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언 3:3-4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주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시고 응답하소서
시편 60:5
아내에게 덕을 세우는 게 신앙에서 바로미터가 되는 것 같다. 가까운 사람에게 이해 받고 존중 받는다는 일은 가히 쉽지 않다. 서로의 선입견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속속들이 다 아는 것으로 훼방을 받기 때문이겠다. 이에 그 답은 ‘인자와 진리를 떠나지 않게 하는 것.’ 때론 서로의 신뢰를 포기할 것인가, 진리를 포기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기도 한다. 뭐라 따지고 꾸짖고 옳고 그름을 나누기보다 놓아두는, 잠시 말을 멈추는 게 더 나을 때도 있다.
‘인자와 진리를 목에 매고 마음판에 새기라는 것.’ 온유함과 진리는 같은 무게의 표정이 아닐까? 예수님도 그 형제들에게 인정받지 못하셨고, 끝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믿지 않았던 저들로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유 1:17).” 믿음으로 들어섰을 때의 증거다. 또한 이어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20-21).”
저가 말하는 기다림은 막연한 게 아니었다. 오늘 잠언의 말씀에서처럼 ‘인자와 진리를 목에 매고 마음판에 새기는’ 기다림이었다. 이에 ‘거룩한 믿음 위에 나를 세우고’,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하는 이 모두는 궁극적으로 나의 의지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행해지는 것이겠다. 이로써 ‘영생에 이르도록’ 궁극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을 기다리는 일. 아직 장래의 일은 알 수 없지만 그게 가능한 것은 믿음과 성령과 사랑으로 인함이었다.
그것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는다’는 오늘 잠언의 말씀을 되새김질한다. 그런 것이다. 편하고 다 좋다가도 불쑥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일 때 자존심이 상한다. 연일 터지는 사건을 두고 뭐라 하는데, 지나가는 말처럼 ‘너도 똑같아!’ 하는 말에 나도 모르게 화가 나는 것이다. 내가 뭐? 싶은. 이만하면 됐지? 하는. 그것으로 또 말씨름을 하느니 입을 다문다고 했는데 속이 편치 않은 것이다. 결국 자존심이었다. 툭, 건드리면 욱, 하고 올라오는 못되고 고약한 악의 성질이었다.
하긴 진리가 형이상학적일 때 오히려 경건하기는 쉽다. 막연하고 낭만적일 때 고상을 떨기 쉽고, 누구 앞에서는 더러 인자하고 온화한 거룩을 흉내낼 수도 있는 것이다. 한데 이게 지독하게 현실적일 땐 쉽지 않다. 그러자니 적당한 거리를 두고 엄히 대하고 냉정해야 한다는 소린데, 글쎄 그러고 사는 부부도 있을 수 있겠으나 나는 또 쉽지 않다. 그래서 늘 가까이에서 보는 가족에게 나의 정도가 믿음이 성장한 분량이 되겠다.
하긴 본래 본질적인 것이 삶 가운데서 증명되는 일은 쉽지 않은 법이다. 남들에게 과장하거나 축소하여 나타내고 설명할 수는 있어도 실제 삶으로 느끼는 정도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해서 이를 어쩔까 생각하다가 마주한 것이 아내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였다. 그리 여기면 그리 여기는 대로 때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걸 왜 그리 여겼냐고 따지고 묻고 하다보면 덩달아서 ‘너가 어떻니, 니가 먼저 그랬니’ 하는 식으로 싸움이 된다. 침묵은 때로 주께 올려드리는 수많은 말이 된다.
요즘은 욥기를 새삼 읽고 있는데, 오늘 벌어지고 있는 이 사회의 모든 문제가 그 안에 함축되어 있는 것 같다. 고통의 본질적인 측면에서부터 사람의 자기변호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 가운데 그럼에도 하나님을 중심에 두려고 하는 욥의 진술에서 큰 교훈을 얻는다. 그 가운데 아름답기까지 한 표현을 여러 번 읽었다.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누나(욥 6:15).” 그게 그러니까 사람이란 그렇더라. 좋은 때나 좋은 것이지 늘 한결같을 수는 없는가보다.
서로의 감정이란 게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다.’ 졸졸졸 그 밑에 깔린 숱한 돌들의 다양한 크기와 모양과 무게만큼이나 조변석개하는 것이다. 엊그제의 말과 오늘의 진술이 엄연히 다른 사람들의 발 빠른 자기변명을 들으면서도 알겠다.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간다.’ 영원히 함께 할 줄 알았던 동지가 오늘에는 원수가 되는 것이다. 곧 “얼음이 녹으면 물이 검어지며 눈이 그 속에 감추어질지라도 따뜻하면 마르고 더우면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지나니 대상들은 그들의 길을 벗어나서 삭막한 들에 들어가 멸망하느니라(16-18).”
결국 우리의 관계란 덧없음이라. 문제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만 남는다. 때론 말씀이 너무 하나님과 나의 문제로만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들 때도 있지만 그게 아닌 것이다. 다 늙은 노모가 병원장인 아들을 고소하며 피켓시위를 하질 않나, 어린 자식의 사체를 방기하고 자기놀음에 빠진 부모가 있지 않나! 이를 지극히 극단적인 예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아내 말처럼, ‘나도 똑같다.’ 아니라고 말할 수 없어서 화가 났던 것인지도 모른다. 난 저들과 달라! 하는 자기 확신이 궁색하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자존심이란 찢어지기 쉬운 문창호 같아서 풀을 먹어 팽팽할 땐 파르르 떨고 침을 묻혀 찌르면 금세 구멍이 나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관계란 건 ‘그들의 길을 벗어나서 삭막한 들에 들어가 멸망하느니라.’ 하는 욥의 진술이 감탄스럽다. 그처럼 냉정하고 바른 말만 일삼던 니체도 병들어 골골할 땐 누구보다 난폭한 양아치 같았다. 그러니 사람이란 얼마나 가소로운가. 권세가 하늘을 찌를듯하여 뭐 하나 남부러울 게 없었을 텐데, 검찰에 출두하며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하는 사람들의 하나같은 자질에 소름이 돋을 정도이다.
이에 오늘 잠언은 거두절미하고,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 3:5).” 이보다 더 명징한 진리가 또 있을까?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 자신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 그러므로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6).” 다른 더 좋은 수가 있을까? 욥의 이야기는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함축하여 진공상태로 포장하였다가 오늘에 해동하여, 현재 이 나라의 숱한 문제들 같지 않을까? 많이 가지고 충분히 누린다는 것의 부질없음에 대하여도. 나름 저마다의 논리와 기준으로 선을 삼는 데 따른 한계점이나. 지지고 볶고 서로를 질타하고 응징하는 악다구니까지.
이내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7-8).” 오늘의 잠언은 이와 같이 방도를 제시한다. 스스로 내가 나를 옳다고 여기지 말 것. 행여 그것을 말씀을 운운하며 하나님을 등에 업고 고상을 떠는 일이라면 이보다 더 무서운 권세는 없을 것이다. 드러나듯이 많은 목사의 그릇됨은 단지 저 혼자의 문제로 끝나는 게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악을 떠날 수 있는 것은 주를 경외함뿐이다. 두려워할 대상을 바로 알고 도우심을 바라는 마음도 명확해야 한다. 사람을 빙자하면 사람으로 망하게 돼 있다.
그러므로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15).” 그 어떤 값어치보다 소중한 지혜를 사모함이라니!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6-27).” 도대체 말씀 앞에서는 숨길 수도 없다. 감추고 도망칠 수도 없다. 살면서 분이 날 수도 있겠으나 이를 저녁에까지 품지 말라는 것. 고로 더 끙끙거리는 것은 사탄에게 틈을 주는 일이 된다!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며 또한 나의 사사로운 일상을 통해서도 결국 우리는 얼마나 염치없고 죄악 되며 가증한지를 여실히 느낀다. 그러니 내가 무엇을 누구를 의지할까? “대저 여호와는 네가 의지할 이시니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잠 3:26).” 주가 아니시면 나는 단 한 시도 의로울 수 없음을. 공연한 고백이 아니라 매순간 내 안에 이루고 있는 온갖 악심을 마주한다. 일일이 나열할 수도 없을 정도로 밉고, 싫고, 저주하고, 욕하고, 증오하는. 만일 주께서 내 발을 지키시지 않는다면 아, 나의 이 징그러운 실체를 어찌 감당할까.
나에 대한 항변이 나를 몰지각하게 만든다. 몰지각하고 몰이해한 자리에서 누구를 판단하고 비난한다는 일은 역설이 아니다. 문제는 문제를 보며 비아냥거리듯 희화화하는 무리의 가벼움에도 있다. 빈정거림은 결코 역설과 다르다. 우스갯소리가 난무하여 가벼운 농담이 무서운 진실을 호도하는 데까지 이른다. 어쩌면 우리가 숭배하듯 받드는 예술의 한계인지도 모르겠지만, 맹신은 어떤 식으로도 구제될 수 없는 무지다. 주님은 이에 입을 열지 않으심으로 말씀이 되셨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일련의 사건과 상황이 너무 무차별적으로 쏟아지고 있는 이때에 나 하나쯤이야 하고 던진 돌 하나가 수천수만 개의 돌무더기가 되어 날아간다. 참 신기한 건 쥐어 터져 맞을 때까지 모른다는 것이다. 비탄에 빠져야 비로소 터져 나오는 게 아우성이다. 그러니 사람이란 결국 갈 데까지 가 봐야 안다는 것인가!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3-25).”
오랜 자기 소신에서 벗어나 비로소 주 앞에 선 베드로의 확신이 값지다. 정답은 예수시다. 다른 더 좋은 수가 없다. 말씀 앞에 앉아 나의 나 됨을 주 앞에 고하며, 참 지혜를 구한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잠 3:18).” 곧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 (셀라)(시 60: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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