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하현. 2026. 4. 6. 06:14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

호 10:1-2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시 149:4-5

 

 

호세아의 아홉 편의 예언 가운데 여섯 번째 예언이다. 이스라엘이 총체적으로 타락하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현재 그들의 죄의 양상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부패하여 그에 따른 심판을 경고한다(1-4). 이는 이스라엘이 섬기던 금송아지로 인해 심판이 전 계층에게 절망과 공포를 주어졌다(5-8). 이 심판이 유예되고 있는 가운데도 악행을 그치지 않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노예가 될 것을 경고한다(9-11). 그러면서도 각 개인을 향하여 회개를 권한다(12). 사람의 방법과 힘을 의지하여 불의를 저지르는 자에게는 멸망이 있을 것을 경고한다(13-15).

 

이러한 예언은 표면적으로 일관성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의 주제는 회개다. 돌이켜 주께 돌아오라는 것이다. 이를 투박한 어조로 담아 하나님의 답답한 심정을 투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이 가치관을 상실하고 총체적으로 타락한 현실이 오늘의 일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계속되어져 왔음을 지적하신다. 그럼에도 도무지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것을 개탄스러워하신다. 아울러 이러한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선민의 회개를 간절히 바라고 계신 것이다.

 

오늘 우리의 여러 상황은 복잡하고 뒤섞인 듯하나 하나다. 그로 인하여 주를 바라며 더욱 주를 가까이 하게 하신다. 이를 위하여 회개를 하게 하심으로 돌이켜 나의 허물과 죄를 고하게 하신다. 선지자 호세아는 이러한 하나님의 심경을 동족을 향한 답답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투영하여 알린다. 특히 북이스라엘은 건국 이래 최고의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고, 당시 남유다를 제외하면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모든 영토를 회복하고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시절이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풍요는 저들로 타락하여 여호와 하나님 앞에 더욱 더 타락하게 하였다.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1).” 여기서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는 그만큼 ‘그가 자기를 위하여 열매를 쌓아 놓을 것이라.’는 의미로 ‘그가 자기를 위하여 열매를 맺다.’는 뜻이다. 곧 ‘무성한’ 가운데 있으면서 텅비고, 약탈하고, 넓게 퍼진 ‘무성함’으로 저들은 타락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풍성하였던 이스라엘을 묘사하며, 하나님의 축복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 풍요로운 은혜 가운데 정착했었음을 알게 한다. 이에 시인은 노래하길,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시 80:8-12).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경홀히 여길 때, 이를 온전히 받지 못하면 오히려 복을 저주로 만든다. 은혜를 심판으로 받는 셈이 된다. 하여 예레미야는 주의 음성을 전하여,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렘 2:21).” 하고 물었다. 이를 에스겔 선지자도 지적하며, “네 피의 어머니는 물 가에 심겨진 포도나무 같아서 물이 많으므로 열매가 많고 가지가 무성하며 그 가지들은 강하여 권세 잡은 자의 규가 될 만한데… 이제는 광야, 메마르고 가물이 든 땅에 심어진 바 되고 불이 그 가지 중 하나에서부터 나와 그 열매를 태우니 권세 잡은 자의 규가 될 만한 강한 가지가 없도다 하라 이것이 애가라 후에도 애가가 되리라(겔 19:10-14).”

 

곧 우리의 슬픔은 진정 슬픔을 온전히 받아내지 못할 때이다. 주의 은혜를 은혜로 귀히 받지 못할 때와 같다. 축복의 은총으로 자만하고 슬픔의 노래에서 세상으로 의지하려 하는 게 죄의 속성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1b).” 하는 말씀이 그것이다. 은혜를 우상 숭배를 자행하는 일에 사용하여 사신(邪神)을 아름답게 장식한 뿐이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2:8).” 이런 현상은 유다 왕국의 말기에도 동일하게 나타났다(겔 16:15-29).

 

우리는 어쩌면 은혜로 죄를 일삼고 심판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둔감한 영혼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차라리 없이 살고 가난하였던 시절에는 그래도 주 앞에 엎드리던 시절이다. 이번에 나는 아버지의 일생을 돌아보며, 어릴 적 아버지의 목회 현장을 떠올리며 자주 회생하곤 한다. 아침에 묵상글을 쓰고 산책을 한다. 멀리까지 아파트 단지를 끼고 돌면서 하루가 다르게 봄이 깊어 가는 것을 보다 그렇듯 생각도 깊어지곤 한다. 사택이 없어 가건물로 세든 교회 옥상에 집을 짓고 살던 때가 여러 번인데, 나의 부모는 항상 교회에 내려가서 기도하다 잠들었다. 그럴 때면 꼭 그때마다 같이 올라와 교회를 지키며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었다. 특히 나의 어머니는 거의 대부분 교회 바닥에서 기도하다 잠드셨다.

 

당시 그 시절은 가난이 보편적이라 서로가 흉이 될 게 없었다. 형편이 괜찮은 성도들 가운데 몇몇이 그 속을 알 수 없는 어려움을 안고서 같이 교회에 나와 엎드리곤 했다. 그러다 보니 어릴 적 내 기억에는 밤마다 교회에 모이는 성도들이 여럿이었다. 나이든 권사님들부터 젊은 새댁이며 고등학생이던 형, 누나들까지… 특히 여름방학을 전후해서는 교회가 거의 숙식제공을 하는 공동체가 되었다. 그때는 밤마다 그렇게 라면을 많이 끓여 먹었고, 늦은 밤까지 이런저런 이야기 꽃이 피었는데 당시 나는 저들 속에서 듣는 성경 이야기나 자기들 삶의 우여곡절이 재미있기도 했다. 그러던 이들이 대체로 주의 길을 갔고 신앙의 정도도 깊었다.

 

어떠하든지 사람마다 다르고 환경에 따른 이유도 있겠지만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 하는 오늘 본문의 내용이 속상하게 다가온다.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2).” 어쩌다 저들은 주의 축복으로 우상을 섬기며 두 마음을 품은 것일까? 이스라엘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음을 엿보며 우리도 시시탐탐 그러하다는 사실에 탄식한다. 나의 유년시절, 부친의 목회는 거침이 없었고 그것으로 전세대가 모두 교회를 중심으로 필사적이었다. 부활절이 되면 며칠씩 밤을 새며 고난주간을 함께 했고, 성탄절이면 또 주변 공사장에서 합판을 주워와 무대를 꾸미고 성극을 했다. 보름에서 한 달 가까이 이어지던 그러한 합숙은 전교인에게 고루 영향을 끼쳐서 어떤 이는 간식을 가져다주고, 어떤 이는 장작더미를, 옷꾸러미를 가져다놓곤 했다.

 

결국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서 떠나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상태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스라엘이 마음으로 거짓되고 기만적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현실에서도 여전하여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가 가장 부흥하고 성도들도 결집하여 하나가 되는가 하면, 그런 가운데 또 돌출행동으로 물을 흐리는 이들도 있었다. 극단적으로는 성전을 건축하기로 하고 가장 열심이고 덕망 있는 집사로, 저가 또 건축 쪽 일을 하고 있어서 맡긴 것인데…. 그렇듯 살만해질 때 혹은 어려움이 닥쳤을 때 내남없이 그런 이들은 교회를 등지고 떠났다. 더러는 다른 교회로 옮겨가서 서로가 어색한 사이로 살고 있기도 하다.

 

다, 그런 것이려니….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이나 오늘 우리의 현실이나 다를 게 없다. 역사는 되풀이 되듯 사람의 죄악은 일정한 패러다임이 있어 주기적으로 도는 듯하다. 이에 ‘하나님이 …헐으시리라.’ 하는 말씀은 이미 모세 오경에서도 경고한 바 있다. “내가 너희의 산당들을 헐며 너희의 분향단들을 부수고 너희의 시체들을 부숴진 우상들 위에 던지고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할 것이며… 내가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레 26:30-33).”

 

나는 요즘 문득씩 시선을 놓고 기억 속에 잠긴다. 그럴 때면 누구에게 전화를 해서 통화라도 하고 싶은데 또한 그런들… 말이 생각을 먹어버리는 형국이고, 상대의 말을 받아내야 하는 일이 더 어려워서 그만둔다. 생각은 혼자서 끝 간 데 없이 가닿아 어릴 적, 아주 까마득하게 어리던 때부터 학창시절, 가정을 꾸려 살던 시절… 그때마다 나의 부친의 목회 현장에 같이 있었던 게 새삼 큰 복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어떨 땐 그 시절이 너무 싫었고, 부친의 목회 현장이 벗어나야 할 것처럼 무겁기도 했는데… 노년에 이르러 아버지는 은퇴 후에 뒤늦게 컴퓨터 자판으로 글쓰기를 익혀 말씀에 대한 열정으로 성경을 썼다. 이를 단순하게 자식들 목회에 도움이 되려 강해집을 쓰기로 하신 것이다.

 

요즘은 갈리디아서를 쓴다, 에베소서를 쓴다, 하실 때마다 성령이 주시는 지혜가 얼마나 귀한지를 설명하려 했고, 말씀을 열어 더듬더듬 자판을 찍어가며 글을 쓸 때 오는 감격으로 찬송했다… 그렇게 창세기, 로마서, 아가서, 에베소서를 끝내고 그때마다 설교원고에 참고하라며 보내주시곤 했다. 오죽하니 형제들과 이야기 나눌 때면 노년에 은퇴 후에도 그처럼 말씀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고 살아온 날들이 귀하고 존경스럽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의 ‘우상’을 깨뜨리고 하나님만을 의뢰하게 하는 강한 의지를 놓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헛된 말을 내며’ 스스로를 높여 ‘언약을 세우니’ 이는 다 하나님께 헛된 자랑이 된다. 거짓된 말과 맹세다. 일상에서 헛된 말은 결국 하나님을 등지게 하고 자신을 높이는 데 급급해진다.

 

그리하여 “사마리아 주민이 벧아웬의 송아지로 말미암아 두려워할 것이라 그 백성이 슬퍼하며 그것을 기뻐하던 제사장들도 슬퍼하리니 이는 그의 영광이 떠나감이며(5).” 할 때 ‘벧아웬의 송아지’는 중의어로 ‘벧’은 ‘베이트’라 하여 ‘집’을 뜻하고, ‘아웬’은 ‘사악함’, ‘헛됨’, ‘우상’을 뜻한다. 곧 ‘사악함의 집’을 짓고 ‘우상의 집’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할 것이라’ 하신다. 이 지역은 실제 지리적으로 ‘벧엘’의 남동쪽에 위치해 있다. 즉 본문은 ‘벧엘’을 가리키는 말로 ‘벧아웬’이라 부른 이유는 ‘벧엘’이 ‘하나님의 집’이란 뜻인데, 이를 타락시켜 ‘우상의 집’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하나님의 집, 벧엘에 우상이 세워지고,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왕상 12:28-29).” 이렇듯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곳이 ‘우상의 숭배지’가 되었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암 4:4, 5:5).”

 

오늘 우리는 어떠한지? 일상에서도 그렇고 신앙 가운데서도 그렇고, 과연 우리의 ‘벧엘’은 온전한가? 설마 하나님을 대신하는 ‘송아지’가 세워져 있지는 않은지? 불명확한 일반성을 붙들고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여념이 없는 것은 아닌지? 곧 하나님을 거부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로 교묘하게 자신을 합리화하며 말씀을 등한히 여기고는 하지 않는지? 곧 우리 안에 ‘아웬의 산당’ 즉 ‘벧아웬’을 두고 여전히 스스로는 ‘벧엘’이라 일컬으며 그릇된 신앙으로 자기만족에 겨워 살고 있지는 않은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느니라(잠 19:23).”

 

스스로는 판단할 수 있다. 왜냐하면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19).” 하시는 말씀 앞에서 오늘을 돌아보며 경계한다. 우리가 주를 믿는 믿음은 진리를 생명처럼 지키는 일이겠다. 돌아보면 나의 부친은 그러므로 그 생이 전투적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8:16-17).”

 

하여,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시 15:2-4).

 

그리하여 말씀을 더 의지하고 주 앞에 나의 전부를 맡기는 일일 테니,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149:1).

 

믿는 자들과 믿음을 같이 하며 성전을 중심으로 서로 하나 되는 것에 힘쓰는 게 복이었다. 이는 가난했던 시절, 한때의 추억이 아니라 오늘도 여전하여서 나는 이제 나의 남은 목회 여정을 '작지만 큰 교회'로 ‘뜻을 정하여’ 말씀을 나누는 예배가 있고, 슬픔을 나누는 영적 상담이 있고, 서로의 기도가 크게 합하는 합심(合心)으로 전심(全心)을 다해 이루는 교회를 소망한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4-5).

 

하여,

 

기록한 판결대로 그들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의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

(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