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현. 2026. 4. 9. 06:25

 

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알았거늘 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

호 13:4-6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시 2:7

 

 

새로운 예배 처소를 정리하고 아들을 먼저 들여보낸 뒤 말씀 앞에 앉았다. 감회가 새로운 것은 그때마다 주가 함께 하심으로 순탄하였다. 교회를 이루어가는 일에서나 오늘에 나로 주의 종으로 세우시기까지의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는 앞서 예비하심이 있었고, 필요에 따라서 또한 채워주셨다. 어제도 그에 따른 일과를 보낸 뒤 말씀 앞에 앉아 묵상을 한다. 이른 아침에 올라와 묵상을 하고 말씀을 나누기 위해 낮 시간에도 말씀을 펼친다. 이제 우리는 매일 6시에 아침을 여는 예배로 함께 묵상을 할 것이다.

 

이에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 예수를 떠올리게 한다. 저를 예비하심으로 오늘의 이 모든 일은 창세전에 이미 예정하시고 택정하신 일이다. 여기서 선민 이스라엘의 배은(背恩) 행위가 허망하게 끝날 것을 우리는 말씀으로 안다. 곧이어 하나님의 맹렬하신 심판이 이루어질 것을 성경은 누차 경고하였다. 그럼에도 선민의 대표 지파라 할 수 있는 에브라임이 앞장서서 우상을 숭배하였고 그들이 당할 허망한 결과를 경고하고 있다(1-3). 이는 선민으로서 조상 대대로 지속되어온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배신하는 것이고 이를 망각하고 저버린 저들을 향해 여호와의 심판이 집행될 것을 예언하신다(4-8).

 

이는 여호와를 저버리고 세속을 신봉하던 선민 앞에서 지배 계층이 먼저 그렇듯 허망하여질 것을 경고한 후(9-11), 누적된 불의에 대해 여호와의 심판이 임박하셨음을 깨닫지 못하는 선민의 우매함을 질책하고 징벌하면서 그럼에도 여호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속량을 약속하고 있다(12-16). 곧 이스라엘의 운명은 아침 구름과 같이 해가 뜨면 사라지고 마는 이슬과 광풍에 날려 오는 쭉정이와 굴뚝의 연기로 비유되고 있다.

 

“이러므로 그들은 아침 구름 같으며 쉬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 마당에서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리라(3).”

 

당시는 이스라엘이 융성하였던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기였다. 곧 죄악 위에 세워진 인간의 번영과 강성함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인간이 내세우고 자랑하던 모든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묵상하다, 이번 주일 히브리서 본문으로 설교 준비를 하던 내용과 같이 묵상하게 된다. 곧 선민에 대한 하나님의 인애와 은총이 얼마나 크고 귀한지를 다시 한 번 붙들게 된다. 즉 우리는 모두 본질상 죄인인 것과 그러한 우리와 같이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설명하는 내용에서 다소 의아하다는 생각도 든다. 먼저 오해의 소지도 있어 보인다.

 

가령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히 5:2).” 하는 부분과 “속죄제를…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3).” 하는 부분으로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4).” 하는 내용은 우리 예수님의 신적인 권위를 지극히 인간적인 시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5)” 하는 대목으로도 의아하다.

 

그런 점에서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6)” 하는 부분으로, 그리스도께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보다 더 우월하신 대제사장이심을 논증하기 위해 시편 110편 4절을 인용하여,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시 110:4).

 

한 말씀으로 근거를 삼았다. 이러한 내용을 이번 주일에 나눌 설교로 준비하면서 오늘 시편의 내용으로도 같은 이해가 중복된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2:7).

 

여기서 다시 ‘멜기세덱의 반차를 서열을 따라’ 그러하였다고 하는 부분에서, 멜기세덱 계열은 그 후손이나 후계자가 없다. 따라서 이러한 멜기세덱과 그리스도의 유사성은 그리스도께서 아론의 계통으로 임명되는 제사장들보다 훨씬 더 우월하신 존재임을 논증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은 오로지 ‘제사 직무’를 감당하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은 존재지만 그리스도는 ‘제사장이며,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존재이심으로 훨씬 우월하심을 드러내기 위한 설명이다. 그러면서 또한 우리와 같이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하심으로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몸으로 제한하여 ‘시작과 끝’이 있는 존재로 설명되고 있다.

 

이는 다음 내용을 진행하기 위해서이다. 곧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9)” 하는 것으로 오늘 우리가 살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순복하는 것은 예수님의 순종하심을 따라 사는 것이다. 이는 영원한 구원의 근거가 된다. 이에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10).” 하심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순종하심으로 온전케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다고 진술한다. 곧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랐다는 것은 멜기세덱의 후손으로 대제사장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6), 그리스도께서 율법 하에 있는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과는 다른 <약속의 은혜에 따른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것을 나타낸다.

 

사실 이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11).” 하는데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에 있어 ‘멜기세덱에 관하여’ 뿐 아니라, 성경 모든 내용에 관하여 이를 우리의 지혜로 이해하고 다 알기가 어렵다. 이를 돕기 위하여 ‘성령의 지혜’가 아니면 어렵다는 것인데, 이는 마치 하나님의 삼위 되심을 설명하는 것과 같이 어렵다. 곧 우리가 우리 이해와 상식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하나님’이 한 분이시지만, 그 위격이 다를 뿐 하나요, 한 분이신 하나님으로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그럼에도 이해되고 믿어지는 알 수 없는 우리의 앎이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가리키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이해하게도 한다. 곧 죄인인 우리 사람을 대신 하여 십자가의 제물이 되신 것과 이를 거행하신 제사장직분의 예수는 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에 관하여 일반적인 유대 개념과는 다른 점에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으로서 직분을 어찌 설명해야 할지 난해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곧 우리 성도들의 관심이나 우리가 아는 지식이 너무 부족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에 히브리서는 ‘할 말이 많으나’ 하는 것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의 중요성을 어떻게 설명하여 이해시키기가 어렵다는 것을 밝힌다. 이에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하는데, ‘둔하다’는 것은 ‘듣는 것에 그만큼 무관심한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해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듣는 것이 둔하다’는 것은 9절에서 언급되는 ‘자기를 순종하는 그리스도께 대한 철저한 복종’이 부족한 상태에서 우리가 이를 듣고 이해하기란 그만큼 어렵고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꾸짖는 것도 그 때문이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히 5:12).” 이를 호세아서의 본문으로 이해하면, 이스라엘이 어느 민족보다 하나님의 은총과 인해하심으로 출애굽 하여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 가나안에까지 들어왔는데, 이를 감사하기는커녕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알았거늘 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호 13:5-6).” 하시는 말씀 앞에서 우리도 놀랍다.

 

우리 자신이 오늘도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그래서도 하나님은 오늘 내게 간당간당하게, 딱 그만큼의 부족함으로만 채워주시는 것이 아닐까? 가령 이번 4월 말에 우리는 잔금을 치르고 5월에 예배를 시작하려 했다. 그러나 이렇듯 준비하면서 미룰 수 없어, 나는 주인에게 전화를 하여 보름치 임대료를 먼저 보내고, 돌아오는 주일부터 예배를 시작했으면 한다고 알렸다. 굳이 그럴 거 없다고 하지만 주인 입장에서는 40만원인 것이다. 자진해서 그리한 것은 우리가 교회이고, 우리가 모여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여 우리가 이를 속여 날짜를 며칠 더 몰래 그러는 것은 옳은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서로의 입장이 다른 것이지만, 주인입장에서야 자진해서 그러겠다니까 반색을 하고, 싫을 게 없으니 좋아했다. 나는 여기가 교회인 것과 우리가 모여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싶었다. 그런 가운데 감사하게도 5월 임대료는 본래 유예하여 주기로 하고 6월말부터 임대료를 내면 되었다. 이를 굳이 몰래 그러는 건 아니라고 여겼던 것이 그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저가 배려한 것을 우리가 그의 호의를 권리로 착각하는 것이 옳지 않게 여겨졌다. 마침 딱 그만큼 교회 통장에 여유가 있었기도 하였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 또한 하나님이 그만큼 채우신다.

 

곧 우리가 장성하여 간다는 것은 ‘단단한 음식을 먹는 일’과 같은 것이어서,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 5:13-14).” 하심도 이러한 여건으로 저러한 이유에서도 어떤 어려움으로든지 연단을 받는 것은 또한 선악을 분별하는 힘을 기르는 일이다. 신앙이란 잘 연마된 숙련공의 손길과 같아서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게 아니다. 오늘 이스라엘은 그렇지 못하였고 하나님이 가장 혐오하시는 우상을 승배하여 조상 대대로 이어온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세속적인 통치 체제를 신봉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저들이 영적으로 우매하고 거듭 범죄 하는 일을 향해 심판을 집행할 수밖에 없다. 이 암울한 내용은 하나님의 택한 자들로 스올에서 건지신 주의 자녀들로 비통함을 느낀다.

 

저들의 그러한 결과는 결국 교만 때문이다.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 과부의 지계를 정하시느니라(잠 15:25).” 또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16:18).” 또한 저들의 적당함이 저들로 안이하게 하는 이유가 된 것을 오늘 본문으로도 알 수 있다. “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호 13:6).” 다시 말해 배가 부르니까 헛된 꿈을 꾸고, 그와 같은 꿈은 예수를 인정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인애와 은총을 저버리게 하였다. 이에 예수님도 자기를 높이는 자는 오히려 낮아질 것이라고 하셨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이러한 말씀 뒤에 우리의 가까운 장래에 있을 시련을 예고하셨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24:5-6).” 곧 오늘 우리의 현실이면서 동시에 주의 뜻을 바라게 하는 원동이 된다. 결국 말씀은 예수의 겸손과 그 비하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게 되고, 이를 기리며 본받으라고 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6-11).”

 

이는 교만이 욕을 부르기 때문이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1: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4).” 비록 나에게 허락하시는 이 작은 교회에서 남들이 보면 보잘것없는 처지의 형편이고 별로 성과도 없는 듯하나 주님은 바로 그 한 영혼을 위해 오늘 우리로 교회를 이루게 하시고, 예배가 드려지게 하시는 것이다. 이를 이루어 가게 하시려고 매순간 주가 도우시는 것이다. 이를 나는 가구를 배송하고 조립해주는 기사 분에게서도 느꼈다. 저는 이것이 교회인가 물었고, 목사님인가 다시 물었고, 자신과 아내도 교회를 다니고 더욱이 아내분이 신앙상담을 공부한다고 하였다. 이런 대화가 일상적일 리 없다.

 

하여 오늘도 시편으로 기도하며 찬송하기를,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시 2:1-3).

 

현실은 물질로 건강으로 마음의 여러 어려움으로 벽에 부딪치고 힘들 때도 있지만,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4-6).

 

하여 오늘도 예수를 나의 구주로 부르며,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7-8).

 

하여 오늘도,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11-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