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전봉석 2016. 11. 18. 07:42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

잠언 18:4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시편 75:6-7

 

 

의연하다는 것은 아무렇지 않다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것이고 ‘그렇지 않음’의 것은 아니다. 명철함은 총명한 것으로 사리분별이 밝다. 옳고 그름을 영리하게 판단하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이 어찌 함께 하셨는가를 기억하는 재주다. 주변의 것에 연연해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 목표가 단호하여서 가능하다. 그런 자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다. 그 지혜의 샘은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다. 오늘 잠언의 말씀을 여러 번 되뇌며 그게 나였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나님만 바라고 사는 일은 필연적으로 의연해질 수밖에 없겠다. 유혹을 당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이를 이겨낼 수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분별력을 갖는 것이겠다. 성경은 인류 역사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사람이 어떻게 나고 자라고 무슨 일에 매진하다 죽는지, 열왕들의 사적은 고만고만하다. 결국 개개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전할 뿐이다. 가려진 30년이 아니라 드러난 3년의 이야기, 그 전하여진 복음은 하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었다는 것.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 14:11).”

 

믿는다는 일은 지극히 실제의 것이다. 그럴 수 없는 중에 그러는 것으로, 기록되지 않은 것들의 외침이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0-31).” 성경의 이 단순한 목적 앞에 때론 어리둥절하다.

 

사는 데 따른 이 지난함에 대하여, 그게 아니라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일 뿐.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21:25).” 이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가운데 기록되어지게 하시는 것. 결국 그가 하신 일을 기록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구속 이야기.’ 그 웅대한 절정과 완성으로 나를 오늘에서 살게 하시려는 것. 명철함이란 이를 바로 알고 그 깊은 샘에서 솟구치는 내와 같이,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7:38).” 아! 이 벅찬 순간이었다.

 

결국은 하나님이 보여주셔야 본다. 들려주시는 것만 들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초점을 맞추고 어그러진 각도를 바로 잡는 데 있어 때론 삐거덕거리는 것이겠다. 가끔은 나보다 더 나은 증거는 없는 것 같다.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숨결을 느낀다. 지금은 잘 모르겠더라도 지난 시간을 돌아볼 때 아, 하나님이 어찌 함께 하셨던가, 하는 그 감격스러움을 마주하게 된다. 왜 저들이 출애굽의 여정과 홍해를 건너 광야를 지나는 과정을 그처럼 회상하고 돌이키고 묵상하였는가 알겠다.

 

곧 내가 너와 함께 하였다는 이 강한 증거,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 18:10).” 그러니까 이게 참 아이러니하게도 평안할 때는 감동이 덜하다. 그러려니 여겨지던 막연함이 절실하고 구체적으로 다가올 때는 고통중이라. 더더욱 주밖에 없음을 확신하는 건 험한 풍랑에서다. 고물을 베고 잠이 드신 주님을 깨우고, 풍랑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소리쳐 외치는 것이다. 그저 평온하였다면, 잔잔한 수면 위에서라면 그리 애탈 게 뭐 있나?

 

나는 내가 얼마나 ‘뒤틀린 목재’ 같았는지를 절감하고 있다. 때론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는데도,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내가 이르되 내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나이까 하니(단 12:8).” 말씀이 임하셔야 한다.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신 18:18).” 주가 내게 두신 사역이란 그런 게 아닐까?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겔 1:3).”

 

그게 아니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늘 똑같은 동선에서 똑같은 시간의 연속인 것 같지만, 하나님이 일하신다. 저마다 주가 부신 것처럼, “~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호 1:1).” 곧 “여호와의 말씀이 ~에게 임하니라(욘 1:1).” 임하셔야 하는 것이지 내가 취하여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렘 1:6-7).”

 

그러므로 내가 얻은 교훈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 오직 주님만이 높임을 받으시기까지 말이다. 돌아오는 주일은 추수감사주일로 아버지와 함께 예배드리는 날이다. 곧 설교원고를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이처럼 또 홀가분할 줄은 몰랐다. 은근히 주 후반에 들어서면 설교문에 대한 압박이 여간 아니었다. 그러다 내가 문득 참 날로 얻는다, 생각하였다.

 

다들 열심을 다해 나름의 진실함으로 최선을 다하는 세상에서, 진실함이 꼭 진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열심이 옳은 건 아니다. 그렇기로 치면 사울이었던 바울의 진실함과 열심을 누가 따라올 수 있을까? 언제부턴가 목표가 수단보다 덜 가치 있는 게 되었다. 떠나는 데 의를 두고 시작하는 데 의미를 부여하면서,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됐다고 여긴다. 지독하게 게으른 자의 자기변명 같겠지만 문득 ‘내가 왜 이처럼 조바심을 내는가?’ 하는 데서 주가 일깨우시는 거였다. 열심은 있어도 지식이 없을 때 무너진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 10:2).” 열심히 최선을 다하면 높이 평가받는 세상에서는 당장의 성과가 이를 증명하듯 가치 있게 여겨진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게 또 지독하게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몇 대 몇 비율을 따지고 그 가운데 몇 %의 승산을 계산한다. 이럴 때 믿음으로 산다는 일은 백전백패다. 싸워봐야 진다. 10대 2의 싸움에서는 별 수 없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절규가 무엇인지 알겠다. 명철함이란 의연함이다. 의연함이란 터무니없는 신뢰에서였다.

 

혼자 뭐 하나? 싶게 울었다 웃었다 말씀 붙들고 씨름하였다. 알겠는데 이를 삶으로 가져오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번번이 좌절하고 넘어진다. 그럴 때마다 나의 뒤틀린 본성과 마주한다. 나는 감당할 수 없다는 걸 더욱 절실하게 느낄 때면 절로 주의 이름을 찾는다. 결국은 그 터 위에 세워져야 할 일이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 2:20).”

 

그러므로 오늘의 이 모든 여정이 궁극은 영적인 일이었고, 영적인 일은 결국 영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을 실감한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 그러니 나의 싸움은 날마다 계속 되는 게 당연하였다. 돌아서면 육신의 일을 따르고 그 일에 매여 전전긍긍하니 말이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일생을 주와 함께 산다는 일은 억지로 어렵다. 애써 수고하여 열심을 다해 진실하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행여 그 일이 우상이 되어 나의 숭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의 수고 나의 애씀이 나의 의가됨으로 말이다. 아무런 공적은 없다 해도 묵묵히 주만 바랄 수 있는 의연함이 내게 있었으면 좋겠다.

 

결코 나의 노력이 그 대상보다 크지 못하다. 수고와 애씀을 높이 평가하는 세상에서 이 또한 주의 말씀이 임하심으로나 선하다는 데 나의 전부를 건다. 주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그저 떠나는 데 목적을 두는 게 아니라 목적지에 다다르는 데 그 목적이 있음을 깨닫는다. 어떠하든 주가 함께 하심을. 주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나를 따르리니 내가 주의 집에 거하리라.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시 75:6-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