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요한일서 4:7-21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전봉석 2016. 11. 24. 15:45

20161127 주일

 

요한일서 4:7-21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4: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4: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4: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4: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4: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4: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들어가는 말

 

1. 사랑하는 자들아

사랑하는 자들아!’ 성경은 우리를 부르신다. 오늘 우리는 우선, 우리의 구별됨을 확신해야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너무 어지럽다. 가치관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여기저기서 연신 서로를 향해 돌팔매질을 해댄다. 마치 자신들은 무관한 것처럼 네 탓을 외쳐대고 있다. 이럴 때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 앞에 서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이것이 의 가치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17).”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8).” 한데 우리는 이만한, 이 고귀한 가치에 대해 별로 그 귀한 걸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그리곤 덩달아서 부화뇌동하기 일쑤고 좌고우면하여 쩔쩔맨다. 저들과 섞여 살지만 결코 저들과는 구별된 증거로써 오늘 성경은 우리를 일컬어, ‘사랑하는 자라고 부른다. 이 가치는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 알고이로써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할 수 있다(요일 3:19, 21-22). 그런 우리에게 말씀은 일러, 그러므로 영을 다 믿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그리하여 오늘 우리는 영적인 안목으로 세상을 봐야 한다. 참으로 혼탁한 세상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 분별하라. 이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저들 세상 통치자들과 권세들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로부터 나온다. 때문에 우리는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이다(6:12). 너무 종교적인 표현이어서 거북한가? 그렇다면 그만큼 인본주의적인 사고에 물든 것이다. 성경은 일러, 사랑하는 자들아 분별하라고 하신다.

 

2. 적그리스도-거짓 선지자

적그리스도는 고의적으로 그리스도를 적대하는 무리다. 요한은 이를 적그리스도라고 표현했다(요일 2:18, 22, 4:3, 요이 1:7). 온갖 이단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대놓고 악령을 숭배하는 것들도 이에 해당한다. 사탄숭배자들이 늘고 있다. 무신론자는 말할 것도 없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모든 것은 적그리스도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도, 자신의 신조를 따른다면 이는 하나님이라는 우상숭배일 뿐이다. 그 기준은 성경이다. 이를 고의적으로 반대하거나 인위적으로 해석한다면 이는 모두 거짓되다.

 

요즘은 더러 긍정적인 사고를 높이 평가하여 스스로 낭만적인 자아도취에 빠져든다. 그럼 된 것이다. 넌 할 만큼 했어, 잘한 거야, 최선을 다한 게 중요한 거야, 열심히 했잖아! 심지어 진실하잖아! 그럼 된 거야하나님은 사랑이신데! 하는 따위의 말에 누가 반박할 수 있을까? 과연 그렇다면, 바울이 바울되기 전의 사울이었을 때 그보다 더 진실하고 열심이었던 자가 어디 있을까? 흔히 유태인들이라 하는 유대인들의 진실함과 열심을 누가 이길 수 있을까? 과연 그럼 된 것일까? 열심히 진실 되게 최선을 다했으면 되는 것일까?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5:13).” 이와 같은 말씀은 당혹스럽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10:38).” 불편한 말씀이다. 더욱이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8:34).” 하시는 말씀 앞에 선뜻 다가설 수가 없다. 종교란 모름지기 다 내려놓고 평안을 도모해야 하는 데가 아닌가? 사랑하는 자들아, 분별하라. ‘오직 영이 하나님께 속하였나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많다.

 

3. 이기었다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요일 4:4)”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이기었다는 완료형시제를 사용한다. 왜냐하면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그 이유다.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땅에 유기된 사람들과 살아가지만 저들과 다르다. 예수님은 이를 명확히 하신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5:13-14).” 구별됨이란 분별하는 자의 훈장이다. 누가 뭐라던 바꿀 수 없는 값이다.

 

곧 우리는 저들과 싸워 이기기 위해 싸움을 벌이는 게 아니다. ‘이미 이기었노라하심의 증거가 되기 위해 씨름한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우리가 누리는 이 누림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이다. 조건과 환경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당연히 저들은 승승장구할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요일 4:5).” 저들은 죽을 때조차 평안하다. 때론 저들을 질투하느라 내가 미끄러져 넘어진다(73).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게 전부일까?

 

사랑하는 자들은 곧 하나님을 아는 자이다. 이는 알다동침하다의 의미로 기노스코곧 창세가 41절에 나오는,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할 때의 그 동침하다의 동사형으로 알다’이. 곧 부부사이만 아는, 내밀하고 농밀한 앎이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아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알고) 떠느니라(2:19).” 여기서 저들이 아는 앎과는 차원이 다른 앎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축복이 좋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다. 도움이 없어도 축복이 없어도, 하나님이다. 하나님 한 분으로 전부인 앎이다. 이 앎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랑의 앎이다. 이를 사도요한은 앞서 명쾌하게 서술하였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하나님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인격적으로 안다는 것은 지정의(知情意) 곧 합일의 앎이다. 그 앎은 아무리 적그리스도가 어떻고 거짓 선지자가 판친다 해도, 다 이긴 이김으로의 앎이다. 우리의 이김은 여호와의 것이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21:31).”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다시 오늘 본문을 보자. ‘사랑하는 자들아.’ 하고 우리를 부른다. 그런 우리에게,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하고 말씀하신다. 왜 그럴까?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여기서 아는 앎은 앞서도 설명했듯이 서로를 사랑하는, 부부사이에 갖는 그 내밀한, 저들은(사탄은, 세상은) 알 수 없는, 하나님과 나의 농밀한 사랑의 앎이다. 그 아는 것으로 우리는 사랑한다. 그럼 아는 것이 사랑하다사랑되다의 의미로 확장한다. 도저히 납득이 안 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상대인데도 사랑이 되는 사랑이다.

 

어째서 그럴까? 8절에 그 답이 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다시 말해 사랑하지 않는 자는, 좋아하는 것으로 그친다. 좋아한다는 건 사랑한다는 것과 다르다, 사랑하면 좋아한다. 좋아한다고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좋아한다는 건 기호에 따른 내 기준과 기질과 판단의 몫이다. 취향이 같고 성격이 맞는 것으로, 딱 내 스타일이야! 할 때의 좋음이다. 유한한 좋음이다. 그런데 사랑한다는 것은 무한한 좋음이다. 싫은데도 좋다. 딱히 와 닿는 게 가족이겠다. 것도 무한하지는 않다. 흔히 이혼이 판치고 결별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건 좋았던 것이지 사랑은 아니었다.

 

사랑하는 자들아에 해당되는, 우리를 향하신 사랑은 그 정도의 좋음 정도가 결코 아니다. 이를 에베소서 1장에서 풀어놓은 바울 사도의 진술을 통해 더욱 확신할 수 있다. 예정된, 창세전에 택하여진 바 된, ‘우리-사랑하는 자들곧 그 뜻의 비밀을 성경은 이렇게 알리신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1:9).”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6-7).”

 

그 사랑을 아는 자는 비로소 사랑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그 사랑은 결코 막연한 게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9).” 오늘 본문은 이를 명확히 하고 있다. 곧 지금 우리가 사랑하는 이 사랑은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으로까지, 저를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8).” 그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심이다. 그 값이 십자가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어떠한가? 내가 주를 사랑하는 것이 어떤 수고와 노력으로 그 값을 다할 수 있는 것인가? 다는 아니더라도 다만 얼마라도 좀 갚아야 하는 정도인가? 그러자고 오늘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 실제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을 부담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나름 자기 수고와 노력으로, 그 애씀이 때론 힘에 부치기까지 하여안 믿는 자를 부러워하는 그리스도인도 있다. 그런데 오늘 돌아가는 세상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이 얼마나 치졸하고 염치없고 악랄한지,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도 그렇게 살고 싶나? ‘이기었노라하시니라!

 

이같이 죽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의 값을 사는 사람이 고작 얼마의 돈을 위해, 어떤 일의 성취감을 위해, 부와 명예를 위해, 더 나은 노후를 위해 그 값어치의 영혼을 저당 잡힐 것인가?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11).” 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지 그 이유는 명백하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12).” 곧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우리 안에 주의 사랑이 거하심의 증거다. 사랑이 되는 이유였다.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누군들 자신할 수 있던가? 얼마나 수고하고 애써야 가능할까? 한평생을 헌신하고 봉사함으로 주의 사랑의 빚을 좀 갚았다, 하고 말할 수 있을까? 성경은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구약의 십계명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걸 입증할 뿐이다. 신약의 산상수훈은 누구도 그와 같을 수 없다는 걸 확인시켜줄 뿐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주 앞에서 의인이 될 수 있을까? 어떤 노력으로도 가능하지 않다는 걸 성경은 증거한다.

 

이에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13).” 성경은 이를 말씀하신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우리가 그 안에 거할 때에야 비로소 안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14-15).” 성경은 누누이 일러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 저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는 고백이 내 것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 하는 고백이 드려질 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 하는 증거가 입증된다. 이때,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8).” 그 고백 위에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신다. 즉 세상 거짓 선지자도 적그리스도도 우리를 이기지 못한다. 제 아무리 음부의 권세라 해도 말이다.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는 이 놀라운 사실 앞에 기뻐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이 놀라운 진리는 반복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0:17).” 믿음은 신비다. 그 어떤 기적보다 기적 같다. 내가 지금, 이것을 믿는다니! 믿겨지지 않는다. 나는 지극히 이성론자였고 논리적인 사람이라 타당한 근거가 아니면 그 어떤 주장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걸 믿느니 내 손에 장을 지진다. 한데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말도 안 되는 이와 같은 소리를 믿는다. 이를 믿고 담대함을 가진다. 내 의지와 판단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곧 이것이 온전한 사랑이다. 세상이 말하는 사랑의 기적도 때론 우리를 놀라게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일까!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18).”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바뀐 것이다. 전에는 그처럼 두려워했던 것이 이제는 대수롭지 않다. 사람들의 이목이 두렵지 않다. 실패가 두렵지 않고 이 세상에서의 낙오됨이 또한 두렵지 않다. 그것은 더 이상 그런 게 없는 세상에서 살게 됐다는 게 아니라, 여전한데도 더는 두려울 게 없어진 것이다. 가령 어린아이 때 두려웠던 것이 이제는 유용하기까지 하다. 그러므로 참 두려움은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릴까 하는 것이다.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서, 행여 넘쳐나는 영들 때문에 참 영을 분별하지 못할까봐, 사랑하는 자들아 분별하라.

    

 

나오는 말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19).” 자연스럽게 그리 되게 되어 있다. 그리하셔야 그리 된다. 그럼 뭐, 하나님이 때가 되면 알아서 하시겠거니! 이와 같은 안이함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어떤 조바심보다 강렬하다. 사랑은 어떤 질투보다 강력하다. 사랑은 어떤 희생보다 무모하다. 사랑은 어떤 보석보다 진귀하다. 이는 우리가 그 강렬하고 강력하며 무모하기까지 진귀한 사랑을 먼저 사랑한 게 아니었다. 외레 그만한 가치도 없는 나를 그 이상으로 먼저 사랑하신 사랑의 값어치고 가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20).”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그 사랑을 확증한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21).” 그럴 수 없어서 나는 다만 그러지 못하는 나를 참을 수 없어서 주의 이름을 부를 뿐인데, 주께서 이루신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13:34-35).” 이게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한다고 해서 될 일인가?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도저히 어떻게 해도 그렇게 되지가 않습니다. 주께 나아올 때,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으신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5:22-23).” 어느덧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 사랑을 더듬어 실천하는 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