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요한일서 3:1-12 / 하나님의 자녀

전봉석 2016. 10. 27. 14:25

20161030 주일

 

요한일서 3:1-12

하나님의 자녀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3:5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3: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3: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3:11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3: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들어가는 말

 

오늘 이 난리와 난리, 소문과 소문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6-8).” 결국 우리의 문명은 살인자의 뜰 위에 건설되었다. 그러므로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요일 3:12)” 악은 악으로 의를 공격한다. 언제나 의는 악에게 위협을 당하기 마련이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우리는 이 한 구절을 통해 우리 삶의 행동반경을 점검한다.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은 오늘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내주하심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참 뜻을 알게 하신다. 이에 우리는 보고 듣고 느낀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그러므로 여느 사상과 사고와 철학을 기웃거리게 해서는 안 된다.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막 13:7).” 곧 금방 벌어진 일에 대해 우리는 우왕좌왕하지 말아야 한다. 멘토를 찾으려 하지 말고, 어떤 성공사례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우선, 멈추라!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

 

상황과 처지에 함몰되지 않도록 하라. 안 그러면 하나님의 섭리를 분별하지 못한다. 누구를 지지하고 어떤 사상에 동조하지 말라. 입을 막고, 하던 말을 멈추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초점을 맞추면 우리의 몰이해는 실망과 좌절만 가져온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붙들어야 한다. 의로우시고 선하시다는 마땅한 진리를 붙드는 것이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사람은 사람일뿐이다. 더 옳고 더 선하고, 덜 그르고 덜 악한 존재란 없다. 더 나은 무엇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신 게 아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신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시 50:21).” 그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신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전인적인 사랑은 ‘하나님의 무궁한 허비’로 드러난다.

 

그 오랜 기다리심과 장구한 역사의 인내하심이 오늘 우리들로 하여금 주 앞에 나올 수 있게 하였다. ‘거룩한 허비’는 하나님의 특징이다. 뒤엎고 판을 갈아치우는 게 더 쉽다. 전능하신 자로서 없던 걸로 하고 새로 하시는 게 나았다. 그런 거였다면 변화산에서의 ‘화려한 영광’으로 예수님이 승천하셨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 17:4).”

 

한데 예수님은 산을 내려오셨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으며, 기어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이보다 더 황망하고 처량한 결과가 또 있을까? 변화산에서 홀연히 승천하셨다면 오늘 우리의 구원도 없었다. 주의 사랑은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것,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5).”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6).”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요일 3:1).”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2-3).”

 

내 비록 장래의 일을 알지 못하나 이미 들어서 알고 보아서 알고 삶으로 느껴서 안다.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이 영생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에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곧 성결을 사모함이다. 무던히 애쓰고 수고하여 성결을 이루어간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러므로 더욱 주를 의지한다.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러므로 상한 심령을 안고 주께 나온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이것에는 변함이 없는 진리다.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우리는 믿음으로 주께 나온다. 믿기 위해 나오는 게 아니다. 믿음으로 말씀을 사모한다. 믿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헌신하고 봉사한다. 믿기 위해 열심인 게 아니라,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고로’ 믿는다. 그때는 우리는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곧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5:8).” 그러므로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그래서 이제 우리는 죄와 싸운다. 전에는 아무렇지 않던 것들이 이제는 싸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우리를 의아해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는 주 앞에 왔다가 슬그머니 물러간다. 싫은 것이다. 이것 자체가 허비하는 시간인 것 같다.

 

갸롯인 유다는 그러했다. 베다니의 마리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허비하느냐? 하고 나무라고 꾸짖었다.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막 14:4).” 그 귀한 향유를 얼마에 팔아 몇 명을 구제하는 게 낫다고 비난하였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5).” 저들은 논리는 타당성 있고 훨씬 더 합리적이다. 오늘에도 많은 사람들은 교회에서 교회를 향해 책망한다. 더 나은 무언가를 추구하는 게 낫다는 것이다. 후에 저는 ‘그를 알지 못함으로’ 목매여 죽었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아버지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안다. 그 뜻을 안다는 것은 무던히 다투어 싸워야 하는 이유가 있다. 화인 맞은 양심으로 살아가는 것을 경계한다.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2).” 그러니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1:19).” 가만히 보면 저들은 자기의 죄를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니까 거리낄 게 없고, 거리낄 게 없음으로 사과할 일도 없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윗은 기도한다.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시 26:2).” 그리고 묵상한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16:7).”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양심이 살아 있는 자이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부화뇌동하지 말자. 번개가 번쩍 칠 때마다 화들짝 놀라 이리 쓸렸다가 저리 쓸렸다가 해서는 안 된다. 삶은 본디 일희일비하게 돼 있다. 한 손이 기쁘면 한 손이 슬프다.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했다(요일 3:8). 지혜자는 말하였다. 그러므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세상이 이 모양인 건 세상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럴 수밖에 없는 건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13).”

 

누구나 한 편으로 기뻐하고 한 편으로 슬퍼하는 것이 인생이다. 하나님의 일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주의 성품을 의지해야 한다. 어떠하든 하나님은 선하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경악을 금치 못할 끔찍한 일도 있을 것이나, 이는 예전에도 있었다. 문명화되면 좀 나아질 줄 알았던 우리의 기대가 부질없다. 이와 같은 일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이에 우리는 아무도 우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딤전 4:1).” 행여 그것이 내가 아닐까,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이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바울 사도의 결연한 고백을 되새겨야 한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누구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① 바르게 배워 확신 있는 데 거하라.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4-15).”

 

② 죄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잠 4:27).”

 

③ 뜻을 다하여 주를 사랑하라.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

 

 

나오는 말

 

어지러운 정국에서 우리는 몇 가지 주의 할 필요가 있다. 첫째, 현상만 좇지 말자. “또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전 3:16).”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고 의아해할 필요 없다.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다. 더하면 더했지 우리도 덜하지는 않다.

 

둘째, 생각을 함부로 다 말로 내지 말자.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8:1).” 같이 모여 삼삼오오 누가 어떻고 뭐가 어떻고 하지 말자. 행여 그 뒤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섭리를 욕하는 게 될 수 있다.

 

셋째, 악에 대해 두려워할 줄 알자.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8:11).” 앞서도 시편에서 살벼본 바,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시 50:21).” 죄는 반드시 우리 앞에 드러날 때가 온다.

 

넷째, 우리에게 두신 은사, 영생을 준비하자.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7).” 인생을 어찌 살아갈까, 하여 열심을 다해 준비하는 청소년 시절을 생각해보자. 노년을 준비하느라 열심을 다해 중년을 살아내는 수고를 생각하자. 하물며 영생이다! 그 어떤 은사보다 귀하디귀한 게 영생이다.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면 어찌 살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이는 성령이 증언하시는 사실이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6).” 그러므로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9:8).” 이에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 오래된 미래에 우리는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