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전봉석 2016. 11. 20. 07:40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

잠언 20:4-5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시편 77:12

 

 

 

때가 이르러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는’ 지경이 올 수 있다. 그것이 병들어서이거나, 나이가 들어 죽음을 앞두고서이거나 혹은 사랑하는 이를 잃고서이거나… 이는 ‘가을에 밭 갈지 않은, 게으른 영혼’의 각박함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명철한 사람은, 모략을 마음 깊은 곳에서 길어낸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 11:2-5).”

 

곧 믿는 자의 모략이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다. 이에 내가 ‘작은 소리로 주의 행사를 읊조리고 낮은 소리로 되뇐다.’ 한데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냐 한결같지 않은 저울 추와 한결같지 않은 되는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잠 20:9-10).” 겸손히 주께 나와 내 마음을 정하지 못하였음을, 나는 내가 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여러 개의 나는 서로 다툰다. 때론 그 싸움이 격렬하여 힘이 다 소진할 정도이다.

 

몇 달 만에 ‘생인손 같은 아이’가 왔다. 왠지 얼굴이 안됐고 까칠하였다. 마침 구리에서 아이가 오지 않았다. 같이 식사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교를 휴학하고 일 년을 열심히 돈을 벌어 곧 태국과 네팔과 인도로 장시간 여행을 떠날 구상을 하고 있었다. 누가 뭐래도 나는 하나님을 믿어요! 항변하듯 아이가 말했다. 나에게 생인손 같다고 하는 이유는 유난히 사랑하고 공을 들여 마음이 많이 가는데 반해 참 손에 잡을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어서이다. 생각이 많고 여리고 다각도로 뭔가를 찾고 갈급하여,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된다 애쓰지 않아도 된다 말하지만 소용이 없다.

 

왜 하필 그런 나라를 가려는 걸까? 것도 두 달 가까이 체류하며 무엇을 찾고자 하는 것일까? 안 갈 수 있으면 안 갔으면 좋겠는데, 뭐라 해서 들을 것도 아니고. 아이는 자꾸 눈물을 흘렸다. 꽤 오랜 시간을 이야기 나누고 돌아가려 할 때도, 그래서 같이 손을 잡고 아이의 기도를 듣고 내가 기도할 때도,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시 77:2).” 오늘 본문의 아삽의 시 같다.

 

나도 선생님처럼 벌 받아서 공황장애가 오면 어쩌지? 뜬금없는 아이의 말에 깜짝 놀랐다. 도통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순간 멍하니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힘들어한다고 했다. 뭐가 자꾸 불안하고 초조한 거였다. 나는 아이 말을 들으며 가슴이 먹먹하였다. 왜 내가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아이에게 물었다. 가고 싶은 데 못 가고 하고 싶은 거 못 하면 그게 벌 아니에요? 아이가 되물었다. 그렇구나, 벌이라 생각할 수 있겠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 하지만 나는 이를 축복이라고 생각하는데? 하고 말하였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로 살아가는 아이의 모습이 나였다. 그래서 더 생인손 앓듯 아이를 생각하면 가슴 한 곳이 아린 것인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되는데, 그럴 거 없었는데… 아무리 그러지 말라고 해도 그럼 저 혼자 섬이 될 거 같은 불안감이 있었다. 아이가 보기에 지금의 내 모습이 딱 외따로운 섬 같았던 모양이다. 어떻다 해도 나는 되돌리고 싶지 않아. 되돌아갈까 두렵고 지금에 이 간절함을 잃지 않을까 애지중지하는데? 하고 말해주었던 나의 말의 진심은 그래서 하나님이었다. 다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날마다 나의 전투는 그것인지 모른다.

 

하나님 아버지, 하고 부른 뒤 아이는 한참을 훌쩍거리며 울었다. 섣부른 나의 말 한 마디보다 같이 침묵하는 그 시간이 귀하였다. 비록 이러저러하지만, 나는 분명히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아이의 앙다문 결연함이 기특하였다. 고백할 수 있게 하신 이가 홀로 두지 않으실 것을 확신하였다. 나의 노파심은 다만 나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려는 데 있다. 일찍이 나의 오랜 방황도 다부지게,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면서도 배회하였던 광야였다. 아이의 고비사막은 어디쯤일까? 갑자기 꽉 다문 입에서 모래 먼지 맛이 났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무엇을 해야 하고 얼마나 이뤄야 하는 게 조건이 될 수 없었다. 다 이루신 주의 사랑을 아이가 함께 누릴 수 있었으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시는 주의 음성이 그 영혼에 들려지기를. 항상 애쓰고 수고하여 그 고달픔에 몸서리치는 거였다. 안 그래도 돼, 그러려니 얼마나 수고하고 힘이 드냐? 다 네게로 오라하고 주님은 우리를 부르신단다.

 

어떤 서러움인지 불안함인지 알 수 없는 정체의 힘겨움에 아이는 눈물을 흘렸다. 아홉 시를 넘겨서야 돌아갈 걸 생각하고 다독이어 보냈다. 주일을 같이 지내며 함께 예배했으면 좋겠는데, 하고 아이의 등을 쓸었다. 마음이 안쓰러우면서도 다행이었다. 아이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지만, 힘에 부쳐하는 아이의 모습이 오히려 감사하였다. 마냥 좋고 또 좋기만 한 상태이면 그 영혼을 어찌할꼬.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시 77:1).” 오늘 아삽의 기도가 아이에게 들렸으면. ‘내 음성으로’ 주께 부르짖기를, 그러므로 내게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저를 찾아가시고 위로하여 주실 것을 믿으며. 그저 나는 안쓰러워서, 아이의 어깨를 토닥거려줄 뿐이었다. 아이도 말하길, 그럴 이유가 없었다. 사귀는 아이도 있지, 내년에는 복학을 하여 졸업 작품을 준비할 것이고, 친구와는 그 시도로 잡지를 시작하였고, 모든 게 적당한데 어쩐 일일까?

 

아이의 의아함에 혹시 ‘그런 나라’로 여행을 갈 계획을 세워서는 아닐까? 하는 엉뚱한 말을 던졌다. 거부감이 들 수 있어 길게 말할 수 없었지만 저 우상의 나라에서 대체 무슨 선한 것을 찾고자 하는 것일까? 치기어린 젊음의 오만함은 아닐는지. 그래서 나는 안 갈 수 있으면 안 갔으면 좋겠다고 말하였다.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셀라)(3).” 그럴 수 있다. 아직 그 영혼이 알아채지 못할 뿐이지 앞서 몸이 또는 마음이 불안해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거였다.


“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4).” 아이의 괴로움과 같구나.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 (셀라)(5-9).” 그러니 이보다 더 두려운 게 또 있을까?

 

천만금을 얻는다 해도,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고 존귀함을 누린다 해도, ‘하나님의 외면’보다 고통스럽고 두려운 일이 어디 있나! 이를 어찌 아이에게 들려줄 수 있을까? 이 아침, 말씀 앞에 앉아 아이를 생각한다. 주가 사랑하심을 느낀다. 한데 아이의 고집이 가혹하다. 귀를 막고 눈을 돌리게 한다. 죄가 그런 것이야! 아이에게 말했다. 아무리 선하고 의롭게 산다 해도 하나님과 상관없이 구는 모든 것이 죄란다. 이를 어쩌지 못하는 또한 죄의 결과인 것이고. 하지만 은혜란 나는 주를 버리고 살았지만 주는 나를 버리신 적이 없다는 것.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러서야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바랄 수 있는 것.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말이다. 끝내 모진 세파가 몰아치고서야 귀를 기울이게 되다니. 이는 결코 벌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아이 눈에는 전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른가보았다. 아니다, 내겐 오늘이 축복이다, 하고 말해주어도 아이는 별로 와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시 77:10-11).”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을 아이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13).” 말로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아이를 품에 안으시는 주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이 참 귀히 여기시는구나. 너를 특별히 많이 사랑하셔! 하고 말해주다, 어릴 적 나의 아버지가 해주었던 말들과 중첩되었다.

 

그 증거를 보이듯 날 봐라, 네가 알던 내가 얼마나 다른 내가 되었냐? 아이를 바라보며 말해주었다.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내며 주의 화살도 날아갔나이다(16-17).” 주께서 이루어 가시는 일을 본다. 미처 내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일하시고 계셨다. 가끔씩 아이를 생각하며 나의 자세를 염려하는 것이 고작인 나로서는 더 많이 사랑하고 더 자주 기도해야겠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내가 살아왔던 지난날을 기억하며,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주께 받은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화평과 거룩함을 따라’ 아멘, 주여.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