대로 되라는 심보로 내 책임이 아님을 주 앞에 늘 강조한다. 그때마다 “두려워 말라” 하시니,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고 하셨으면 된 거다. 듣는 자는 그것으로 만족하면 된다. 믿음으로밖에 달리 무엇으로 이 난국을 헤쳐 갈까?

 

매 달 근근이 임대료를 감당하고, 아내는 생활에 쪼들리며 이런저런 살림살이로 호소하는데… 어쩌겠나? 책임지시라! 주가 알아서 하시라, 하고 나는 이제 세상 여정에서 방관자다. 주의 일에, 교회에 전념할 뿐, 주가 다 이루어주심을 느낀다. 어제 딸애는 난데없이 신부 입장 때 아빠가 손을 잡고 들어가 달라고 부탁하였다. 둘이 같이 들어가든지 요즘은 각자가 주목 받으며 들어가는데 왜 굳이? 하고 외삼촌 내외도 의아해하는데 그냥 그래달라고 막무가내였다. 에라, 모르겠다! 그래 그럼, 그때 가서 약을 너무 먹고 뻗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하자, 하고 그러겠다고 했다. 나의 생은 모든 게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주의 선하심이 발동하였다. 주가 하실 것이다.

 

오늘 말씀은 나의 삶을 이렇게 또 돌아보아 주의 인자하심을 고백하게 한다. 두 환상과 예언에 대하여는 다음에 또 주실 것이다. 묵상이란 내 삶을 뒤집어엎는 것으로, 말씀은 오늘의 내 삶의 이야기를 건들고 흔들어서 나로 씹어 삼키게 하신다. 하여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19).”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한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시 22:6-8).

 

나의 이러한 날들이 누구 눈에는 가소롭거나 한심하거나 어처구니없을지라도,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9).

 

주가 이 일의 주동인 것을 안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19, 23).

 

나는 나의 부족하고 어눌하고 한심한 지경을 가지고 주의 살아계심을 증거 한다. 이로써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24).

 

이에 증인으로 산다. 이로써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26-28).

 

누가 주인인지, 이 모든 일의 주체가 누구인지,

 

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3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