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전봉석 2016. 11. 22. 07:40

 

 

 

여호와의 눈은 지식 있는 사람을 지키시나 사악한 사람의 말은 패하게 하시느니라

잠언 22:12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시편 79:13

 

 

 

‘지식 있는 사람’의 삶은 단순하여진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복잡다단한 현실에서 놓여나는 일이다. 아주 오랜만에 친구들과 통화를 하게 되었다. 저마다 여전하여서 나는 그들의 여전함이 불편하였다. 하나님 없이 혹은 주께 등 돌리고 사는 자의 생활이란 게 여간 바쁘고 복잡하고 고달픈 게 아니었다. 1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그 고민과 수고는 똑같았다. ‘어떤 대화’가 통하지 않는 답답함에 말을 하면서도 빨리 말을 맺고 싶은 기분이었다. 반가움보다는 불편함이 정겨움보다는 안쓰러움이 더 밀려왔다. 그런들, 건성으로 안부를 묻고 한 번 보자, 하는 인사로 끝내야 했다.

 

본래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의 삶은 얼마나 단순하였던가. 우리 사람이 복잡해진 데는 다 죄 때문이다. 분주히 하나님의 낯을 피해야 하고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려야 하며 동생에 대한 미움으로 끝내 돌을 들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탑을 쌓아야 했다.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삶은 복잡하여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에 내몰리는 것이다.

 

본질적인 단순함은 질서가 된다. 생활이 정돈되고 그 시간은 명료해진다. 전엔 그처럼 신경 써야 하고 돌봐야 하고 챙겨야 하는 인사에 대해 놓여나는 것이다. 그게 위로가 되려니 하고 또 사람을 만나고 어울리고 서로의 근심을 나눠지는 것 같은데 그래봐야 허탈만 가중되는 법이다. 하긴, 요즘 같은 시국에 말씀으로 귀 기울이고 하나님의 의중을 살피는 것보다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서는 게 더 쉽다. 마음이라도 분주해야 불안이 덜한 것 같고, 나서서 선을 추구하며 봉사와 헌신을 갈구해야 뭐라도 하는 것 같아 위로가 된다. 흔히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의 복잡한 심경은 죄다.

 

안 믿는 친구들의 눈엔 오늘의 내가 그저 ‘팔자 좋은’ 정도의 것일 뿐이다. 한심하고 처량하여서 왜 그러고 사는가, 하고 혀를 끌끌 찬다. 전에는 그렇게 여길까 하여 돌려 말하고 변명하고 애써 부인하려던 것이 이젠 그럴 필요 없다. 어찌 여기든 주 앞에 온전하여지기를. 하여 저들의 여전한 복잡함에 마음이 어려웠다. 언제나 저들과 같기를 바라던 마음이었는데, 이제는 안타까움으로 위하여 기도를 하였다.

 

원래 어느 시대나 이상주의자와 인도주의자는 공격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건 결코 이상주의도 인도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지독한 현실주의에 가깝다. 치열하게 다투며 산다.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22:2).” 주 앞에 친구들을 생각하며 모처럼 위하여 기도할 수 있었다. 돈과 건강과 일에 찌들려 사는 모습에서 나 또한 다를 게 없는 것 같으면서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 저들은 그것으로 사느라 여념이 없고 나는 그것으로 주를 바라고 섬기는 데 주목하였다.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눅 11:34).” 다를 바 없이 사는 것 같으나 보고 있는 눈이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35-36).” 같은 이생에서 같은 고달픔으로 같이 뒹굴어 살아가는 것 같으나, 그래서 나는 더욱 단순하여지고 그래서 저들은 점점 복잡하여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속의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는 주의 음성이 크게 들린다. 내 눈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 15:18).”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힌 삶이란 그러므로 치열하고 그래서 더욱 완강하다. 한 친구는 교회 재정집사로 봉사하면서도 ‘늘 똑같은 내용의 설교’가 듣기 싫어서 가기 싫다고 하였다. 뭐라 말을 해줄까 하다 가만있었다. 어떤 신선한, 새로운 설교를 바라는 게 저의 기호 같은 것이어서 제 입맛에 맞는 것은 지적인 허영을 달래는 것밖에 없을 거였다. 즉 ‘노인 성도들도 지겨워 할 설교’가 저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늘 잠언의 말씀에서처럼 ‘지식 있는 사람’을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것.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생활을 단순하게 정돈하고 생각을 간단하게 정리한다. 늘 자고 일어나는 나의 시간과 날마다 똑같이 움직이는 동선과 만나는 사람의 정도에 대해 저들은 놀라워했다. 생각하는 본질과 그 가치에 대해서는 내가 애써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더 큰 의미가 왜 필요한가(시 79:13).

 

그럼 어떻게 나는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서로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전혀 다른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된다. 어지러운 시국에 다들 실망하고 욕하고 자괴감에 젖어 있지만, 끝내 하나님이 들추어내시고 만천하에 공표하신 게 무엇인가? 우리 민족의 고질적인 미신숭배와 골이 깊은 계층 간의 갈등과 서로 반목하고 시기하는 것들에 대하여, 철저한 죄의 문제가 아닌가.

 

암묵적으로 생활에 깊이 뿌리내린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어찌 저들만의 문제던가? 공공연히 ‘운수 좋은 날’을 권하며 하루의 운세를 궁금해 하고, 굿판과 다를 게 없는 고사떡이 돌려지고, 부거대가리를 문에 걸고, 입춘대길을 외치면서, 재수가 좋네 나쁘네, 하다못해 동호회 모임을 가지면서도, 산행에 앞서 돼지머리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콧구멍에 돈을 말아 꽂는 게 문화가 되어있지 않는가. 그러니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저가 굿판을 벌였다고 하면 오히려 갸륵하게 여겨야 마땅할 터. 대대로 우리 민족은 우상의 나라였음을 들춰내신 것이다.

 

이에 교회가 동조하고 강단 뒤에 누구 초상화를 걸고, 태극기를 교회 벽에 내걸고, 이 무슨 난리 굿판인지 모르겠다. 정작 탄식해야 하는 쪽은 교회고 이에 철저한 회개가 이뤄져야 하는 쪽은 성도였다. 본래 이 나라는 단군의 나라로 미신과 온갖 우상의 텃밭이었다. 그런데서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바르게 또 온전하게 주만 바라기를 바라며 살 수 있는 것이 은혜이고 은총이었다. 내 수고와 노력에 의한 게 아니라 그리 여겨주시고 그와 같은 자리에 있게 하시는 이의 긍휼하심 앞에서 어찌 말씀이 지겹다는 소리가 나올 수 있을까?

 

오직 성경이다. 성경의 권위를 제일로 삼고 절대복종을 준엄하게 따르는 삶이란, 때론 이해가 안 되고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간다 해도 주는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바탕으로 믿고 준행하는 것이다. 이럴 수 있는 것이 기적이었다. 성령의 내주임재하심이란 나로 하여금 불편을 느끼게 하고 안타까움으로 저를 위해 기도하게 하시며 다시 말씀 앞에 고개를 조아리게 하는 일이다. 아이가 최종 면접만 남기고 모두 합격하였다는 말에 축하하면서도 그 모든 일의 결과는 하나님의 것임을 상기시켜 주는 일. 내가 여기 있는 게, 감사였다.

 

오늘 이 나라의 혼탁한 현실은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을 더욱 바르게 구하고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것이다. 더욱 주를 의뢰하게 하려, “내가 네게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잠 22:19).” 그러므로 오직 주만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아, 그러니 안 믿는 내 예전 친구들을 어쩌면 좋을까?

 

하나님의 강권하심은 강요가 아니다.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고후 8:12).” 억지로는 될 수 없는 것이어서 나는 통화 후에 한동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좋아하는 만큼 안타까움이 커졌다. 내 안에 두시는 주의 빛이 저들, 내 정다웠던 친구들에게도 비추시기를,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4:6).” 오히려 한심하고 답답하게 여겨지는 나의 날들이 감사하였다.

 

“네가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잠 22:21).” 더욱 말씀의 소중함을 느낀다. 이내 붙들고 서야 할 게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다. 뭐라 하든 말씀이었다. 고로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11).” 주께서 내 입술에 덕을 세우시기를, 나의 못난 자아가 또 앞서는 마음이 행여 말씀 밖의 말을 주워 삼키지 않게 하시기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시 79: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