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잠언 14:13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잠언 71:14
마음이 어려워서일까? 말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읽고 읽는데도 자꾸 눈길이 머무는 말씀이 있었다. 내 안의 슬픔이 있다는 것. 아무렇지 않게 좀 의연하게 굴려고 해도, 그 끝은 근심이라는 것. 곧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은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느니라(10).” 괜히 민망하고 서러운 생각이 들었다. ‘기대를 하지 말아야지’ 하고 늘 다짐을 하지만… 그런 내게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겠다!’는 음성으로 오늘 말씀이 들린다. ‘항상’이라는 표현에는 그 무게감이 상당하다.
‘이래도 계속할 수 있겠어?’ 하고 현실은 성가시게 자꾸 묻는다. 준비했던 점심을 집으로 가져와 먹었다. 우울한 심정으로 자전거를 타고 산책을 나갔다. 아무렇지도 않게 구는 아내와 딸이 서운하다가도 그것이 고마웠다. 덩달아 우울해하면 것도 감당이 안 될 일이다. 서운하고 서럽고 답답한 마음으로 자꾸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데, 일부러 그러시는가? 유난히 허리가 아프고 어깨가 결렸다.
말씀을 읽고 깨닫고 삶에 가져오려고 할 때, 이를 실제에 감당하는 일은 이해의 몫이 아니다. 가령 중보기도의 중요성을 요즘 부쩍 느끼게 하신다. 읽는 책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일깨운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기도하고 바라는 것에 있어 일부러 그러시는 듯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내가 기도했던 기도가 도로 돌아와 나의 귓가에 머문다. 웅, 울리는 어떤 서러움 같기도 하다. 그런데도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더욱더욱 주를 찬송하겠다니!
이번에는 ‘항상’과 ‘더욱더욱’이 마음이 와 닿는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뜻한 대로 뭐 하나 이루어지는 게 없다. 오히려 의욕은 떨어지고 시무룩한 마음에 맞춰 몸은 아프다. 그런데서 ‘항상’은 다시 주목하게 한다. 말 그대로 ‘기쁠 때나 슬플 때나’다. 그럴 수 없을 때도 ‘항상’ 소망을 품겠다는 것. 더는 소망이 없다 싶어 실의에 빠질 때는 오히려 ‘더욱더욱’ 마음을 다해 주를 찬송하겠다는 것이다. 찬송이란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주를 신뢰합니다.’ 하는 확고한 자랑이다. ‘그러실 리 없지만 그러셔도 좋은’ 더욱더욱 주를 바라는 것.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마음만 짓눌린다. 생각하기도 싫고 마음 쓰기도 싫어서 멍하니 딴짓만 했다. 정 주지 말아야지. 마음 더하지 말아야지. 엉뚱한 각오도 하면서 돌아누워 뚱했다. 훌쩍 떠나 어디 멀리 밤낚시라도 갔으면…. 어쩜 이렇게 마음은 늘 제자리인지 모르겠다. 과연 이 길이 맞나?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 아내와 딸애와 같이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오면서 문득 이 두 사람은 다른 교회에 다니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그리곤 이런 생각들이 지겨워 끙, 하고 돌아누웠다. 만사가 귀찮고 서러웠다.
욥이 괴로워하며 풍자하여 말한다. “욥이 또 풍자하여 이르되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의 호흡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숨결이 아직도 내 코에 있느니라)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리라(욥 27:1-4).” 나의 결점과 모순을 어찌할 수 없어 해학적으로 살피는 구절에서도 ‘하나님의 숨결’을 의지하고 있다. 저는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다.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다.
내 안에 드는 여러 생각이 또는 서러움이 정작 하나님께 향할 때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않고 내 혀가 거짓을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과장하지도 또는 억지웃음을 짓지 않기를. ‘다 괜찮아. 잘 될 거야. 하나님의 뜻이야.’ 하는 식으로 나를 무안하게 하지도 않겠다. 서운한 건 서운한 거고 답답한 건 답답한 거다. 내 안에선 나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크다. 스스로 위로하려 드는 자위적인 기도도 있다. 주님은 아시지요? 하는 스스로에 대한 위로. 한데 이를 하나님이 물리치시고 괴롭게 하신다.
얼마나 내가 하나님 앞에서조차 정직하지 못하였던가? 괜히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겉으로는 주를 찬송하며, ‘다 잘 될 거야’ 하고 스스로를 다독이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밀어내고 내가 다시 마음을 다잡고 아자아자, 하는 결의였다.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서는 평안을 얻었다가 돌아서기 무섭게 무거운 마음에 짓눌려, 아무도 나를 모른다며 서러워하곤 하는지….
그래도 계속 할래? 이대로 있어도 되나? 싶은 목소리가 전에처럼 위협적이지는 않아도 여전하다. 뭐라 대답하기조차 싱거운 마음이지만 그렇다고 달리 뭘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게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오늘 잠언은 이를 분명히 하신다.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행동을 삼가느니라(잠 14:15).” 달리 더 나은 길이 없다.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인자와 진리가 있으리라(22).” 맞는다면, 지금 내게 주시는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어떠하든 주의 인자와 진리가 내게 떠나지 않을 것이다.
누굴 보고 하는 일도 아니고 심지어 아내와 딸애를 위해서도 아니다. 결국은 나와 주님의 관계다. 하나님과 나의 문제다. 온갖 말이 머리를 맴돌지만, 일어나야 할 시간에 일어나 앉아 말씀 앞에 나를 세우는 일이야말로 자기의 행동을 삼가는 일이었다. 때로는 누구 목소리가 아니라 내 목소리가 나를 더 어렵게 만든다. 온갖 말을 끌어다 나를 다그치는 것이다. 이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내가 서러워하든 불안해하고 답답해하든, 주의 인자와 진리는 변함이 없으시다!
나는 기도한다. “내 하나님이여 이 일로 말미암아 나를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내가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느 13:14).” 기도하고 또 기도할 뿐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시 16:1).” 아이를 생각하고, 교회를 위해, 맡은 바 그 주어진 역할을 생각하며 기도했던 것이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 내 귀에 도로 들린다.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주의 음성으로 돌아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사는 동안 근심이 없을 수 없겠으나 분명한 건 견고한 의뢰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잠 14:26).” 다른 무엇을 바랄 수 없다는 게 오히려 힘이 된다. “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심이니이다(시 71:3).”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령하신다. 그 명령으로 주는 나의 반석이요 요새가 되신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5).”
이런데도 계속 할래? 하고 물으시면 나에게 남은 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의뢰뿐이다. 좋아지든 더 나빠지든, 아무리 자괴감이 나를 짓누른다 해도 그 누르는 힘에 비례하여 나는 오직 주만 바랄 수밖에. 달리 무얼 할 수 없다는 게 이처럼 큰 위로가 될 줄이야.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38:21).” 주께 아뢰고 또 주만 의지할 수 있다는 것.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40:17).”
아무리 억지를 부리고 떼를 써도, 요지부동이신 주님은 때로 너무 서럽다. 억울하고 답답하다. 한데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다. 기어이 엄마 품에 안겨서 울음을 그치는 아이처럼, 주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낙심과 실망이 되지만 그래서 주를 기억한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42:6).”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51:10).”
이런저런 감정으로 요동치는 마음이야 더는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오직 주만 바라라.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57:7).” 나는 자신할 수 없으나 그런 나를 끝까지 놓지 않으실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63:1).” 이룰 수 없고 다다를 수 없어 더욱 주를 앙모함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69:5).” 그러니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83:1).” 곧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145:1).”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0) | 2016.11.16 |
---|---|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0) | 2016.11.15 |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0) | 2016.11.13 |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0) | 2016.11.12 |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0) | 2016.1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