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확실히 들은 사람의 말은 힘이 있느니라

전봉석 2016. 11. 21. 07:28

 

 

 

거짓 증인은 패망하려니와 확실히 들은 사람의 말은 힘이 있느니라

잠언 21:38

 

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

시편 78:40

 

 

 

‘확실히 들은 사람의 말은 힘이 있다.’ 살면서 하나님께 대한 ‘확실한 들음’은 좌고우면하지 않는 힘이 된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5-7).”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설 수 있는 자의 복은 영원하다.

 

‘주의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로서 주가 함께 하시고 주가 다스리시며 주가 지키시는 데 따른 감사와 영광을 어찌 말로 다 할까? 이는 살면서 삶 가운데 듣는 확신이 있다. 살면서 주께 반항하며 주를 슬프시게 한 적이 도대체 몇 번이던가? 그럼에도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시 78:38-39).”

 

예배 시간이 지나고도 아이가 오지 않아 마음을 졸였다. 그러다 아이가 설교가 시작되면서 들어와 감사하였다. 이런 마음이실까? 애면글면 아이를 생각하는 일에서 나는 부쩍 하나님이 내게 두셨을 마음의 여파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우리는 그저 육체이며 다시 돌아보지 못하는 바람인 것을. 그러므로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고는 설 수도, 나올 수도 없는 것을 느낀다.

 

“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들의 기력의 처음 것을 치셨으나 그가 자기 백성은 양 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 떼 같이 지도하셨도다(51-52).” 오로지 주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데 찬송한다. 내 비록 어떠어떠하든 그 모든 것보다 값지고,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그래서 “그 때에 주께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포도주를 마시고 고함치는 용사처럼 일어나사 그의 대적들을 쳐 물리쳐서 영원히 그들에게 욕되게 하셨도다(65-66).” 주가 돌보신다. 주께서 대적하시고 물리치신다.

 

오늘에 나를 두신 이의 영구한 돌보심이 감격스러웠다.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그와 같은 마음으로 주를 더욱 바라게 하시는 데 놀라웠다. 가끔은 ‘내가 왜 이깟 것으로’ 싶어, 퉤퉤 돌아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이게 뭐라고! 그러든가 말든가, 하고 말면 그만일 텐데… 그게 안 되는 내 마음이 신기할 따름이다. 혹시나 하고, 전날에 왔던 아이를 기다렸다. 정말이지 어떤 안타까움으로 애태워하다 돌연 그게 내 마음에 있다는 게 낯설고 신비로운 것이다. 아, 이런 게 하나님의 마음이실까?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시 78:72).”

 

그렇다면 더 무얼 걱정하는가 말이다. 내 안에 두시는 안타까움이야, 그것으로 내게 기도하며 주께 더욱 집중하게 하시려는 데 있을 것이다. 행여 나는 잊고 더는 상관하지 않는 자로 살아가게 된다 해도,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고 항상 돌보시며 주장하셨던 것처럼 함께 하실 것을 믿는다. ‘입이 쓰다고 뱉으면 약도 함께 뱉는 것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슬픔을 머금고 사는 일이 지혜로울 수 있다.

 

웬 청승인가, 처량 맞다 싶어 퉤퉤 뒷짐 지고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니,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 마음을 가만두지 않으신다. 볶이고 애달파서, 내가 왜 이 애 때문에 이처럼 힘든가, 이 사람이 뭔데 나에게 슬픔이 되는가, 이 일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이처럼 목숨을 다하는가, 싶다가도 이게 곧 주님의 마음이었으려니!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 4:23).” 그러셨구나, 그러신 거였구나!

 

일찍이 나의 지나온 생에서 주가 함께 하셨던 일에 대하여,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왜냐하면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18).”

 

바쁘게 또 오후예배 인도를 위해 가셔야 하는 아버지께 나는 두 아이의 기도를 부탁드렸다. 하고 그 옆을 지키며 나의 간절하였던 마음은 주의 영광이 저들 생활 가운데 드러나기를 바라였다. 지금은 부질없는 것 같으나 그 가치는 영원함이라. 세상이 온통 미친년 바람에 널뛰듯 한다 해도 굳건히 주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주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에 대한 주의 각별하심이 있기 때문이다. 결코 가두어두지 않으실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주의 약속이시다.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다. 흩어지게 놓아두지 않으실 것이며, 세상이 우리를 가두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세상이 아무리 어지럽다 해도,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실 것이다. 이는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명하신다. 왜냐하면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주의 것이다. 우리는 주의 것이다(사 43:5-7).

 

그러므로 낙심하지 않게 하신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32).” 다른 건 잘 모르겠고, 내게 두시는 이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아, 이 아이로 내가 울고 웃고 하는 게 신기하였다. 모두 돌아가고 멀리 산책을 하듯 동네 어귀를 시적시적 거닐었다. 금세 몸이 힘들어서 딸애와 아내만 두고 들어왔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살전 5:9).”

 

오늘 시편의 말씀에서처럼 하나님이 어찌 함께 하시고 붙드시며 인도하시는가를 묵상하는 일이 감격스럽다. 너무하다 싶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나 같은 걸 왜? 하고 갸우뚱하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4).” 그렇구나! 그럴 수 없는 나에게 그리 행하게 하시려고,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2).”

 

말씀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막연하여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었다. 몽매한 나의 영혼을 바로 잡으시려고, 온전히 주의 길 가게 하시려고 ‘확실히 들은 사람의 말’로 나를 붙드시더니, 확실히 들은 사람의 말로 증거 하게 하시는 거였다. 잘 모르겠다가도 이처럼 말씀 앞에 바로 세우심으로 깨닫게 하신다. 더 무엇을 붙들 것인가? 온갖 거짓이 난무하고 자신들의 신념과 아집에 빠져 정의를 부르짖는 세상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더 무슨 증거가 필요할까?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2: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