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
잠언 15:30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시편 72:18-19
추적추적 겨울을 재촉하며 비가 내렸다. 을씨년스런 날씨와는 달리 실내는 눅지근하였다. 안정적이었고 평온하기까지 하였다. 아이에게 몇 번 문자를 했다가 지우고 뭐라 말을 걸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러려니 하고 있어야 하는데, 마음은 늘 저 혼자 시달렸다. 그러고 있는데 우연처럼, 가까운 영화관에서 <제자도 ‘제자, 옥한흠’>이 상영되고 있는 걸 알았다. 비실비실 비가 내리는 거리를 걸어 영화관으로 갔다. 혼자 그러는 게 참 오랜만이었다. 표를 끊고 햄버거 집에서 느긋하게 책을 보다 들어갔다.
이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큰 상영관엔 나 혼자였다. 오전 내내 입을 삐쭉거리고 있었더니 하나님이 또 이런 호사를 내게 선사하셨는가 싶었다. 아이들 어릴 때 ‘사랑의 교회’를 거반 일 년 반 남짓 다녔었다. 그때는 매주 옥한흠 목사의 설교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하나님을 늘 품고 사는 사람의 온화함과 말씀을 쪼개는 통찰력과 특유의 음성으로 청중을 압도하는 그의 설교는 가히 가공할 수 없는 ‘성령의 역사’였다. 직접적인 기억이 있어서인지, 나는 다큐멘터리를 보는 내내 먹먹하였다가 울먹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내용은 기대했던 것보다 미진하였다. 프레임을 잘못 잡은 듯 자꾸 논지에서 벗어나는 느낌이었다.
이 비탄의 시절에 개탄스러워하는 사람들의 아우성이 그 숫자를 더해가고 있는 때에 나는 무엇을 붙들고 어디를 바라볼 것인가, 하는 데 따른 실마리가 되어주었다. 그럼에도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신 바 오늘을 충실하게 사는 것. 누구와 견주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 본연의 의무를 다하는, 다니엘과 같은 자세가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마 24:15-16).”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갔으나 늘 구별된 자리에서 성별된 삶을 살았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충성을 되새겨야 했다. 이 혼돈의 시대에 중심을 잡는 일은 하나님만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관망자로 염세적인 자세를 취하는 게 아니다. 저들 이방 나라에서 주어진 역할을 주의 이름으로 성실히 행하였다.
분명히 마음은 어렵고 몸은 고달픈데 그 심중에 이르기를 하나님을 바라는 마음이 우선할 수 있는 것. 곧 ‘눈이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한다. 사위는 깜깜해도 그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좋은 기별’을 붙든 까닭이다. 이는 견고하게 설 수 있도록 ‘뼈를 윤택하게’ 한다. 내 의지 내 노력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 마음 하나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인데 감히 하나님의 일을 운운하며 내가 마치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주는 것처럼 굴어서야 쓰겠나. 이어서 보는 오늘 시편의 말씀이 그 답이 된다.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그 경외감을 잃지 않는 것.
그러므로 종당엔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하는 말씀 앞에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아멘으로 화답하는 삶이 복되었다. 한국 교회를 위해, 내 나라와 내 민족을 위해, 나아가 교회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무엇을 위하는 건 하나님의 역사이고 나는 그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흔들리지 않는 게 중요하였다. 엉뚱하게도 <제자도>를 보며 조금 다른 관점으로 그 내용을 이해하였다.
몇 명이나 구원하고 왔느냐? 무슨 일을 하다 왔느냐? 과연 주님은 그런 데 관심을 보이실까? 여론과 숫자와 사람들의 관심이 기준이 되고 잣대로 삼는 세상이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날조한다. 더러 한복을 차려입고 태극기를 흔들며, 교회의 이름으로 거리로 나가는 이들의 정신 빠진 모습에 아찔하다. 여러 종단과 함께 앞서 거리를 행진하는 여타 목사들의 사명의식이 두렵다. 성경은 일러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라고 하였다(출 23:2). 나름의 가치와 기준이 있겠으나,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게 사명일까?
사도시대를 운운하고 더러는 선지자적인 삶을 주장하며 뭔가 남다른 역할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그 와중에도 다니엘은 묵묵히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살았을 뿐이다. 사회 정화를 위해 혹은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이렇게 있어도 되나? 싶게 마음이 불안하다가도 이 또한 하나님이 내게 두신 현실일진대 묵묵함으로 무던할 수 있겠다. 몸이 여의치 않으면 여의치 않은 그 자리에서, 환경이 바람직하지 않으면 바람직하지 않은 그 모습으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다. 요즘은 계속 목격하는 것이 나와 주님의 문제다.
마치 내가 아니면 저 아이가 어찌 될 것 같은 마음으로는 어림도 없다. 나는 속 끓일 뿐이고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며 아이를 생각하는 게 전부다. 교회를 이루고 가정을 건사하는 일조차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잠 15:3).” 주가 감찰하신다. 누군 농군으로 살고 누군 목사로 살고, 누구는 평신도 제자훈련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누구는 노동을 예배로 일구며 살고…. 주신 바 맡기신 그 생을 다하며 온전히 주만 바라는 것.
‘숫자의 폭력’ 앞에 사람들은 속수무책이다. 더욱이 SNS시대의 폐단은 저마다 숫자의 노예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좋아요’ 숫자에 연연하고 조회수에 따라 돈벌이가 되는 세상이다. 무료앱이 무료가 아닌 것은 익히 저마다 그 숫자에 따라 광고가 붙기 때문이겠다. 나의 불순한 마음 때문일까? 교회 성장에 있어 그 숫자를 무시할 수 없는 목사의 삯군스러움이 불편하였다. 염치없지만 결국은 돈이다. 사람 수는 곧 돈과 직결되기 때문에 다들 혈안이 돼 있다. 민주주의가 갖는 가장 큰 폐단이 다수의 논리다. 그 앞에 교회는 맥을 못춘다.
과반수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는 한, 초점은 흐려지고 논지는 대중화될 수밖에 없다. 조회수가 돈이 되는 세상에서 몇 명이 광장에 모였는가, 하는 문제는 일견 위협적이기까지 하겠다. 그러나 성경은 결국 나와 하나님과의 문제를 언급한다. 노아의 때에 하나님의 관심은 노아였다. 노아를 통해 어찌 세상을 바꾸시려는 게 아니었다. 아브라함이 우선이었고 하나님의 관심의 전부였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함’을 우선으로 여기는 하나님.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읽혔다. ‘지도자는 하늘이 내지만 지배자는 땅에서 난다.’ 그래서 지도자는 조바심내지 않고 숫자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배자는 불안하여 숫자를 세고 억압을 느슨하게 할 수 없다. 나는 어리석어서 그런가? 그 끝이 다르지 않아 보인다. 누구나 ‘그 다음’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가 따라붙는다. 완고한 불신앙보다 희석된 신앙이 더 두렵다. 아이 하나로 쩔쩔매는 사람이라 감히 이 땅의 교회를 운운할 처지가 아니다. 다들 저마다의 ‘하나님과 나’의 관계로 설 것이다.
그러니 나는 무엇을 붙들 것인가. “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시 72:17).” 이미 답을 아는 사람은 풀어내는 과정에 연연하지 않는다. 더하든 빼든 주의 이름이 영구함이다.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삼상 12:22).” 나의 됨됨이도, 이루어가는 공로도 아니다. 그것은 내가 살아내는 과정의 내 몫이지 궁극은 ‘그 크신 이름을 위해서’이다.
늘 울먹거리고 시큰둥하며 불쑥 화를 내다 우울해하고 또 실의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지만, 나는 주 앞에 아뢴다. 죽었다 깨어나도 나 하나 제대로 이겨낼 수 없는 죄인이다. 무력하고 나약한 이 몸을 주체할 길 없고, 아이의 마음은커녕 내 마음조차 주도할 길 없으며, 남들처럼 제대로 된 사역(!)은 애저녁에 글렀다. 누구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위로가 되기보다 위로를 바라며 살기도 버거운 터라 감히 '나는 어떻다'고 말할 수조차 없어 송구할 따름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건 하나님과 나의 문제다.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시 5:11).” 나는 거창하지 못하게 이와 같은 말씀만으로도 감지덕지다. 곧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9:10).” 정말이지 너무 염치없지만 그런데도 그래서 주님 아니면 살 수가 없어서, 빌빌거리면서도 주를 의지할 따름이다.
그때마다 나를 위로하시고 또 용서하시고 다시 새 힘 주시는 하나님 앞에, 이처럼 면목 없이 아뢰는 것.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시 36:7).”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인데, 여전히 나의 못난 자아는 내 주장에 따라 바라고 구하기 일쑤이니.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38:21).” 그저 훌쩍거리며 주를 바랄 뿐이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51:10).”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0) | 2016.11.17 |
---|---|
삼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0) | 2016.11.16 |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0) | 2016.11.14 |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0) | 2016.11.13 |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0) | 2016.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