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하현. 2025. 12. 3. 04:32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너를 자녀들 중에 두며 허다한 나라들 중에 아름다운 기업인 이 귀한 땅을 네게 주리라 하였고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 하였노라

렘 3:13, 19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 24:1

 

 

‘하나님의 길에서 사랑은 공의를 따라 임하신다.’ 우리는 주의 긍휼하심과 은총을 바라는 데 있어 회개가 전제돼야 한다. 우리의 회심과 회개는 동전의 양면 같이 하나다. 회개가 있을 때 회심(돌이킴)도 가능하고, 돌이킴은 회개를 전제로 한다. 오늘 본문은 그리하여 타락한 백성들 유다와 이스라엘을 향해 돌아올 것을 당부하고 있다.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2).”

 

이에 돌이킴의 여정에는 과정이 있다. 먼저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하신다.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라” 하실 때 이에 대한 말씀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것임을 밝힌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3).” 그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너를 자녀들 중에 두며 허다한 나라들 중에 아름다운 기업인 이 귀한 땅을 네게 주리라 하였고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 하였노라(19).”

 

그러나 우리의 돌이킴은 묘연하고 그 사정은 저마다의 발목을 잡았다. 하여 이사야는 우리가 회개를 하는데 있어 그 구성을 살피고 전하였다. 첫째,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곧 자신의 부정함과 죄악과 더러움을 고백한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둘째, 그럴 수 있는 것은 ‘주의 이름을 갈급해하며 갈망할 때 가능하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를 붙잡으며 그의 얼굴 뵈옵기를 원하는 간절함은 갈급한 영혼에서 나온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7).”

 

셋째,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나의 창조주로 인정할 때 가능하다. 곧 하나님은 만유의 주시요, 우리의 아버지시요, 나를 지으신 주인이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8).” 이에 오늘 시편의 첫 구절도,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 24:1).

 

하는 이 단순명료한 사실을 찬양하였다. 넷째, 그러므로 주께 향해 우리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 받기를 구해야 한다. 우리는 주의 자녀이고 백성인 것을 아뢰며, 용서하시기를 구하여야 한다.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9).” 이를 오늘 예레미야 역시 그러므로 “네가 이제부터는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청년 시절의 보호자이시오니(렘 3:4).” 하였고, “이 모든 일이 있어도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할 뿐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0).” 하고 지적하였다.

 

이렇게 해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너를 자녀들 중에 두며 허다한 나라들 중에 아름다운 기업인 이 귀한 땅을 네게 주리라 하였고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 하였노라(19).” 이 모두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다. 그러므로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하시니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22).”

 

성경은 우리로 돌이켜 주의 자녀로 주의 백성으로 회복시키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이사야 역시 다니엘과 같이 64장에서 우리의 기도가 누구에게 어떤 내용으로 드려지는 것인가를 알게 하였다. 어제 오후 설교원고를 정리하면서 첫째,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다 하는 것을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사 64:1-2).” 하심은 다니엘도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이시여(단 9:4).” 하고 그 대상을 분명히 하였다.

 

서로가 마치 인사말처럼 기도할게요, 하곤 하는데 저마다의 그 비는 대상이 같지 않다. ‘기도(祈禱)한다’를 ‘기원(祈願)한다’로 같이 놓을 때, 그 뜻은 전혀 다르다. 기도는 내가 믿는 나의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절대적인 존재 앞에 비는 것이다. 기원은 바라는 게 이루어지길 원하는 정도이다. 즉 기원한다는 잘 되길 바란다는 뜻에 가깝다. 기도는 이를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 아룀으로 주의 뜻대로 이루지기를 구하는 것이다. 그 의미는 사뭇 다르다. 기원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고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이다. 누가 종종 여러 내용으로 기도를 부탁하는데 어떤 이는 병 낫기를, 어떤 이는 어떤 사업이나 자식의 일이 잘 되기를, 어떤 이는 뜬금없이 가게가 잘 팔리기를 바라며 기도를 부탁한다.

 

나는 종종 받아든 기도 청탁을 들고 주 앞에서 난감하다. 주님이 어떤 뜻과 계획이 있어 이와 같이 뒤섞으셨을까? 그런 일로 다급해하면서 기도하게 하신 것일까? 하는 데서 나는 한동안 저의 사연을 들고 주의 뜻을 살핀다. 기도는 막무가내로 기원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기도에는 둘째, 죄의 고백이 담겨야 한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하고 자신의 죄를 고하고, 그 사정을 아뢴 후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 모든 일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면서,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하고 내가 주의 것임을 인정하면서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하고 마치 잘못을 뉘우치며 부모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비는 자식의 자세로 고해야 한다(사 64:6-9).

 

이를 다니엘 역시,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온 이스라엘이 주의 율법을 범하고 치우쳐 가서 주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저주가 우리에게 내렸으되 곧 하나님의 종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맹세대로 되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단 9:5, 11).” 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죄인임을 주 앞에 아뢸 때에 가능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백은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용기가 된다.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면 은혜도 구할 능력이 안 된다. 그렇게 해서 셋째, 주의 용서를 바란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하고 주가 나의 주인이심으로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하고 그 신분의 차이와 우리의 연약함을 아뢰며,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하고 주가 우리의 구주이심을, “주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황폐하였나이다” 하고 오늘 우리의 사정을 아룀으로, “우리 조상들이 주를 찬송하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불에 탔으며 우리가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폐하였나이다” 하면서 주의 긍휼하심에 엎드린다. “여호와여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아직도 가만히 계시려 하시나이까 주께서 아직도 잠잠하시고 우리에게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려나이까(사 64:8-12).”

 

이에 대하여 다니엘 역시,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단 9:17-19).”

 

우린 누구도 주의 공의 앞에서는 설 수 없다. 살 수가 없다. 자신이 어떤 선과 의로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줄 정도로 헌신하며 살았든지 스스로는 구원할 수 없는 일이다. 하여 넷째, 하나님과 우리의 언약관계를 상기한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사 64:8-9).” 곧 주가 나의 주인이시고 아버지시다. 이를 주 앞에 아뢰는 것은 내가 그 동안 이를 방기하며 살았던 것을 후회하고 용서를 비는 것이다.

 

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이시여(단 9:4).” 우리는 아버지의 인자하심 앞에, 그의 긍휼하심 앞에 엎드리어서 용서를 빌고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다. 어릴 때 나의 부친은 우리가 무슨 잘못을 하면 회초리를 드셨다. 요즘은 이런 게 마치 무슨 큰 잘못이나 된 줄 아는데, 그래서 아이들이 부모 머리 꼭대기에 앉았다. 어릴 때는 혼나야 한다. 혼남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가 점점 아이들을 꺼리거나 가르치기를 주저하는 것은 잘못을 잘못했다고 인정하기가 그렇게 어려워진 세상이다. 아이로 이를 알게 하기까지는 그 부모가 우선 이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마치 다 크면 저절로 알게 되는 줄 안다.

 

오늘 날 이런저런 재판이나 어떤 논쟁을 가지고 다투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가관이다. 법정 피고인석에 앉아서 여러 명의 진술이 일치하게 그의 잘못을 지적하는데도 저는 끝까지 항변한다. 저를 두둔하는 자들은 맹목적으로 신봉하며 잘한다, 잘한다 한다. 서로가 미친 게 분명하다. 어느 식당에서 아이가 너무 위험하게 돌아치자 종업원이 제지를 하였고, 이를 두고 아이 부모는 아이를 나무라기보다 아이의 잘못을 두고 기죽게 했다면서 난동을 피우는 일이 흔하게 뉴스로 나온다. 촉법소년법을 아이들이 이제 더 잘 악용한다. 나는 그렇듯 10대들이 무섭다. 그렇게 자란 어른아이들, 열 살짜리 피고인석의 죄인이 불쌍하기까지 하다. 장황한 저의 변명과 설명과 꼬투리가 안쓰러울 지경이다.

 

우리가 주 앞에서 회개하고 잘못을 뉘우치며 용서를 구한다는 일은, 성령으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이를 두고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하고 오늘 본문이 물으신다! “그들이 말하기를 가령 사람이 그의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그에게서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남편이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아니하겠느냐 하느니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

 

이와 같이 우리의 죄가 얼마나 끔찍한가? 이를 인정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한, 돌아올 수 없다. 이를 인정하는 일조차 어려운 일이기는 하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저는 결국 돼지우리에까지 처박혀야 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 그러기까지 자신의 생활을 돌이켜 보고 후회하고 반성하여 탄식하고 회개함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결국은 하나님이 용서하실 것을 믿음으로, 그 믿음은 성령이 주심으로, 우리의 죄가 중한 것을 깨달아 알 수 있다. 단지 이 땅에서의 죽음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결국은 돌이켜 나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부르기까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회개에 이르면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2-43).” 정녕 십자가에 달려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기 직전까지도, 예수는 그의 곁에서 함께 십자가에 달려 저의 회개를 들으시고 용서하셨다. 이 놀랍고도 희한하고, 신기하며 감격스러운 장면이 우리 삶에도 있을 것이다. 나는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마땅할 죄인인데, 죄가 없으신 이가 나와 같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나의 죄를 용서하심이 말이다.

 

일생 동안에 어느 순간마다 그러했음을 나는 고백한다. 차마 이를 밝힐 수는 없어서 마음에 두고 탄식하는 죄에까지 예수께서는 그 자리에 오셔서 나와 함께 하심으로 용서하셨다. 우리가 살면서 필연적으로 돈과 명예와 가족과 민족이라는 이들 우상을 놓고 얼마나 씨름하는지… 무엇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에서 우리의 우상 숭배는 끝이 없다. 그럼에도 오늘 말씀은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면서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하신다.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2).”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우린 스스로 억울한 심정으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 하는 것이 오늘 저 내란재판의 현상이고, 식당에서 아이 편만 들면서 아이로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 부모의 무지가 문제였다. 분명히 아닌 것은 아닌 것을, 아닌 데 그걸 어떻게든지 괜찮다고 하려니까 억지를 쓰고 전쟁도 불사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더 고약하고 완고하게 자기주장으로 악악거릴까? 회개해야 한다. “부끄러운 그것이 우리가 청년의 때로부터 우리 조상들의 산업인 양 떼와 소 떼와 아들들과 딸들을 삼켰사온즉 우리는 수치 중에 눕겠고 우리의 치욕이 우리를 덮을 것이니 이는 우리와 우리 조상들이 청년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24-25).”

 

이는,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시 24:1-3)

 

할 때에 우리의 회개는,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4).

 

이에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5-6).

 

그러므로 닫혀 꽉 막힌 담을 헐듯이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7-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