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호 11:1-3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시 150:1-2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받은 민족이 있을까? 그럼에도 출애굽 이후 하나님의 사랑과 이스라엘의 배반은 비례하였다(1-4). 그러한 배은(背恩) 행위로 이방 세력에 의해 멸망당하며 복속될 것을 경고한다(5-7).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한 번 택하심으로 선민을 향한 사랑이 불변하여 저들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신다(8-11).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택하시고, 종노릇하던 애굽에서 건지시고, 그들을 지속적으로 사랑하셨지만 이스라엘은 늘 하나님을 배신하였고, 계속하여서 세상에 속한 악을 의지하여 왔다. 그러므로 멸망당함이 당연하며 필연적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놀라운 것이다.
이를 보면 항상 나의 이야기가 된다. 죽어 마땅하였을 죄인이고, 실제 나의 과거를 돌아볼 때 용서하심을 받는 게 오히려 송구할 따름이라, 오늘 여기 이스라엘을 향하신 사랑이 참으로 크고 놀랍다. 하나님은 그때마다 징계하심으로 무조건적으로 은혜를 베풀어서 다시 선민으로 회복시키셨다. 저들로 하여금 정죄함을 받아 멸망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여호와 하나님은 한 번 택한 자에 대해 끝까지 신실함을 버리지 않으셨다. 바로 그 절대적인 사랑을 오늘 본문은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이나 가나안 생활의 본말은 우상숭배와 주변국으로의 복속이었다. 그때마다 신실한 하나님의 사랑을 버렸고, 여호와를 향하여 끊임없이 배신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부각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만큼 더 크고 놀라우신 까닭이다. 하여 오늘 본문은 서정적인 표현으로 접근하여 이를 살핀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1).” 곧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이라 이스라엘을 지칭하신다. 그와 같이 그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곧 악의 구렁텅이 세상으로부터 돌이켜 주의 자녀로 삼으신 오늘 우리를 향하신 표현이다. 곧 ‘내 아들’로 호칭하여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이 어떠한지를 함축한다. 이는 곧 아들의 모든 허물을 덮어주시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폭시키는 표현이다. 이에 마태복음에서 본문 1절을 인용하여,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마 2:14-15).” 하고 증거한 바 있다.
곧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속의 죽음으로 성취되는 구속사의 대사건이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루어져 이미 구약 시대부터 면밀하게 계획되었다는 사실을 근거한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배신 행위는 인간의 전적 타락에 의한 것이다. 처음 사람 아담 이후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며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한 번 택하신 선민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에 의해 회복되었고, 그러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총으로 오늘 우리로도 성도라 하심이고, 주의 자녀로 삼으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본문의 증거는 구약 선민 이스라엘에 대해서 뿐 아니라, 신약의 선민인 우리들 곧 성도에게 향하신 사랑도 동일하심을 알게 한다.
이를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하고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신 것이다. 이를 나는 앞서 호세아의 자녀들, 곧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호 2:1).” 하심으로 이해하였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암미’는 ‘나의 백성’이라 하고, 자매에게 ‘루하마’는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하신 것이다. 곧 호세아는 온 몸으로 주의 사역을 감당한 선지자이다. 저는 음녀 고멜과 결혼하라 하심으로 결혼하였고, 그녀에게서 자녀들을 두어 이러한 대반전을 이룬 것이다. 곧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대표하는 암미와 루하마이다.
본래 저들은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하신 데 따른 것으로 “고멜이 또 임신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고멜이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1:6, 8-9).” 하셨다. 곧 ‘이 나라가 행음함이니라.’ 하여 모두가 그러했던 것을 알리고, ‘이 나라’는 크게 행음하고 음란한 아내로 상징되었다. 그렇듯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게 하셨던 곳이다(3). ‘디블라임’은 본래 ‘무화과 떡’을 뜻하는 것으로, 이것은 3장 1절에서 ‘우상에게 바치는 떡’으로 지칭되어 ‘호색과 쾌락’을 상징하였다.
그러했던 자들에게서 ‘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호세아가 음탕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취하여 호세아의 자식을 낳았으니 그는 이름하여 ‘이스르엘’이었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1:4).” ‘이스르엘’은 ‘하나님께서 흩으신다’는 뜻으로 이스라엘의 멸망을 암시하는 거였다. 여기서 ‘이스르엘’이라는 명칭은 예후가 아합의 집을 대량으로 학살한 장소를 염두에 둔 표현이기도 하다(왕하 9, 10장). 그런 가운데 딸을 낳으매 저를 ‘로루하마’라 하여, ‘은총을 입지 못하다’는 뜻으로 ‘동정을 받지 못하다’는 의미다. 곧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 더 이상 애정어린 긍휼을 받지 못할 것임을 나타낸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시 103:13).
그리하여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하신 말씀과 함께 우리 부친의 생애를 조명할 때도 이와 같은 말씀으로 이해하고 감격하였다. 우리 조상은 대대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토속신앙의 가계(家系)을 이으며 계통발생을 이뤄왔다. 어릴 적 나의 조부가 살아있을 때면 강원도 평창 논론리의 우리 문중은 첩첩의 제사와 온갖 귀신 밥을 집안 곳곳에 두고 살았다. 뒷간에 앉아 하얀 쌀밥 위에 숟가락이 꽂혀 있는 것이 어린 나의 눈에도 신기하고 미련하게 여겨졌던 기억이 난다.
그런 가계를 깨고 나의 부친은 마을 예배당에서 열린 작은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예수를 영접하였고, 그 복음의 씨앗은 이어져 내려오던 모든 계통의 악의 연장을 끊어냈다. 두 형제분들도 뒤늦게 돌이켜 온 가족들이 지금은 예수를 믿는 일가(一家)를 이뤘고, 더욱 우리 가족은 우리 자녀들 모두 주의 사역의 길을 가는 은총의 반열에 올랐다. ‘내가 다시는, 사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하신 주의 징계가 그때마다 주의 불가항력적인 은총으로 주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곧 오늘의 이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크고 귀한지, 은혜롭고 자애로운 것인지, 우린 사실 이해할 수 없다. 왜 하필 나 같은 자를 사랑하시는지, 왜 굳이 나 같은 자로 주의 종을 삼으시고 교회를 이루게 하시는지… 난 알 길 없도다.
그렇게 어제는 다시 교회 이전신고를 하여 ‘고유번호증’을 새로 교부받았다. 오늘은 앞서 잔금을 보내고 물건을 들여서 오는 주일부터는 새로운 처소에서 예배를 드릴 생각이다. 이번 결정과 이 일의 진행에 있어서는 아들의 속전속결이 큰 힘이 되었다. 어제도 세무서에 가는데 나는 엉거주춤하며 특유의 우유부단함으로 망설이고 있을 때 아들이 서류를 다 챙겼는지 확인하고 직접 운전을 해서 나를 데려갔다. 이어 부동산에 연락하여 이 달 말에 잔금을 치르기로 한 것을 앞서 입금하고, 교회 기물을 서둘러 들여놓기로 하였다. 교회 간판과 앞쪽 썬팅, 도어락 등을 아들은 단번에 약속을 잡고 이를 추진하였다. 나는 그저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듯 주가 이끄시는 대로 순종할 따름이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구원하셨다! 저들의 출애굽은 전적인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뤄진 일이다. 저들이 자력으로 출애굽을 감행하여 애굽을 상대한 게 아니다.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총은 나의 부친을 그렇듯 몰아가셨고, 당연히 집안 어른들이나 문중 어른들의 박해가 말할 수 없이 심했다. 그럼에도 한 번 떨어진 복음의 씨앗은 거침없이 마른 땅을 뚫고 새싹을 틔우며 오늘에 이 복음의 역군들을 길러냈다. 어머니는 생각보다 강건하여 동생과 누이 집에서 굳건하게 잘 버티며 중심을 잡아주고 있고, 우리는 부친의 마지막을 정리하느라 분주한데도 다들 또한 맡기신 사역과 사명을 잘들 감당하고 있었다.
가끔은, 가끔씩 시선을 놓치면 나는 울컥, 하여 다다음주에 있을 딸애의 결혼으로 더 슬픔이 밀려와 가슴이 아프고, 하필 부친의 옷이 대부분 내게 다 맞아서 바지며 남방을 입다가 또 울컥, 하기도 한다. 이처럼 감정은 저 혼자 요동치기 일쑤지만 그런 가운데 교회 이전과 아이 결혼으로 바쁘고 분주하여 또한 견딜만하다. 부친이 손녀의 결혼에서 축도하기로 한 것을 매형에게 부탁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우리는 애써 슬픔을 기쁨으로 서러움을 찬송으로 받아내는데, 그러한 힘을 더하시는 데서 가능하다.
그렇듯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사랑은,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 4:22).” 하여 우리로 당당히 맞서 싸우게 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지극히 영광된 칭호이다. 어느 열방 중에 이처럼 영광스런 존재로 택하심을 입은 ‘나라’는 없다. 그리하여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 들어가 왕 노릇하며,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 또한 앞서 들어간 부친의 걸음으로 우리는 확신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동안 아프면 아픈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물론 우리가 주 앞에 구하는 것은 이를 낫고자 하는 것이나 동시에 그와 같은 간구는 ‘그럼에도 주의 뜻을 바라게 한다.’ 하여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이는 나의 부친이 일생을 붙들려 살았던 말씀이다. 곧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4).” 하는 말씀을 받았다.
일가를 이뤄 사업으로 성공하려 했으나 이를 엎어뜨리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죽기를 간구할 때에 주가 주신 말씀으로 나의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아 뽑지 못하게 하신 말씀이다. 곧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 그리하여 이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6).” 하심을 깨닫고 더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달려갔다.
우리 곁에 너무 많은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사는 문화가 공존한다. ‘아로새긴 우상’이 믿는 자의 마음도 유혹하여 예쁘고 좋은 것, 자신들의 기호로 삼아 살게 한다. 그러다 보니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호 11:3).” 하는 말씀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율법과 말씀으로 지도하시며, 사랑의 손길로 보호하시고 출애굽하여 광야를 인도하신 것을 묵상하게 한다. 하여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4).” 여기서 ‘사람의 줄’은 말이나 노새, 짐승을 제어하여 끄는 줄과 반대되는 말로 ‘사랑과 은혜로 이끄는 줄’이라는 뜻을 암시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시 32:9).
그리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오늘 우리는 더 이상 죄책과 죄의식으로 끌려다니지 않아도 된다. 여기서 ‘벗기는 자’는 지웠던 멍에를 느슨하도록 뒤로 들어 올리는 것을 뜻하며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제하기 위해 매어 놓은 멍에를 풀어 가볍게 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우리는 먹고 사느라, 죽기 살기로 사는 세상 사람들의 멍에에서 벗어났다. 이에 주의 긍휼하심으로 오늘을 산다. ‘긍휼’이란 <라함>으로, ‘부모가 자식에 대해 또는 형이 동생에 대해 가지는 애정의 뜻’을 함축한다. 또 하나는 <니훔>이라 하여 <나함>의 뜻과 같이 ‘숨쉬다’, ‘동정하다’, ‘위로하다’에서 유래되어 ‘위안’, ‘위로’의 뜻을 내포한다. 이를 헨리 나우웬은 ‘여호와의 자궁’이라 하여 그만큼 은밀하고 확실하게 보호하심을 긍휼이라 하였다.
이에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9).” 하시는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더욱 확신한다. 하나님께는 거짓이나 변개(變改)가 없으시다. 한 번 택하시고 목적하신 바를 끝까지 이루시는 분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애굽에서 인도하시고 구원하셨으므로 끝까지 멸망치 않게 보호하실 것임을 보여준다. 곧 ‘나는 거룩한 자니’ 하심으로 이 약속의 보증으로 스스로를 두신다. 이에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10-11).”
이를 ‘사자처럼 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사자는 짐승 중 가장 강한 존재이다. 짓밟힌 이스라엘을 되찾아 구원하시기에 능력이 충분하시다. 이를 ‘서편에서부터’ 곧 ‘바다로부터’ 이루신다. 흔히 이스라엘인에게 서쪽을 지칭하여, ‘서편’은 ‘애굽’을 가리키는데, 후일엔 애굽이 위치한 남쪽, 앗수르가 위치한 동쪽, 팔레스틴의 사방 지역을 두루 점령하실 것을 나타낸다. 저들이 ‘떨며 오되’ 이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떨게 될 것’을 의미한다. 이때는 ‘새같이, 비둘기같이’ 신속히 날아오듯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빠르게 돌아올 것을 비유한다. 이에 오늘도,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시 150:1-2).
오늘도 주어진 한 날을 맞이하며,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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