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전봉석 2016. 11. 4. 07:34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잠언 4:23-27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시편 61:2-3

 

 

 

걱정이 없으면 대체로 기도도 없다. 기도는 항상 실전이다. 지나간 은혜도 아니고 앞으로 주어지는 은혜도 아니다. 성경은 절망을 개선하라고 말하지 않고 받아들이라고 한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애통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하라, 해서 위로를 얻으라는 것이다. 가장 충실한 삶이란 주신 바 그 가운데서 주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겠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 잠언의 말씀은 매우 소상히 이를 알려준다. 먼저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는 것. 두 말하면 잔소리처럼 모든 문제의 임계점이 마음이다.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마음도, 좌절과 낙심으로 원망하는 마음도, 이에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 이는 예수님이 이르신 말씀과도 같다.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막 7:16).”

 

그러므로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바로 보려면 통찰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특권이 된다.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눈꺼풀은 눈이 바로 보기에 용이하도록 앞을 곧게 살핀다. 이때 눈꺼풀은 항상 무의식적으로 눈동자를 보호한다. 바로 볼 때 딛고 가야 할 행선지를 바로 알게 되는 것이다. 한데 왜 다리를 든든히 하라 하지 않으시고 길을 든든히 하라고 하는 것일까? 이는 이어지는 말씀에서 짐작케 한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무서울 정도로 사람은 대처능력이 탁월한 것 같다. 일련의 어지러운 사회구조를 보면 흔히 말하듯이 ‘배후세력’ 혹은 ‘보이지 않는 손’의 시나리오와 연출은 기가 막히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면서 이슈가 이슈를 덮어 헤게모니싸움을 하는 것 같다. 이때 믿는 자로서 부화뇌동하지 않을 수 있는 것, 먼저 ‘길을 든든히 하라’는 것은 어디로 치우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악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악에서 떠나라는 말씀이 진귀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더러 수도원 생활을 하고 나름의 경건한 생활을 도모하는 것이었구나.

 

정말이지 요즘은 ‘너는 어느 쪽이냐?’ 하고 묻는 시대이다. 그럴 때 우리가 우리의 길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윗의 기도에서 그 답을 찾는다.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환멸이 오고 낙심이 생길 때 마음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완전한 자로 이 땅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없으니까 말이다. 한데 ‘땅 끝에서부터’ 곧 그 절망의 끝에서, 더는 희망이 없는 자리에서 ‘주께 부르짖는다.’ 내가 어찌 해보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찾는 것도 아니라, 부르짖음이란 지극히 단순하여서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하는 정도의 절규다.

 

이에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내가 나를 의지하려 드는 자기 의에서 벗어날 수 있게,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늘 보면 원수는 내 안에 있다. 누구 탓을 하고 무슨 변명을 끝도 없이 늘어놓곤 하지만 이내 마주하는 것은 그것을 선호하는 나의 고약한 심보다.

 

오히려 성경은 고난에 참여하는 자로 설 것을 강조한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영광은 항상 고난 뒤에 있는 것이다. 내게 두신 일상의 모든 절절함에 대하여 이를 허락하시고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작정’을 신뢰하는 것.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히 12:10).”

 

육신의 고달픔도, 생활의 궁핍함도, 마음의 근심도 잠시뿐이다. ‘잠기 자기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그 뒤에 이어지는 것은 ‘거룩’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이를 허용하신다. 이로써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말이다. 아,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2:10).” 결국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 순종에 이르셨다는 것.

 

다들 이를 피하고 개선하여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려고 할 때, 믿는 자의 자세는 그러므로 주께 부르짖는 것이고 주께서 나보다 더 높은 바위로 인도하심을 몸소 누리는 일이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더는 미련으로 질질 끌려 다니지 않는 일. 유행가 태반이 그리움을 부추겨 환상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이라면,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3).”

 

‘다 잘 될 거야.’ 하고 여기는 동안에는 구제할 수 없는 무지의 땅에 머무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무지보다 완고한 게 없고 맹신보다 처절한 게 없다. 결국 죽기까지 도달할 수 없는, 돌이킬 수 없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온갖 말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억측과 억측이 난무하고 저마다 소설을 쓰듯 말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잠 4:5).” 매우 실제이다.

 

곧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6).” 그러므로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7).” 내가 가진 모든 것으로, 할 수 있는 전부를 통해,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8).” 바른 분별력이 필요한 시절이다.

 

가치관이 흔들리고 정체성이 혼란한 시대다. 다 그럴듯하고 것도 맞는 것 같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다. 이러자니 저게 걸리고 저러자니 이게 낭패다. 그러니 이를 어쩐다?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21-22).” 곧 지혜뿐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다. 두려워할 줄 알 때 참 자유도 있다. 그래서 성경은 이르신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20).”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은 그저 세상일뿐이다. 설교 원고를 작성하다, 서성거리듯 느린 걸음으로 산책을 하고, 오후께 아이들이 와서 글을 쓰거나 공부를 하게하고, 여전히 설교 원고가 미진한 것 같아서 우선 놓아두었다가…. 나의 한 날은 세상이 아닌 세상에 있는 듯 평온하였다. 몸은 여전히 그렇고 현실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지만 이를 보고 느끼고 다루는 일에서 나는 먼저와 나중을 구별하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요 14:12-13).”

 

여러 근심과 걱정은 늘 산적해있지만 그것이 해결되는 것보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 훨씬 더 넓고 풍성하였다. 항상 논점을 흐리는 것은 말장난 같은 것이다. ‘만약에, 하지만, ~하다면’ 하는 따위의 말꼬리가 항상 발목을 잡는 꼴이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 1:16).” 나는 분명히 본 자라! 나를 어떻게 이루시고 다스리시며 인도하시는지를 말이다. 결코 ‘만든 이야기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나는 ‘그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이다.

 

이를 단순하게 정리하면,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 4:18-19).” 그러므로 나는,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시 6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