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잠언 17:3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시편 74:16-17
그리 두시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속이 볶이자 내 안의 검은 물이 일렁거렸고 금세 침전되었던 부유물이 떠올랐다. 원망과 시기와 질투는 물론이고 더 암울하여서 더 극적으로 슬픈 슬픔을 길어 올렸다. 차마 입 밖으로 표현할 수 없어 그 내용을 혼자 메모해보다 깜짝 놀랐다. 고등학교 때 아니 더 어릴 적에나 품고 있었던 슬픔이 고스란히 남아 있던 것이다. 아, 이 징그러운 본성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 한참 빠져 있던 ‘에니어그램’으로 살펴본 아홉 가지 성격 유형 가운데 나는 언제나 4번 유형이었다. 그러니까 더 비극적으로 슬픔을 확대하여 재생산하는 것이다.
종일 그러고 있었다면 이 얼마나 한심하고 싱거운 일인가. 그러면서 또 나의 특성은 그래서 더욱 어려운(?) 책을 파고드는 유형이기도 하다. 벌써 책상 위에 서너 권의 책이 펼쳐지고 한참을 읽다 또 다른 책을 건네받고 무작정 읽어 내려가는 식의 의미 없는 독서습관이다. 읽고도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지 못하면서 읽는 데 정신을 파는, 그야말로 현실도피의 수단인 것이다. 생각은 저 멀리 있고 마음은 혼자 쑥덕거리며 몸은 늘어져 어디가 자꾸 아픈, 그러면서도 병적으로 책에서 눈을 떼지 않는 활자중독증인 셈이다.
어제 그제 혼자 뚱해서 점심도 먹으러 가지 않았다. 뭐라 말하면 대꾸도 안 하고, 급기야 딸애가 어디 아프냐고 묻는데도 말도 없이. 어릴 땐 어디 멀리 휘익 나돌아 다니기라도 했지. 이건 원, 별 수 없이 처박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이게 어느 정도냐 하면 가령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연신 주의 이름을 부르다 아침에 적어올린 묵상글을 읽는다든지, 심지어 블랙박스 사용설명서를 읽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누워 책을 읽다 그러고 있는 내 자신이 낯설어서 왜 그런가 하고 적어보았더니, 여전히 어릴 적 감정에 눌려있는 것이었다.
유난히 거절을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거절 받을까봐 먼저 돌아서서 마음을 닫고는 하였다. 지금 어쩌면 아이를 생각하며 여전히 그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를, 아이를 붙드시고 그 마음을 주장하시기를 위하여 기도한다지만, 어쩌면 나의 고질적인 회피본능은 아닐는지, 오스기니스의 ‘복음주의자의 선서문’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다. 로이드 존스 목사의 ‘성령론’을 다시 읽으면서 그런 마음이었다.
생각이 너무 많다.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시 94:11).” 점심도 거른 채 뚱해 있는데, 아이들 시험이 끝나 모처럼 일찍 수업을 끝냈다며 아내가 나왔다. 계면쩍기는 했지만 장보러 가자는 걸 마다하지 않고 따라나서 칼국수로 저녁을 먹었다.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잠 18:22).” 이 별난 성격의 소유자를 그래도 묵묵히 지켜주는 사람은 아내뿐이다. 퇴근하고 딸애까지 와서 함께 장을 보고 들어왔다.
그때그때 바로바로 이뤄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은 늘 애달프게 하신다. 애가 닳는다는 것, 속이 타는 것 같고 마음이 오그라드는 것처럼 힘에 부친다는 것.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잠 17:3).” 대체 왜 그러시는 걸까? 한껏 못 이기다 지나고 보면 알 수 있다. 나의 본성을 마주하게 하시고, 그 역겨움이 내 안에 여전하였다는 데서 더욱 더 주를 바라게 하시려고. 아이를 생각하는 일에서도 그처럼 아버지는 나를 생각하시고 오랜 기다림으로 참고 견디셨구나, 하는.
연단하여 비로소 순도 99% 본연의 성분만 남게 되는 것. 내 안에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영을 두시려고 매순간 사르시고 끌어올려 마주하게 하시는 거였다. 결국 누구를 향한 게 아니라 복음은 나를 위한 것이었다. 항상 ‘너를 위하여’를 외치면서 정작 ‘나를 향하신’ 주의 마음을 외면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성경을 유리처럼 내다볼 때 너가 보이고, 너 때문이고, 너를 위한 너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하지만 거울처럼 볼 때 내가 보이고 다 내 이야기로 나 들으라고 하시는 소리다.
필리핀 동생이 아들애 여자 친구 사귀는 걸로 뭐라 한 모양이다. 아내가 넌지시 귀띔을 하는데 뭐 굳이 내가 뭐라 할 소리가 있나 싶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노파심이야 늘 생기는 것이고, 그걸로 기도하라고 하시는 거지 뭐라 훈장(訓長)하라는 건 아닐 것 같았다. 딸애 문제도 그렇고… 하물며 내 마음도 내 말을 듣지 않는데 뭐라 한들. 아이에 대한 어려운 생각과 마음은 그것으로 연단하시는 주의 뜻을 주목하는 데 유익할 거였다.
그 하나님은 말하나마나 나보다 더 낫다.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어디서 조급함을 디밀고 선입견을 들이대나 말이다.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시 74:16-17).” 이보다 더 분명한 확신이 또 있을까? 다 주의 것인데 그걸 내 것인 양 어쩌지 못해 안달을 부리는 게 어리석었다. 하긴 마음이 또 저 혼자 그러는 게 마음이니까 별 수 없다지만, 누구를 향한 것이면 더욱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애면글면 속만 끓이는 것 같아도 이내 못 견디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기도가 아닐까? 이젠 좀 학습이 됐을 법도 한데 여전히 휘청대는 것이 가관이다. 돌아누워 끙끙 앓는 꼴이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지 못해 안달을 떠는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 같다(왕상 21:4). 이에 이세벨이 사악을 떨어 나봇을 살해하는 끔찍한 장면을 소리 내어 읽다가 그게 나였구나, 하는 생각에 깜짝 놀랐다. 내가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무슨 선한 일 같지만 이로써 기도가 드려지지 않다면 별반 다를 게 없는 거였다. 교회를 오고 안 오고, 하나님을 붙들고 안 붙들고 하는 일을 내가 어찌 주도할 수 있는가 말이다.
시험 결과가 좋지 않은가, 그러는 동안 마음이 흐려졌는가, 애는 군대를 간 뒤 감감무소식인데, 누구를 사귄다더니 아예 주일과는 멀어지는가, 아이엄마에게 뭐라 해야 하나, 쌍둥이네는 왜 아무 연락도 주지 않을까… 마음은 작정을 하고 들들 볶지만, 그러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합처럼 돌아누워 식사도 거른 채 투정이나 할 것인가? 주님! 하고 부른 뒤 나는 또박또박 상황을 아뢴다. 미주알고주알 앞뒤 말도 안 되는 소릴 엄마에게 주절거리는 아이처럼, 이게 기도가 되는지 어쩌는지 모르겠지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밖에 없다. 그 대상, 나의 주.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시 16:2).” 다른 더 좋은 수가 내겐 없다. 그러므로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떨치고 깨셔서 나를 공판하시며 나의 송사를 다스리소서(35:23).” 말을 한들, 으레 그러려니 여길까봐, 목사니까 저러는가 할까봐, 나의 안타까움이 빈말이 될까 하여, 그것으로 하나님을 가벼이 여기지나 않을까 싶어, 말도 못하고 아,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39:2).” 그러니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나 하나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라 행여 그것이 주께 욕이 되지 않을까 싶어… 벙어리 냉가슴 앓듯 주의 이름만 부르는 것이다. 주가 다루셔야 한다. 주가 주장하시고 간섭하셔야 될 일이다. 나는 다만 볶이는 마음 때문에도 주께 기도하는 수밖에. 하루에 오만가지 마음이 들락거리는 가운데 더욱 절실한 것은 ‘오직 예수’다. 구호가 아니라 생사의 문제다. 그저 표어가 아니라 나의 부박한, 경솔하고 천박한 마음으로 붙들 수 있는 마지막이다.
주님, 하고 부르면 눈물이 핑, 도는. 입만 삐쭉거리다 차마 말도 못하고. 뚱하니 주 앞에 앉아 있는 나로서야 내가 무얼 해줄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으로, 생각하다 고달파서 마음만 애태우지만, 그것으로 오직 예수다. 예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그 이름 예수를 부르다 울먹거리며 어깨를 들썩이는 일밖에, 나란 사람은 할 줄 아는 게 없어 너무 미안하다. 이렇게 또 한 아이를 흘리고 마는가 싶어 서러움이 일지만, 그게 또 어디 내 힘으로 되는 일인가.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더해주옵소서. 날 위해 기도한다.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시 25:16).” 너무 추하고 송구하여서 뭘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휑한 마음으로 앉아 저 혼자 흐르는 눈물에 당황한다. 이내 드는 마음은 그래서 주님이다. 더 좋은 수가 없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뭐 하는 일도 없는 사람이 이처럼 엄살인가 싶다. 그러므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 4:7).” 누구 일이 아니다. 내 일이다. 나에게 두신 마음이면 그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데 쓸 일이다. 공연한 생각에 시달리고, 허탄한 신화를 좇듯 누구는 어떻게 하나 기웃거릴 거 없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에게 권한다. 자신을 연단하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다.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시 74:16-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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