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
벌써 몇 시간째 이러고 있다. 대회에 나가는 한 아이의 원고 때문에
모처럼 늦게까지 글방에 있던 것이 그만…, 무슨 말이든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안절부절 끔뻑이는 커서만 바라보고 있다.
요즘 나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에 대하여, 그러므로 내가 앓고 있는
나의 <영혼의 몸살>에 대하여…, 어떤 식으로든 정의를 내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뭔가 있는데, 희미한 어떤 무엇이 있긴 한 것
같은데, 도무지 그게 무언지 알 수 없어 답답할 뿐이다.
며칠 전, 안과에 갔다. 녹내장일지 모른다는 의사의 진단이 사뭇
마음에 걸린다. '설마'하는 마음 때문인지 크게 걱정이 되는 건
아니지만, 잦은 두통과 눈의 피로 때문에 마음이 쓰이긴 한다.
가급적이면 컴퓨터를 오래하지 않으려 하고, 책 읽기도 한 시간마다
꼭 몇 분씩은 쉬었다 읽곤 하지만(의사의 처방대로), 어림도 없다.
할 줄 아는 게(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인데, 만약 그것을 못하게
된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우습지만, 그래서 트럼펫을 샀다. 마침 막내 동생이 관악기를 두루
다룰 줄 알고, 학원에서도 아르바이트로 학생들 몇을 지도하고 있는
터라, 덕분에 코넷을 싸게 구입했다.
포켓 트럼펫이라고도 한다는데 이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이 주일이 다 돼 가는데도 여태 변변한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이렇게 쓰다보니, 괜히 꿀꿀한 이야기 같다.). 하지만,
나름대로는 제법 궁리를 한 것이다. 언제부턴가 변변한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해서
말이다(나의 과장된 몽상을 어쩐다?).
안과를 나서면서 제일 먼저 떠올린 사람은, 여수 애양원에 계신 양
장로님이다. 이십 대 후반 갑작스럽게 시력을 잃었던 그는 몇 번이고
자살을 기도하다 결국은 여수 애양원, 나환자촌에 정착했다.
"시력을 잃고 비로소 보았다."는 그의 간증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삼 개월 간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가느다란 대나무 지팡이를 의지하고 각
병실을 돌며 성경을 가르치던 그는 다른 누구보다 내게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꼭 마지막으로 들른 나에게서는 몇 시간씩 앉았다
가곤 하면서, 내가 읽어 내려가는 성경을 귀담아 듣곤 하였다(물론
당신의 개인적인 간증도 종종 들려주면서).
처음에는 앞을 볼 수 없는 그였기 때문에 나에게 대신 성경을
읽어달라는 것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몇 번, 잘못 읽거나 혹은
빠뜨리고 넘어가는 구절이 있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짚어내고, 때로는
당신이 연거푸 소리내어 대신 암송하곤 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안 일이지만, 그는 신구약 성경
66권을 모두 다 외우고 있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부러 한 절씩
띄어 겅중겅중 읽기도 하였는데, 그럴 때면 그는 피식 웃으며 빠뜨린
부분을 대신 되뇌듯 암송하곤 하였다.
병원에 있을 동안 두 주에 한번 정도 아버지가 다녀가시곤 하였다.
마침 애양원 교회 목사님은 외국에 나가 계셨던 터다. 아버지는 오실
때마다 빈 강단에 대신 서곤 하셨다. 그럴 때면 구약성서에 있는
「아가서」를 강해하셨던 모양이다.
저들에게 그만큼 강한 인상을 남겼던 때문인지, '사랑의 종'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걸 종종 들은 기억이 있다.
일 년에 한번 꼴로 나는 진찰을 받기 위해 여수까지 내려가야 했다.
하지만 중 3이 되면서부터는 그것도 귀찮아 발길을 끊었다. 그러다
문득 대학 입학을 앞두고 애양원이 그리웠다. 그래서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밤 기차를 탔다. 그리고 새벽녘이 되어 그곳에 도착했다.
진료 시간까지는 제법 이른 시각이었다. 나는 무심히 교회로
올라갔다. 마침 그곳엔 노인 몇 분이 모여 기도회를 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양 장로님도 계셨다. 나는 가만히 예배당 구석에 가 앉았다.
저들의 외모는 적잖이 낯선 모습이다. 나환우의 외모는 그래서
묘사와 동시에 일그러진다. 아무렇게나 주물렀다가 내려놓은
찰흙처럼, 기이하고 서글프다. 동그마니 모여 앉아 중얼중얼 읊조리는
저들의 기도소리 또한 구슬프게 은은하다.
그런데, 불쑥 저들 사이에서 내 이름이 튀어나왔다.
"주께서 전봉석 군을 기억하시고, 늘 그를 주관하여 주옵소서"
순간, 나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저들은 여태껏 매일 새벽이면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였던 것이고, 그 안에 내가 있었던 것이다. 아,
그때의 그 발작적인 감격이라니!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손등 위에 떨어지는 걸
보면서도 내가 왜 우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조용히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미안함 때문이었다. 아니 고마움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바닷가로 갔고, 가까운
여인숙에 들었다. 그리고 한나절을 꼬박 잠에 빠져있었다.
이야기가 두서 없긴 하지만, '그 해 겨울은 따뜻했다.'
'소녀'를 다시 만난 것도 그 해였고(소녀에 대한 회상은 생략하기로
한다. 여기저기 나의 글에서 군더더기처럼 나타나고 있고, 자못
엉뚱한 그리움에 빠질 것 같아서다.), 이처럼 내 이름이 불려진 것도
그 해였다(미숙한 표현력 때문에 그때의 진한 감동이 희석된 것
같지만, 까맣게 잊고 있던 누군가의 기도 속에서 여전히 내가
불려지고 있었다는 것의 감격을 바르게 전달하였는지 모르겠다.).
느지막이 일어난 나는 여인숙에 딸린 식당에서 설렁탕으로 하루의
끼니를 대신했다. 그리고 다음 날, 양 장로님을 찾아가 뵈었는지…,
병원에서 어떤 진료를 받기는 한 것인지…. 하루 이틀을 더 머물다
돌아온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이 없다.
'과장된 나의 몽상'이라고 밝혔듯이, 별 것 아닌 것을 부풀려
생각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안구 건조가 심하면 더러 그럴 수
있는 두통과 눈의 통증을 두고 호들갑을 떠는 것이리라.
그러나 며칠째 나는 『소명(The Call)』(오스 거니스, IVP)을 읽고
있다. 너무 진지하고 그래서 단숨에 읽기 아까워 야금야금 읽는다.
'부르심', 부르심에 따른 응답!
얼마 전부터 나를 옥죄는 답답증이 바로 이것이었다, 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나에게 일고 있는 이 작은 변화의 몸짓이 거센
풍랑으로 돌변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저자는 『소명』에서 말하길, "'나의 길이 아닌 것'에서 해방되어
나의 소명을 발견하면서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p15)라고 고백하고 있다. 또한 그는, "우리는 우리가 향해
가고 있는 집을 안다."고 하면서, 그러므로 "우리는 방랑자가 아니라
여행자이다."(p179) 라고 강조한다.
인생 자체에 대해 가장 적합한 은유는 여행일 것이다.
어쨌든 나는 요즘 내 안에 일고 있는 작은 운동을 주목하고 있다.
그것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어디로 몰고 갈지는 모른다.
누구보다 의지력이 약하고, 자신의 생각을 이겨낼 힘이 없는
사람임은 안다. 아울러 완벽주의자는 더더욱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끊어보는 이유 또한, 스스로 그럴 수
있는가 하는 걸 실험하는 것뿐인데, 어림도 없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스리려 하고, 그만큼 하루가 진지해지는 건 사뭇 느낄 수 있지만….
나에 대한 부름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의 삶으로 바뀔지는 모르지만
무엇을 염두에 두고(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소명에 따른 응답으로
목회를 가늠할 것이지만) 변화를 의도하고 싶지는 않다.
만일 뚜렷한 결과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내가 속한 생활에서
그러므로 나의 나된 것에 감사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바른 소명이
아닐까?
여름방학 동안에는 동네 꼬마녀석들에게 글방을 개방할 생각이다.
출처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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