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전봉석 2016. 11. 19. 07:52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태만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지키거니와 자기의 행실을 삼가지 아니하는 자는 죽으리라

잠언 19:15-16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이 잠들었나이다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시편 76:6-7

 

 

 

지도자와 지배자는 다르다. 지도자는 하나님이 세우시고 지배자는 땅이 낸다. 주권자는 하나님이 세우신다고 여겨 교회는 권력 앞에 맹목적인 시녀가 되곤 한다. 아이와 성경공부를 하다 아무래도 시국이 시국인지라 그에 관련된 말이 더러 오갔다. 아이부모가 이번 주말에 촛불시위에 간다고 하여 것도 마음이 쓰였는데 나서서 가라, 마라 할 수 없었다. 오늘 시편의 말씀이 먼저 눈에 들어온 것도 그 때문이다. 하나님이 꾸짖으실 때 ‘병거와 말이 다 깊이 잠들었나이다.’ 그리고 이 말씀에 이어 잠언의 ‘게으름이 사람을 깊이 잠들게 하나니’에서 한참 머물렀다.

 

우리가 믿는 힘을 무력하게 하신다는 의미로 읽었다. 놓아두심은 주님의 최종적인 인내의 사랑이면서 더는 되돌릴 수 없는 형벌이기도 하다. 일례로 게으름이다. 아이 셋이 시험이 끝나서 읽어야 할 책을 각각 한 권씩 권했더니 난색을 지었다. 게으름은 사람을 지독하게 수동적으로 바꾼다. 시키니까 하고 시켜야 한다. 이에 모든 행동에는 원망이 들어간다. 억지웃음은 결코 행복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게으른 자에 대해서 잠언은 누누이 언급하고 있다. 결국 “게으른 자는 자기의 손을 그릇에 넣고서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19:24).” 어처구니없지만 괴로움의 절반은 영적 게으름 때문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26:16).” 그러니 도무지 누가 어찌 고쳐줄 수 없다. 아이 셋을 따로 떼놓고 수업을 할까, 여러 차례 고민하는 것도 저들 남매가 병적으로 나른하다. 공부를 못하는 건 둘째 치고 전혀 의욕이 없다. 나한테만 그런가, 했더니 본래가 그런 식이다. 이는 그 부모의 불화에서 그 원인이 있겠고 나아가 아이엄마의 문제이기도 하다. 더는 다다갈 수 없어서 지켜볼 따름이지만, 아무리 뭐라 일러도 돌아서면 그만이다.

 

결국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한다. 한데 이와 상반되는 입장에서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지키거니와’ 하는 말씀을 대등하게 놓으셨다. 근본적인 원인은 말씀을 받지 않음에 있었다. 그 결과는 행실로 드러난다. 이내 ‘자기의 행실을 삼가지 아니하는 자는 죽으리라.’ 곧 영적 죽음의 표면적인 증거가 이생에서의 게으름이다. 저는 가난한 자를 도울 수 없고 지배자를 지도자로 여겨 예속되려 한다. 이를 순종이라 여긴다.

 

한데 이 대목을 시편의 말씀과 이어보자.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이 잠들었나이다.’ 나름 믿고 의지하는 것을 하나님은 무력화시키신다. 고로 주를 경외하게 하시려는 데 있다. 이는 낮에 읽고 묵상하였던, 말씀을 받는 사람을 신이라 일컫는 이유를 알겠다.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요 10:35).” 이는 시편 82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책무를 받은 자를 일컫는 것이겠다. 곧 지도자로서의 삶이란 그처럼 막중하다.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출 22:28).”

 

한데 이를 확대하여 저를 신적으로 섬기며 숭배하는 자리에까지 이른다. 사람 탄신일을 기념하며 그 앞에 제단을 쌓는 얼빠진 짓거리들도 하는 것이다. 저에 대한 경고도 있다.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할 때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차별 없이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거든 내게로 돌리라 내가 들으리라 하였고(신 1:17).” 스스로 신이 된 자의 지배욕은 가히 악마의 유혹처럼 달콤하다. 하나님께 속한 권한을 자신에게 돌릴 때, 이를 보고 저가 지도자였는지 지배자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아이에게 일러, 누구를 지지할 수 있으나 저를 위해 기도하는 차원의 마음이어야 한다. 누구를 향해서는 반대할 수 있으나 그 또한 저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이어야 한다. 현실참여에 있어 각별히 주의할 것은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데 있어 상대를 적대시하면 안 된다. 저가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인지 세상이 세운 지배자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참여는 상당히 민감한 일이어서, 종교와 정치에 대해서는 오랜 논박을 금하는 것이 그 때문이다. 어디에도 합일점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은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은 그침이 없느니라(잠 29:9).” 그러므로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거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20:3).” 이는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26:20).” 그렇다고 방관자가 되어 현실을 도피하라는 말이 아니었다. 자칫 이를 잘못 여겨 게으른 자의 자리에 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첫째도 기도 둘째도 기도였다. 그리고 주께서 마음 주시는 대로 하되 결코 부화뇌동하지 않기를. 사람들이란 쓸려 다니는 연기 같은 것.

 

아이가 돌아가고 끙, 하고 소파에 돌아누워 허리를 비틀었다. 약사아이에게 문자를 하였더니 근이완제와 진통소염제 이름을 적어주었다. 약국에 내려갔다오는 일도 까마득하였다. 아이 셋이 와서 영화를 보여주었다. 지독하게 시무룩한 아이들에게 때론 화가 날 정도이다. 덕분에 편한 자세로 앉아 허리를 풀었다. 신기한 건 그래서 또 약발이 있다. 퇴근하고 오면서 딸애가 도가니탕을 사준다고 하여 조금 먼 길을 돌아서 올 수 있을 정도였다. 사람의 간절함이란 게 이처럼 간사하다.

 

우리의 최종적인 목표는 이게 아닐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눅 19:46).”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지 강도의 소굴이 되어서야 쓰겠나. 아무나 드나들고 온갖 시류에 편승하느라 고스란히 드러난 마음은 길가밭처럼 단단하게 굳어진다. 또는 자기 생각에 연연하여 어릴 적 혹은 유년의 기억으로 완고하여진 돌짝밭이 되거나, 외부적인 요인이기는 하겠지만 그 품을 내준 탓에 가시엉겅퀴밭이 되기도 한다. 결국은 갈아엎어 개간하여 척결해야 하는데 이 일이 어찌 고되지 않을 수 있을까? 괭이와 호미질에 너덜거리던 밭은 어느새 품을 다 드러내고 옥토밭이 된다.

 

이에 기도뿐이라. 조금 무책임하다 싶을 정도로 나는 요즘 기도만 하려고 한다. 주님 도와주세요, 불쌍히 여겨주세요, 하는 내 기도는 물론… 저마다의 생각에 다다르다보면 미처 평소에 미치지 못했던 생각에 닿는데, 그럼 문자를 하거나 어떤 연락을 취한다. 약사아이에게도 굳이 어쩌고저쩌고 내 아픈 걸 말할 건 없었다. 그러느니 바로 약국에 갔어도 되고 병원엘 가도 될 일이다. 시험은 잘 봤는지, 더는 애간장 태울 게 아니다 싶어 먼저 안부를 물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실천이 우선이 아니다.

 

행동이 앞설 때 여지없이 ‘강도의 소굴’이 된다. 다들 저마다의 사연을 내가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괜한 오지랖은 거만함과 다를 바 없다. 예수께서 온전하게 하시려는 것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그러므로 주께서도 이내 그 말씀을 이루려하심이었다.

 

성부하나님도,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신 8:18).” 성자 하나님도,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 곧 오늘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거하게 하려 하시는 성령 하나님도,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그러므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15:4).”

 

계명 곧 말씀에 승복하는 삶이야말로 복되다. 이는 결국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 그러므로 내 안에 두시는 여타 볶이는 마음까지도 주가 이루어 끝내 세워 가시려는 데 그 목적이 있음을 믿는다. 이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느니라(23).” 나로 하여금 주만 경외하게 하시려고, 왜냐하면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29).”

 

몸은 고달프고 마음은 어려워도 때론 이것이 밭갈이에 있어 필연적인 고통이려니, 하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고 달리 다른 무엇을 바라지 않게 되는 걸 보면 말이다.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요 10:35).” 고로 우리 믿는 자들은 저마다 신이다. 하나님이 맡기신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이는 첫째도 겸손이고 둘째도 겸손이겠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시 22:26).” 겸손이 잘 안 되니까 겸손해야 한다. 할 만하면 그게 어디 겸손이겠나?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107:12).”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149: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