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삼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전봉석 2016. 11. 16. 07:41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잠언 16:20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시편 73:26

 

 

 

삼가, ‘존경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고 정중하게’ 말씀에 주의하는, 곧 ‘마음에 새겨 조심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는다는 오늘 말씀 앞에 한참을 앉았다. 이름 하여 ‘복’이라면 어떤 것일까? 지복은 ‘더할 수 없는 행복’으로 일컬어지는 것인데, 이 땅에서의 것으로 가늠할 수 있을까? 소망은 막연하여서 되레 고통이 되기 마련인데…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지나친 낙관주의가 우리를 병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묵상이란 존경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고 정중하게,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것이다. 이내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 좋은 것을 얻는 일이다. 삶에 있어 주의 뜻을 바로 알기란 지난하고 뭉근한 일이기만 하다. 이쯤하면 됐을까? 싶은 데서 영락없이 넘어진다. 내 안에는 듣고 싶은 말이 있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하는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는 지친 되뇜이 문제다.

 

예수님을 보자. 저는 결혼도 안 했고 집도 없으나 학벌도 없고 이웃하는 동네 이상을 벗어나 대도시로 나가본 적도 없으시다. 성경을 쓰지도 않으셨고 변변한 돈벌이도 하지 못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 8:23).” 오로지 관심은 천국으로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죽음으로 치닫는 거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18:36).”

 

다시 오늘 말씀을 묵상한다. ‘좋은 것을 얻나니’ 이는 이 땅에서의 복이 아니다. 그러자면 굳이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로 살 이유가 없다. 시편 73편의 말씀은 읽을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다. 어째 저들이 저처럼 잘 되는가, 싶어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2-3).” 부러운 건 사실이다. 은근히 바라는 것도 숨길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복’하면 여지없이 지복(至福)을 염두에 두고 이 땅에서 잘 되기를 우선한다.

 

스스로 자초한 일에 대하여 더는, 하나님은 내버려두셨다. 어쩌면 그것으로 멸망은 연장되는지도 모른다. 회개의 기회는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내버려두심은 극한 인내의 손길이다. 이미 동성애가 합법화되고 낙태를 보장하며 조만간 다자연애가 법적으로 허용되고 소아성애와 근친상간이 보편적인 게 될지 모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롬 1:24).” 이 끝 간 데 없는 세상에서 과연 우리의 복이란 무엇일까?

 

따로 빈들에 가시고(마 14:13), 따로 한적한 곳을 찾으시며(막 6:32), 따로 기도하실 때에 (눅 9:18)… 바로 지금의 나에게 그와 같이 따로 그리하시는가? 생각하였다. 지겨울 정도로 혼자였다. 외롭다고 쓰고 울컥하여 눈물이 핑, 돌았다. 대체 이게 뭔가? 싶은 마음은 나를 자꾸 우울하게 끌어내렸다. 그러다 문득 이 바탄의 시절에 말 그대로 벌어지는 일들이 개탄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때에 나에게 두신 특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성실하심을 붙들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오히려 가장 안전한 곳에 두심으로 더욱 주를 내밀하게 바라고 구할 수 있게 하시려고, 이 혼돈의 시대에 흔들리지 않게 하시려고 말이다. 막연하게 그럴 것이다, 하는 정도의 소망이 아니라 그게 전부인 그것으로 이미 충분한 것이게 하시려고 나와의 친밀한 시간을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우울하다가도 우울하여서 주를 다시 찾게 된다. 공연히 마음이 힘들고 어렵다가도 그것으로 삼가, 주의 뜻을 살피고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여겼다.

 

오스기니스의 <르네상스>를 읽고, 로이드 존스의 <타협할 수 없는 진리>를 읽었다. 무엇을 읽든 하나님이다. 어떤 마음으로 시들하여도 하나님이다. 모든 처음과 끝은 하나님이시다. 뭐 때문에 마음이 불안하다가도, 누구 때문에 속상하고 어렵다가도 결국은 오직 하나님이다. 이보다 더 막강한 특권이 또 있을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일상에 쫓기고 가진 게 적당하며 사람들로 둘러싸인 가운데서는 과연 ‘의의 주림’을 경험할 수 있을까? ‘목마름’을 느낄 수 있을까?

 

한참을 서서 창밖을 보다 전혀 다른 세상에 내가 와 있다는 아찔한 느낌도 들었다. 내 안에 두시는 통증으로 목마름을 호소할 수 있었다. 구걸하듯 마음을 두기는 싫었다. 몇 번 연락을 해볼까 하다 그만두었다. 그러니 그런 게 무슨 선한 것을 이루었던가? 가만 두자. 그러므로 기도하고 그래서 생각하기를 그치지 말자. 빤한 소리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평강하다, 괜찮다, 다 잘 될 거다, 하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말할 수 없는 자의 비애는 그러므로 더욱 주를 바라보게 하였다.

 

마침 아이들도 시험 때라 더더욱 아무도 오지 않았고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다. 내게 두시는 날들의 서늘한 침묵이 때론 과중하다. 통화 무제한인 전화기를 들고도 마땅히 전화할 사람이 없어 이상했다. 그런들, 예전의 친구들과 이제는 나눌 이야기가 없다는 게 서늘하였다. 확연히 달라진 나의 오늘이 때론 낯설다. 문득 드는 바보 같은 생각 하나, 이게 맞나? 내가 지금 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혹여 은둔 아닌 은둔으로 현실도피를 합리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은 제멋대로 나를 휘둘러댔다. 그러니 또 어쩔 것인가? 그래서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다. 다른 방법이 없다.

 

주님만 바라며 사는 일은 참 불안한 일이다. 막연하여서 때론 미친 게 아닐까, 싶다. 적고 작은 것으로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시대다. 뭔가 이루고 거두고 가시적으로 성과를 내야 이를 통계로 환산하고 다른 수치와 비교할 수 있다. 숫자의 시대다. 이곳으로 교회를 옮겨 온지 몇 달이 됐고, 며칠째 혼자 이러고 있는 것인지… 불안해지는 것이다. 이대로 있어도 되는 것일까? 뭐라도 다시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주님 이게 맞나요?

 

어디서 읽은 말 중에, ‘교회 안에 세상이 있으면 세상은 세상을 박해하지 않는다.’ 고로 내가 이처럼 불편하고 어렵다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정상인 것 같기도 하고. 세상에 있되 세상이 아닌 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사명일 거였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다들 분주히 먹고 사느라 정신이 없는 세상에서 예수님은 팔자 좋게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다. 직업을 갖고 장래 계획을 세워 노년을 준비하지도 않으셨다. 더 나은 인맥을 쌓고 좋은 지위와 명성을 추구하지도 않으셨다.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마 22:21).” 그 구분의 명확함에 대하여 묵상하였다. 한 날의 수고에서 나는 얼마나 하나님의 것을 가이사에게 혹은 가이사의 것을 하나님에게 바치고 있었던가? 혼재된 마음의 무질서가 정작 혼자 있을 시간을 빼앗아가는 게 현실이다. ‘회색 양복을 입은 시간 도둑들.’

 

주님은 그런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갈 바를 알지 못해 마음이 어수선할 때에,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14).” 그러므로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16).”

 

내게 두신 은택이 참으로 귀한 거였다. 때론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시 73:26).” 이를 절절이 확신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그러므로 기도한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24-25).” 이로써 오늘 잠언의 말씀은 명쾌하였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잠 16:1).” 이에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3).”


달리 더 좋은 수를 찾아 배회하지 않게 하시는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며.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 73:16-17).” 나를 주의 성소에 두시는 이의 긍휼하심이여.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