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06 주일
요한일서 3:13-24
행함과 진실함으로
3: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3: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3: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3: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3: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3: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하나님의 가족
‘형제들아’ 하는 부름에서 우선 우리는 교회 공동체의 의미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땅에서의 가족 공동체는 임시적이다. ‘성령과 함께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권속- 하나님의 가족’이다. 첫째, 우리는 한 아버지를 두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 3:26).” 곧 이는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부모자식간의 관계를 이루는 데 있어서도 우리는 절대 관여할 수 없었듯이,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마 12:50).”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두었는지 알지 못한다.
둘째, 우리는 한 이름으로 기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곧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나의 소망삼고, 그가 나의 모든 것이라는 고백을 기꺼워한다. 곧 믿는 자로서 우리는 이와 같이 모두 같은 마음을 가졌다. 셋째, 우리의 마음은 서로 닮았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하는 것으로 감사할 줄 알고, 회개하고, 믿고, 소망하며 주의 자비하심 앞에 겸손히 나아가기를 바란다.
곧 하나님의 가족은 이 땅에서 우리의 할 일을 마친 후에 천국에 들어갈 것을 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장성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분량에까지 성장한다는 것은 억매이던 것들로부터 해방을 얻는 것이다. 전에는 우리도 진노의 자녀였고(엡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어둠이었다(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하지만 이제 우리의 일상은 더 이상 과거의 죄악에 억매이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망설이지도 않는다. 주의 사랑을 발견하고, 확신하고, 감사함으로 나아간다. 이는 주께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고, 믿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가족은 그러므로 서로를 알아본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그와 반대로 ‘가인은 아벨을 미워한다.’ 세상은 하나님을 싫어한다. 어둠은 빛을 멀리한다. 이 땅의 싸움은 예수 재림하실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앞서 우리는 12절에서 그의 악함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는 동생 아벨을 미워하여 살인자가 되었다. 저는 악하고 아우는 의롭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곧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여도 우리는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오히려 친화력 있게 잘 지내고 두루뭉수리하게 서로 화합한다면, 세상과 무난하게 어울린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 자주 강조하였지만 안 믿는 자들과 어울리는 데 있어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자신의 신앙을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여기 ‘세상’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의도적으로 거역하는 자리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보자. 우리 사회는 얼마나 미신적인 요소들로 가득 차 있는가?
습관적으로 ‘오늘의 운세’를 살피고, 무슨 일에 앞서 반드시 푸닥거리를 운운하며, 액운을 쫓는 고사를 지내고, 천우신조의 도움을 기원하고, 하다못해 대학에서 과동아리 활동에 앞서서도, 무슨 친목단체의 결단식에서도, 길을 가다 마주하는 문양과 상징과 의식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그런 가운데 우리가 아무런 거리낌도 느끼지 못한다면? 더 나아가 우리의 신앙 또한 샤머니즘적으로 여겨 얼마나 많은 의식과 절차가 사이비적으로 흘러가는지 모른다. 하나님을 여느 신들 가운데 한 분으로 두고, 우리 믿음도 저들 그것과 동일하게 여기는 한! 그 차이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 확연한 증거는 무엇인가? 저들로 우리를 미워하게 해야 한다. 그것은 성결이다. 구별됨으로 다름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일 3:13).”
사랑함으로
우리는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으로 들어간 증거로써 사랑하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열심을 다하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함으로 이를 아는 확신이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23).” 곧 사랑은 명령이기 때문이다. 믿음과 사랑은 한데 어우러져 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믿음으로 서로 사랑한다. 계명대로 말이다. 애쓰고 수고하는 노력의 정도가 아니라 사랑이 되는 ‘저절로 은사’다. 나름 수고와 애씀으로 이루는 봉사와 헌신과는 차원이 다르다. 아무리 뭐라 해도 믿는 자로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믿지 않는 자로서 서로를 미워하는 일보다 쉽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하신 말씀과 같이 우리의 확신은 감출 수 없는 증거가 된다. 이는 안 믿는 사람들도 안다. 우리가 저에게 교회 다닌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티를 내지 않아도 벌써 다 안다. 이상하게 신뢰가 가고, 뭔가 속엣 얘기를 감추지 않아도 될 것 같고, 어떤 어려움을 가지고 도움을 청해도 될 것 같은 상대가 우리이어야 하는 것이다. 점점 사람을 믿을 수 없는 세상에서 믿는 자들의 특징은 저들로 하여금 우리가 주의 제자인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랑이다.
담대함으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이미 끝난 얘기를 재차 확인하고 묻고 다시 따지느라 한눈 파는 경우도 많다. 마치 서부개척시대에 이주하여 자기 땅을 얻은 이 가운데 어떤 이는 벌써 나가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고 수확을 거두는 데 있어, 어떤 이는 여전히 의심하여 관공서를 드나들고, 서류를 확인하고, 공증을 다시 세우고, 재차 다짐하느라 기력이 쇠한 경우도 있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요일 3:19).” 곧 우리 안에 이는 사랑이 그 증거가 되어 ‘담대함으로’ 주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20).” 때론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한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믿는다고 믿으면서 누구는 주저하고 낙심하느라, 배가 항구에 도착하기까지 멀미로 고역일 뿐이다.
사랑의 반대는 의심이 아니다. 회의와 갈등은 살아있는 동안 수시로 생겨날 수 있다. 사랑의 반대는 고의적인 미움이다. 사랑이 싫은 것이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곧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이미 살인하는 자이다. 살인하는 자는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영생이 우리 안에 거하는 줄을 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데 있어 그 증거가 사랑이다. 다시 말해 형제를 미워하는 자신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다.
이로써 사랑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을 앎으로, 사랑은 추상적이거나 막연한 게 아니다. 형이상학적일 땐 누구나 순교자가 될 수 있다. 기꺼이 희생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사랑은 지독히 현실적인, 징글맞게 사실적인 행함이다. 누군들 머리로는 못할까? 좋은 말로 그려내는 사랑은 쉽다. 드라마틱하고 다분히 유행가 가사다운 것으로는 어림도 없다. 실제 사랑은 투쟁이다. 치열한 싸움이다. 자기애와의 사투이고 자아실현과의 전쟁이다. 고로 ‘나는 날마다 죽는다.’ 바울 사도의 진술은 사랑하는 자의 훈장인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그러므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 곧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바로 그 사랑의 증거이다.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인데,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마땅하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소명의 문제다. 싫고 좋음의 문제가 아니라 사명의 문제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명령이다. 영생을 얻었다는 증거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이에 실제적인 도움이 없는 사랑은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야고보 사도의 설교를 먼저 묵상해보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15-22).”
믿고 떠드는 것은 귀신들도 한다. 그럼 어떻게 구분될까? ‘행함과 진실함으로’이다. 행함만 있으면 위선으로 빠지고 진실함만 강요되면 낭만적인 게 될 수 있다. 행함과 진실함은 하나이다.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강조하는 사람은 누구보다 선하고 의롭게 살 수 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일은 무색하게 된다. 또는 진실함만을 유독 자랑하는 자는 자기 신조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구체적인 필요와 요구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행 2:45).” 이를 외인에게 하는 것이다.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살전 4:12).” 참 사랑은 고마움을 되돌려 받을 생각으로 하는 게 아니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
곧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막 4:25).” 하신 말씀에서도 무엇을 받고 무엇을 빼앗김인가? 사랑은 헤아림이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23-24).” 사랑에 있어 행함은 진실함으로 감추어지지 않고, 행함으로 숨겨질 수 없다. 곧 진실은 행함으로 드러난다. 행함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진실함의 본체도 예수 그리스도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1-22).”
나오는 말
아이가 무엇을 완벽하게 행하여서 그 부모가 기뻐하는 것은 아니다. 두 달란트 가진 자는 두 달란트를, 다섯 달란트 가진 자는 다섯 달란트를 남겼다. 이는 저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진실함이란 ‘젖 먹던 힘까지’이다. 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젖을 먹는 데 있어 이미 그 행함은 충분하여서 진실하다. 진실함이란 행함의 무게이다. 행함이란 진실함의 기준이 된다. 고로 어디에 거하느냐 하는 문제다. 왜냐하면 안 믿는 자도 진실할 수 있고, 예수를 부인하는 자도 행함으로 선을 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구분은 계명이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24).” 그리고 계명은 어디에 거하느냐의 문제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그러므로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20).” 우리가 어찌 알 수 있을까?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하나 하나님이 우리 마음보다 크심을 알고, 그 계명을 지킴으로 확신을 더하는 것이다. 행함과 진실함은 그 기준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하심으로, 이로써 우리가 진리 안에 속한 줄을 안다.
그 계명은 무엇인가?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요일 3:23).” 곧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이로써 사랑은 계명으로 주신 명령이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형제들아! 우리가 하나님의 한 가족임을 아는 것으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이로써,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21).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19).” 행함과 진실함으로 서로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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