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스크랩] 방울토마토

전봉석 2006. 8. 6. 18:48
방울토마토


빈 화분이 네 개다. 겨우내 시들하니 말라죽은 소철과 철쭉 그리고
이름도 없는 동양란 두 그루를 올 봄에 비워낸 거다. 그래도 멀쩡한
화분까지 버리기 아까워 방울토마토 네 그루를 사다 심었다.
들쭉날쭉 볼품도 없어, 분갈이를 하며 글방 앞 양지바른 곳에
내놓았다. 푸른 기운이 도니 살았구나 하지, 게 어디 제 구실이나
하려나 싶을 정도다. 하니, 누가 집어가도 아까울 것 없다는 마음에서
그저 데면데면한 것이 사실이다. 선물로 받은 서양란이니, 숯에 틔운
선인장이니 하는 것 따위는 때가 되면 들였다 냈다 하며 애면글면
하지만, 방울토마토 네 그루는 그저 소원하니 대수롭잖다.
것도, 자라는 꼬락서니하고는! 큰대 자를 거꾸로 박아놓은 듯
양옆으로 길쭉하니 퍼지는가 하면, 노란 꽃이 피었네 싶다가도 금세
시들하니 말라비틀어지고, 키는 또 멀 대처럼 자라 서로 등을 대고
서 있기조차 버거워 보인다.
것도 생명이라고, 어디서 나뭇가지를 주워 다 받침 목을 세워주고,
본래의 줄기가 아닌 새로 나는 줄기는 일일이 잘라주어야 하고….
이래저래 성가시다.


며칠째 나는 말을 아끼고 있다. 그것은 행동을 줄이고, 생각을
늘이기 위해서다. 그래서 오해를 사거나 엉뚱한 핀잔을 듣기도 한다.
퉁명스레 말을 끊는다는 것이 왜 안 그럴까만. 일체의 전화도, 안부도
미루는 까닭이다. 가뜩이나, 월드컵 열기로 한반도 전체가 온통
들썩이고 있는 판국에 이 무슨 해괴망측한 짓거린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얼마 전부터 나를 억압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이상해졌다.

여기서 '이렇게'란,
① 목적도 없이 하루를 사는 것; 그저 판에 박힌 듯 일정하게
되풀이되는 생활로 무감각하게 시간을 버는 일. 아닌 것 같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하루가 그런 것처럼, 습관의 지배를 받는 일.
되풀이되는 것으로 익숙한 생활 반경과 달콤한 무의식의 반복이
요구하는 일.
어제와 같은 오늘로 그래서 편한, 죽음으로의 길.
'이건 아닌데' 하는 자각이 있으면서도 결코 놓치기 싫은 달콤한
반복과 습관…. 그로 인해 나의 영혼은 무기력하고, 할 일 잃은
영혼은 박제된 짐승의 위엄과 다를 게 없다.

② 좀더 편한 생활을 꿈꾸는 것; 충분하면서도 늘 빈곤함을 느끼게
하는 현대 사회의 생활 지수는 만족과 기쁨을 빼앗아간다. 결핍을
생산하여 소비를 안기는 이 구조는 마치 거머리 같다. 결코
만족함이란 없다. 감사를 잃은 삶은 빈곤의 연속이다.

③ 내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것; 어쩌면 나는 늘 이 문제 앞에서
질식한다. 나의 아버지, 내 어릴 적 나의 삶의 지표가 되어주었던
어른. 그런데 과연 나는, 내 아이에게 어떤 아버지의 위상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하는 문제 앞에서는 가슴이 서늘해진다.

(중략)

나를 버리기로 했다.
하나하나 버리기로 한다. 할 수만 있으면… 나를 지배하는 '나'를
모두 비워내기로 한다. 생각이 아닌, 행동으로. 구체적인 실험을
시도한다.

우선, 담배부터 끓는다. 처음 입에 댄 게 고등학교 2학년 때였으니
사뭇 오래된 습관이긴 하다. 하루 평균 한 갑으로, 때론 누굴
만나기나 하면 두 갑이고 세 갑이고 그 자체로 즐거움이다. 목이
아픈데도 연신 담배를 빼 물고, 심지어 입에 물고 있으면서 나도
모르게 담배를 꺼내는 나는, 애연가다.
그런데, 일주일 됐다. 재떨이와 피우다 남은 담배를 모두
쓰레기봉지에 담으면서 나는 혼자 웃었다. 과연 내가, 나를 이길 수
있을까 하는 비웃음이다.
하루 이틀 지날수록 흔히 말하는 금단증세 같은 게 있는 것 같긴
하다. 꼭 이럴 게 뭐 있어, 싶은 생각이 들면서… 하루에 서너 개비
정도야 뭐 어때…? 하는, 내 안의 무수한 소곤거림은 연거푸 나를
조급하게 한다. 괜히 슬프고, 괜히 심심하다.

입안을 자주 헹구면 흡연욕구가 좀 덜 한 것 같아서, 연신 생수를
마신다. 하긴, 이번에 담배와 함께 끊은 게 또 있다. 바로, 커피다.
하루 평균 예닐곱 잔은 보통으로, 눈뜨면 커피부터 한 잔 마시고 매
식사 때마다 또 한 잔, 거기다 음료수처럼 수시로 사 마시는 캔
커피까지… 간혹 수업 들어가면 가장 흔하게 내오는 커피는 또
어떻고?

글쎄…. 어떤 안 좋은 증세가 느껴져서 뭘 끊으려는 게 아니다.
담배도 그렇고 커피도 그렇고, 나를 버리는 행위 가운데 내게 가장
친밀한 것부터 고른 것이다(술이야 워낙에 안 마시는 축이라 끊고
말고도 없다).
나에게 있어 담배와 커피는 그만큼 상징적이다(이 글을 쓰면서도 몇
번은 놀이터로 나아가 숨고르기를 한다. 못된 버릇 가운데 하나가
글을 쓸 때 더욱 강한 흡연욕구를 느끼는 거다. 하긴 그래서 요
며칠은 일체 누구와 전화도 안부도 묻지 않는다. 누굴 만나면, 아 그
잔인한 유혹을 어쩌랴! 나는 그렇게 강하지 않다는 걸 잘 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연애를 꿈꾸지 않기. 실없는 소설(아,
내가 좋아하는 연애소설!)을 읽지 않기. 오전에는 깊은 묵상의 시간을
갖기 등등…

버려야 할 것과 새로 연습해야 할 것을 노트에 적는다. 적었다 다시
또 적으면서 나는 이렇게 쓴다.

"내가 살아야 하는 길을 새로 쓰자. 아직은 늦지 않았다."


방울토마토가 열렸다. 그제야 알았다. 주체하기 힘들 정도의 무게를
미리 가늠이나 한 것인지, 왜 서로의 어깨를 빌려 돌려대듯 기대어
볼품 없이 엉켜 있었는지… 언제 또 자리를 봐 두었는지, 창가 쪽
모서리 틈새 가만히 줄기를 얹고 서 있는 모습하고는…
주렁주렁 열린 방울토마토가 탐스럽게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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