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스크랩] 마음의 병(病)

전봉석 2006. 8. 6. 18:48
마음의 병(病)


벌써 며칠째 날이 건조하다. 그만큼 화창한 날씨여서 싫지는 않다.
그래서 눈두덩이 주위가 뻐근하다. 눈물을 넣는 횟수가 잦아지고,
간헐적으로 두통도 이어진다.
이는 언제부터 내가 다독이며 함께 가야하는 손님이다. 도리가 없는
동행인 셈이다. 안구건조란, 참 고상한 데가 있다. 여느 대책도 없이
슬그머니 나의 일부가 된 까닭으로, 뭐라 마다할 처지도 못된다.

적당히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그렇듯 타협할 줄 아는 게 몸이다.
하긴, 그래서 병이 '들었다'는 표현을 쓴다. 슬그머니 몸 안에 드는,
병(病). 그만큼 적당한 자리를 내주는, 몸. 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타협인가. 엎치락뒤치락, 옥신각신. 때로는 자리 싸움도 하나본데,
사는 날 동안 이보다 더 자연스러운 타협이 어디 또 있겠는가.
그러니 몸은 참 순박하다. 어느 농촌의 엄지머리 총각처럼
곧이곧대로 타협한다.

얼굴의 마마자국처럼 오히려 숨기지 못하고 드러나는 건 마음이다.
적당히 추스르면 감출 수 있다고 여기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언제나
마음은 몸을 앞서기 마련이다. 몸은 괜찮다는데도 마음은 지레
호들갑이기 일쑤인 걸 보면.
사랑도 그런 것 같다. 그 또한 관계라면 내줌과 받아들임의 타협이
적당해야 할 건 분명하다.

며칠 전 누굴 만났다. 제자라고 하기에는 조금 쑥스럽지만 어쨌든
그 친구가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건 분명했다. '사랑하는 그'가
7년 된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다는 데서 앓기 시작한
사랑의 열병은 이제 적당히 미뤄둬야 할 것 같다는 타협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선을 보고 서른 전에는 결혼이란 걸 해야겠다고 하면서.
왜 그렇게 물었을까. 결혼하려고 사랑하니? 라는 나의 질문은
불량했다. 명색이 선생이라고 불리는 작자가 할 질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의 질문이 다소 황당할 법도 한데 사랑하니까
결혼하죠, 라며 선문답이다. 서로, 하나마나 한 소리.

사랑은 멍 같은 거다. 처음 확 부딪쳤을 땐 당장 죽을 것 같이 뭔들
그 충격만 할까만, 어느 순간이 지나면서 처음의 달뜬 느낌은 간데
없고 자국만 남기 마련이면서 그것조차 살갗이 되는 걸 보면. 흉터도
제 몸이다. 그러니 댁대굴댁대굴 처음 닿을 때만 요란한 법이다.
누군 또 안 그런가. 지겨워서 오늘 낼 끝장을 내야겠다고 하더니만
어쩌지도 못하고 그럭저럭 또 묻어 가는 걸 보면. 마음의 병치고
가장 고약한 게 사랑인 건 분명하다.

하물며 나란 사람은 사랑도 병이라는 데에 한몫 거든다. 스스로
내주지 않고서야 뭔들 받아들일 수 있을까만. 오히려 통증이 없는
병이 무서운 거다. 마치 언제 어디서 멍이 들었던 것인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멍 자국처럼, 잊혀진 사랑은 처량하다.

누가 그랬다. 남녀간의 사랑에서 섹스를 빼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처음엔 펄쩍 뛰며 호들갑을 떨었다. 무슨 돼먹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느냐고 하면서.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도 그럴 것 같다. 시쳇말로
육체적이니 정신적이니 하는 말을 운운하며 설레발 칠 생각은
없지만. 어느 쪽이 더 죄의식을 느끼는가를 따져보면 조금은 맞는
것도 같다. 본디 마음처럼 확실한 미로는 없을 테니까.

그 친구. 그러니까 나를 선생으로 부르던 누굴 만났을 때. 사랑을
뭐라 정의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랑은,
마음씀이다. 마음이 가는 것, 의도하지 않더라도 절로 마음이
받아들이는 그 무엇.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 여긴다. 말인즉 그렇다는
거다. 기혼이니 미혼이니. 누가 있니 없니. 뭐가 어쨌니 저쨌니. 그런
건 마음이 아닌 머리다. 사랑을 머리로 하는 거라 한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머리로 해 본 적이 없으니, 있다 없다 하는 건 순 뻥이다.
마음을 내주는 것. 그만큼의 자리에 놔두는 것. 적당한 타협.
자연스러운 동무. 내가 아는 사랑은 그렇다. 만일, 나는 그런데
상대가 아니라고 하면, 그 또한 아닌 대로 놔두는 것도 사랑이다.
어쩌겠는가. 그래서 단단히 농익은 종기처럼 몹쓸 통증에 시달려야
한대도. 터지기를 기다리는 것도 사랑이고, 굳은살이 되어 통증이
없는 흉터로 남는 것도 사랑이다. 뭔들. 사랑은 내 쪽에서의
받아들임이기보다 상대에 대한 내줌에서 비롯된다. 그래야 한다.
물론 그러한 마음씀이 얼마나 아리고 쓰릴 지는 미뤄 짐작할 것도
없다. 주거니 받거니 적당하게 내주고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오죽
좋을까만. 사랑해서 같이 산다 해도 그 균형을 맞추며 살기란 그리
쉬운 게 아니더라. 하물며 그것도 사랑이다.

어느 시인이 쓴 산문 가운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라는 책을
오래 전에 읽은 적이 있다. 이런저런 내용은 다 잊어먹었지만, 제목이
암시하고 있는 의미만큼은 내 식대로 기억하고 있다. 문득, 말 그대로
문득 누군가에게 마음이 가는 것. 그 신호를 느낄 수 있는 것. 그것이
자신에게 보내는 신호이든, 어쨌든. 이 또한 나는 사랑이라 명명하고
싶은 거다. 고로 선물이라고 호들갑 떨고 싶은 거다. 그러니 이런
마음을 괴상망측한 잣대를 디밀어 옳네 그르네 하는 것처럼 슬픈
일이 또 있을까?

당신 상대가, 그러니까 당신이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런 마음을 느끼고 있다면 어쩌겠냐고 누가 물었다. 아, 이런 답답한
노릇이 있나? 몸도 몸에 드는 병조차 어쩌지 못하는 판에 하물며
마음이 들고 내는 거야 뭘 어쩌란 말인가? 내 몸도 내 마음도 내
스스로 어쩌지 못하는 판국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묶어 누구를
가둘 수 있다는 말인지. 오히려 그로 인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풍요로울 수 있다면, 건 축하할 일이 아닌가. 그렇다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서 '내가 사랑해선 안 되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닌
다음에야. 설령 그렇다 한들. 굳은살도 내 몸이 아닌가 말이다. 아,
나의 사랑관은 과연 엇나간 것인가.

동양란이 시들었다. 어떻게든 살려보려 영양제도 꽂아두고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해 주면서 마음을 썼건만 끝내 시들었다. 누구는 그걸
치우라고 한다. 하지만 그 또한 나에게 있어 여전히 동양란이다. 것도
생명이니 시드는 건 마땅하다. 시들지 않는 것은 생명이 아니다.
마음도 그렇다. 한결같기를 바라는 마음이야말로 지나친 집착이
아니고 무엇일까. 자기 집착이야말로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지.
억지로 뭔가를 의도하여 틀어 쥔 마음이 아닌 다음에야, 그 마음을
어쩌랴. 행여 나의 마음을 모른다 해도 괜찮은 것은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 이것이 정녕 사랑이 뛰놀 수 있는
정원이다. 여기저기 기둥을 박고 철조망을 해 걸어 죄고 따져 다진
마음에서야 사랑인들 지옥이다. 정들면 지옥이라는 말이 그래서 맞다.
차 떼고 포 빼고 그래서 정든들 뭐가 좋을까.

낯선 천국보다 익숙한 지옥이 편한 법이다. 하긴 내 말 또한 내가
익숙한 지옥일 테지만. 적당한 병은 오히려 건강한 몸을 확인해 준다.
병도 지니고 있을 때 병인 것처럼. 시든 다음에야 뭐가 미련이 더
있을까.
때로는 고통스러운 것도 그만큼 건강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아픈 건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건 꼭 그만큼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고, 마음을 줄 수 있는 건 마음이 여유 있기
때문이다. 아닌들. 건 내 알 바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하나 둘 같이 가야 하는 몸의 친구가 느는 것처럼,
사랑도 그런 것이다. 첫사랑이 애틋한 이유는 처음이었기 때문이고,
짝사랑이 슬펐던 이유는 자국만 남았기 때문이며, 현재의 사랑이
지루한 이유는 정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살다 남의 사랑을
넘본들….
마음의 병은 사랑을 가두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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