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렵건대 마지막에 이르러 네 몸, 네 육체가 쇠약할 때에 네가 한탄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찌하여 훈계를 싫어하며 내 마음이 꾸지람을 가벼이 여기고 내 선생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며 나를 가르치는 이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던고…
잠언 5:11-13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62:5-6
일찍 올라가 전날에 써두었던 설교원고를 다듬었다. 기다렸다가 대통령의 담화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설교문을 읽고 정리하였다. 날씨는 점점 추워질 일만 남았다는 듯 하루가 다르게 차가웠다. 돌아가는 게 모두 내 이야기 같아서 두렵다. 죄의 속성은 하나님께 대한 의도적인 거역이다. 몰랐다거나 유혹에 빠졌다는 변명은 소용이 없다. “악을 도모하는 자는 잘못 가는 것이 아니냐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인자와 진리가 있으리라(전 14:22).”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와 함께 하시리니! 다른 더 좋은 길은 없다.
두렵건대. 오늘 지혜자는 말씀을 물리고 귀를 돌림으로 생기는 일에 대하여 두려워한다. “그런즉 아들들아 나에게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 하라 그의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7-8).” 한데 기어이 갈 데까지 가야만 아는가. 설마, 하는 정도의 허용이 전부를 앗아간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 죄가 들어왔던 것을 살피면 여전히 오늘 날에도 다르지 않다.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생기면 회의와 갈등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비방하는 목소리가 올라온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야? 그러면서 스스로를 순진했다고 몰아세우는 것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이와 같은 원리가 죄의 구조인 것이다. 그러니 성경은 일러, “내 아들아 내 지혜에 주의하며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여서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잠 5: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사 14:12-15).”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분명히 알면서도 이를 제지하지 않는, 그러기 싫은 것이다. 결국은 아직 먼 것 같고 당장의 것을 참을 수 없는 게 정욕이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싶지 않다. 너무 느리고 더디고 답답하게 느껴진다. 그러느니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 그럼 또 확연히 ‘더 좋은’ 좋아 보이는 게 늘 곁에 있다.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의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잠 5:3).” 훨씬 합리적이고 타당하며 순리에 맞는 것 같다. 한데 그 끝은 자명하다. “그는 생명의 평탄한 길을 찾지 못하며 자기 길이 든든하지 못하여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느니라(6).”
참 부질없다. 세상이 돌아가는 걸 보면 저마다 가치를 부여하고 그 이상을 좇아 죽기 살기로 덤빈다. 당장의 소원은 기어이 존영을 잃게 하고 그 수한은 더 잔인한 자에게 빼앗긴다. 애지중지하던 재물은 타인이 취하고, 기껏 수고한 것이 외인의 집에 있다. 더는 돌이킬 수 없는 때가 이르러서야 한탄한다. 내가 어찌 훈계를 싫어하고 꾸지람을 가벼이 여겼던가. 왜 선생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았던가. 나를 가르치는 이에게 귀 기울이지 아니하였던가. ‘한 번 닫힌 구원의 문 또 열려지지 않으리.’
정말 두려운 건 고통이 아니다. 실패도 좌절도 아니다.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것에서 한탄하여 울부짖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은 이치다. 성경은 끊임없이 외치었다. 우리와 동행하자(민 10:29). 일어나 같이 함께 가자!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 2:13).” 곧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2).” 아!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 2:10).”
돌이켜 나를 오늘에 세우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린다. 더러 낙심이 찾아올 때, 지난 날 내가 어느 지경에서 주 없이 살았던가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내 아이들이 또한 그와 같은 시절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다. 주의 은혜가 아니면 단 한 걸음도 뗄 수 없음을 고백한다. 나의 나 된 것이 이미 은혜였다.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에 이르러서 비로소 이와 같은 진리 앞에 선다면 어쩔 뻔했나?
그와 같은 마음으로 아이를 대한다. 아직 몰라서 그러는 덴 주께 은총을 구한다. 아이는 어디 교회에 나가고 있지만, 자신은 무교라고 자랑하듯 말하였다. 큰 교회라 이런저런 혜택이 많아서 나간다고 하였다. 뭐라 한들. 나의 깊은 한숨에는 아직 어리고 몰라서 그러는 것이니 그저 주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이 함께 하시기만을 바란다. 그리고 붙드는 것은 결코 주의 자녀를 잃어버리지 않으실 것을 신뢰한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아이에게 문자라도 해볼까 하다 생각함으로 기도를 대신한다. 누가 반가운 얼굴로 다가와 무얼 건네면 순간 그것을 받아들며 불쾌함이 들기도 한다. 전에 한 아이가 했던 말이다. 언니가 되게 친절하네, 하고 말을 받았더니 ‘그게 다 꿍꿍이가 있는 거잖아요.’ 하였다. 한 영혼을 생각하고 위하여 친절을 다하는 게 꿍꿍이로만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가끔은 기도보다 뭐라도 티를 내고 생색을 내듯 아는 체를 자꾸 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저의 무덤덤함은 기가 산다. 나의 소심한 마음은 기도로 성령의 일을 신뢰하고 독려한다.
문득 떠오른 이름을 메모지에 적에 옆에 붙여둔다. 뜬금없기는. 새삼 연락을 하기도 뭐한 사이가 되었다 해도 생각나게 하시는 이는 또한 기도하게 하신다. 복도를 지나가다 전혀 생면부지의 사람인데도 불쑥 저를 위해 기도하게 하신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저녁에 아이가 와서 글을 쓰고, 그러는 동안 나는 책에 눈길을 주고 아이를 위해 기도한다. 아니 아이를 대하는 나의 자세를 놓고 기도하였다. 여러 개의 마음이 서로 싸운다. 예의 없고, 무례하고, 정신 상태가 글러먹은 것 같아 욕이나 퍼붓고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데… 내가 더했다. 나도 그랬다. 그런 내가 이제는 주의 은혜로 산다. 하는 걸 떠올리면 민망하여서도 짜증을 낼 수 없다.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시 17:8).” 내 안에 이는 온갖 더러운 것들로부터 나를 보호하소서.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않게 하소서(5). 그러므로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수시로 드나드는 생각으로 때론 지친다. 내 안에 이는 온갖 더러운 마음으로 질식할 것 같다. 행여 그것이 말로 되어져 쏟아질 때는 정말이지 내가 나를 상대하기도 싫다.
늘 고만고만한 날들인 것 같지만, 평범한 일상의 도전은 그칠 줄 모른다. 그러니 혼자 노는 사람도 이 정도인데 하물며 바쁘게 몸서리치는 사람들의 수고는 또 어떨까? 그야말로 나 하나 건사하는 일이 천하를 주무르는 일보다 버거운데 말이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4).” 이 땅에서의 씨름이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것을 내가 책임져야 하는 일이면 더더욱 아찔하다. 한데 주께서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니!
그러므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벌써 토요일. 눈 깜짝 했을 뿐인데 나이 오십이 되었고,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90:10).” 수면양말을 신고 두꺼운 스웨터를 입고 앉아 말씀 글을 쓰고 있다니, 좀 전까지만 해도 너무 더워서 혀를 길게 내물고 있었는데.
‘두렵건대’ 하고 지혜자는 말문을 연다. ‘마지막에 이르러 네 몸, 네 육체가 쇠약할 때에 네가 한탄하여 말하기를’ 이와 같은 때는 반드시 오나니, 이를 마중하고 사는 게 축복이었다. 저 본향을 행해 나아가는 것은 이 땅의 것에 그처럼 연연해하지 않는 데서 발걸음이 가볍다. 두신 한 날에 충실하는 것. 감사로 드려지는 한 날의 수고가 족하였다. 허리를 툭툭, 치며 자세를 고쳐 앉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시 62:1).” 다윗의 기도에 아멘, 한다. 그리하여,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2).” 하는 데서 두 손을 올리며. 아무리 어떠해도,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5-6).” 내가 내게 들려주는 기도가 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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