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전봉석 2016. 11. 2. 07:58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그런즉 네가 공의와 정의와 정직 곧 모든 선한 길을 깨달을 것이라

잠언 2:7-9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시편 59:16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 과유불급이라. 한데 다시 봐도 모자란 것이 넘치는 것보다 낫다. 이는 성도의 지표이기도 하겠다. 풍족할 때는 유혹도 달콤한 법이다. 에덴에서의 처음 사람도 그러하였다. 모자라고 부족해서 항상 주의 도우심을 바라고 살 수 있는 것도 은혜다. 때를 따라 도우시는 주의 손길은 항상 시의적절하여 새삼스레 감사의 불씨가 된다.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시 145:15).”

 

한 달에 천만 원씩의 임대료를 내며 호화주택에 살고, 수십 억 하는 자가용을 몰고, 몸에 걸친 옷가지마다 명품으로 도배를 하고, 주변 사람들을 쥐락펴락 하며 사는 이에게 저의 하나님도 사치요, 허세요, 자기만족의 우상이었을 텐데. 고급 십자가 목걸이를 목에 걸고 만족해하는 정도의 신앙이라는 게 참! 분에 넘치는 부요함은 죄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기어이 한 입 베어 문 우리의 정서란 스스로 하나님이 된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으려는 악랄함이 있다. 거짓말에 능하고, 그러느라 은폐하고 꾸미고 과장하여 남에게 책임을 돌리는, 우리의 속성에 대하여 잠언은 일갈한다.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셨다. 곧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신다. 왜냐하면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다 보이는 거짓말에 스스로 안도하는 자의 나무 그늘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이치다. ‘그런즉 네가 공의와 정의와 정직 곧 모든 선한 길을 깨달을 것이라.’ 곧 주 앞에 아뢰어 우리의 연약함을 의탁할 때에 얻는 깨달음이겠다(잠 2:7-9).

 

정직은 은사다. 계시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본래 죄를 범한 사람으로서는 정직할 수 없다. 나무 그늘에 숨어 스스로 잎사귀를 가져다 부끄러운 걸 감추는 게 특성이다. 지혜는 주 앞에 정직히 엎드린 자의 몫이다. 저는 행실이 온전하게 구별된다. 하나같이 모르쇠로 일관하는 조직적인 거짓말 앞에서 뭐라 할 말이 없다. 나름은 믿는 자로 고상을 떨고 사람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묘한 언변과 순진한 표정을 하고 있다 해도, 하나님은 결코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나 또한 저들과 다르지 않다는 데서 주의 도우심을 구한다. 악다구니를 쓰는 현실에서 저들의 수고와 애씀이 별로 부럽지가 않다. 그 풍성함과 분에 넘치는 삶이 안타깝기까지 하다. 고작 한 시대를 풍미하자고 영생을 담보로 그럴 것인가?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시 59:16).” 하는 다윗의 기도를 한참동안 입에 머금고 되뇌어본다.

 

부모님이 누구 전도사 내외분과 오셨다. 비록 쓰던 것이지만, 냉장고와 가스레인지를 가져왔다. 점심을 대접하고 교회에 올라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각별한 체험은 때로 시야를 좁게 한다. 하나님을 한정하고 누구라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증거한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욜 2: 25-26).”

 

심지어 그것으로 주의 일을 도모하는 데는 각별히 주의가 필요하다. 마치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 ‘사용하시는 도구’로 삼느라 여느 사람에게도 모두 적용하려 드는 열심이 그릇될 수 있다. 열심이 마음을 어지럽힐 수 있고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난 하나님의 선하심을 왜곡할 수도 있다.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누군가에게 ‘나도 그와 같았으면’ 하는 마음을 심어줄 수 있다. 간증이란 그런 취약점을 갖는다. ‘~해서 ~됐다.’ 하는 식의 결말은 도식적인 신앙을 갖게 한다.

 

그래서 간증은 한참 듣다보면 자기자랑으로 흐르기 십상이다. 남다른, 특별한, 다른 사람과 다른, 뭔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어떤 자기만의 독특함을 내세우게 되는 것이다. 의도적인 자랑이 아니라 해도 은연중에 그런 마음이 자리 잡는 것이다. 하물며 그것으로 주의 일을 도모한다면 이를 은사로 여길 때 자칭 선지자가 되기 쉬운 것이다. 그래서 내 이야기를 할 때 주의하고 또 주의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 같은데 그 바탕에는 ‘나의 특별함’을 드러내는 자리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간증이나 체험을 나누는 일은 말씀을 연구하고 증거 하는 일보다 어렵다. 조심스러운 것이다. ‘절대 나는 나를 자랑하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에요.’ 하고 항변할 수 있지만, 누군가는 벌써 부러워하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그것을 모델로 삼아 주께 구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게 왜 나 때문인가?’ 하고 발뺌을 해도 소용없다. 왜냐하면 그래서 알려지는 자신을 은근히 자부하였을 테니까! ‘난 남들과 다르다.’ 하고 여기는 순간 하나님은 공평하지 못한 게 된다.

 

이런저런 얘길 나누면서 내 안에 이는 불편함은 그래서였다. 덩달아 내게 권하고 마치 내게 두신 소명이 그러한데 왜 그걸 사용하지 못하는가, 하는 식으로 안타까워할 때는 조금 민망하기도 하였다. 더욱 신유에 대한 것에는 나는 언제부턴가 그것을 우선하여 바라지 않는 자세를 취한다. 의도적으로도 말이다. 왜냐하면 싫든 좋든 병 고침이나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은 이 땅에서의 안녕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 물론 그것으로 주께 영광 돌리고, 그것으로 주의 일을 하겠다는 다짐이 우선하겠지만, 예수님도 이를 경계하셨다.

 

모르겠다, 나는. 다만 내 안에 두시는 어떤 불편함으로 주의 뜻을 가름해본다. 실제 남들과 다른, 뭔가 특별한 경험을 한 사람은 그 다음에 더욱 주의할 필요가 있겠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본래 일관된 성품의 소유자가 될 수 없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가 다른 법이다. 히스기야의 기도에서 저의 기도응답이 오히려 그의 남은 생을 어찌 다루었던가? 므낫세를 낳기까지! 그래서 특별한 체험을 한 사람은 더욱이 말하기를 주의해야 한다. 하물며 이를 들어 주의 일에 동참한다는 것은 행여 그것이 수단이 되어 다른 이에게도 동일할 것이라는, 하나님을 한정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인생에 궁극적인 것은 구속이고, 이에 유일한 자원은 기도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 1:16).” 이야기란 본래 지어내야 제 맛이고, 교묘하게 만든 이야기는 의도하지 않더라도 자신을 우쭐하게 하는 법이다. 그래서 때론 이야기가 이야기를 하는 경험을 한다. 말을 하면서도 왜 이런 말까지 하나 싶을 정도로 말이 되어지는 경우이다. 이는 거짓말이 되기 쉽다. 자신도 속인다. 말의 위력은 해놓고 보면 그럴듯하여 자신도 긴가민가하는 것이다.

 

나는 내 몸에 고통이 없어지고 보다 안정적인 형편이 되었다고 해서 주의 일을 더 잘할 자신이 없다. 그 또한 주가 하실 일이지 내가 도모해야 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언제도 목사안수를 받기 전 무슨 세미나기간에 그런 자를 만났었다. 마치 나를 위해 보내심을 받은 자처럼 자신의 특별한 간증을 들려주면서 각별히 날 위해 기도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나를 귀히 쓰시려고 하신대나? 뭐라 거절하기 뭐해 듣고만 있었는데 이 자가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갑자기 하늘을 우러러 기도를 하는 것이다. 졸지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그냥 일어나 피하자니 저가 민망할 거 같고 해서 그냥 있었는데. 하필 그 자리는 다들 점심을 먹고 볕을 쬐며 서성이던 마당이었다. 설마 의도된 것일까만!

 

다시 말하지만 난 잘 모르겠다. 예수께서 병을 고쳐주시고 가난한 자들을 돌봐주신 건 그게 목적이 아니다. 그것으로 주의 일을 확장하려는 의도도 아니셨다. 그럴 거였으면 저들이 왕으로 삼으려 할 때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하셨을 리 없다. 체험의 가장 큰 위험은 자신을 특별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신유의 은사란 말 그대로 여러 은사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고, 그 또한 전적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매우 제한적이며 일시적이다. 행여 이것으로 주의 일을 도모하려는 덴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바람은 언제나 순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자신을 헌신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런 자는 자신이 드러날까 항상 조심하였다. 우리의 저변에는 늘 황폐한 나무 그늘이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숨고 감추고 덮어 책임을 전가하려 드는 고약한 속성이 죄의 원조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 우리로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지 이 땅에서의 보다 나은 삶을 향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슬픔은 이 땅의 마땅한 과정이다. 건강도, 사랑하는 이도, 젊음도, 낭만도 모두 지나가는 것이지 다시 회복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우리에게 두시는 고통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허용이다. 여기서 우린 하나님의 작정하심을 붙들 때 고통 이면의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결국 아무리 사탄이 어떻다 해도, 세상이 요지경이고 사람들이 저러저러하다 해도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중요한 것이다. 인생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이해할 수 없는 게 더 많다. 그 저변엔 황폐함만 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굳이 입을 열고 설명하려 드는 것이 악하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기어이 이해하려 들 때 오해가 생기고,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을 알려고 할 때 선악과도 서슴지 않고 베어 무는 것이다. 그 의도는 선하였다. 하나님의 수고를 좀 덜어드리려는 게 아니었을까? 자아실현을 모색하려는 데는 하나님 대신 내가 좀 나서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숨어있는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엉뚱한 말씀을 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

 

그러므로 나는 다윗의 기도를 웅얼거린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시 59:17).” 하나님이 나의 힘이고 나의 요새시고 나의 긍휼이시다.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