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전봉석 2016. 11. 23. 07:25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잠언 23:26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시편 80:14

 

 

 

마음을 주께 드려, 눈앞의 길을 즐거워하는 것! 내게 두신 한 날의 삶이 주가 맡기시는 사역이었다. 몸과 시간을 돌보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 이 포도나무는 주가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해 힘 있게 하신 가지였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성경이 굳이 어려운 주석으로 이중삼중 해석을 달리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 중에도 미천한 이를 세워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으니 말이다.

 

가만 보면 잘난 사람은 잘난 맛에 살고, 있는 이는 가진 것으로 위로를 얻으며 산다. 그러니 오직 주만 바라며 살 수 있다는 환경과 여건은 은혜이지 않나? 기질적으로 우린 하나님만을 바라고 구하지 않는 종족이니까 말이다. 마음을 주께 두고 그 길을 즐거워하는 자의 복이여, 이로써 하나님이 유쾌해하신다. “내 아들아 만일 네 마음이 지혜로우면 나 곧 내 마음이 즐겁겠고 만일 네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라(잠 23:15-16).”

 

바람이 매섭게 불어댔다. 창밖의 세상과 달리 교회 안은 훈훈하였다. 헐거워진 햇살이 아지랑이로 가물거렸다. 어쩌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교리론을 다시 읽게 되었다. 커피를 내려 책을 끌어당기며, 이 좋은 곳에서 내게 더하시는 주의 은혜가 크다는 데 감격스러웠다. 그러니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까? 이를 누리고 다스리는 일이 또한 할 일이겠다. 오후께 아이들이 와서 글을 썼다. 늘 마주할 때면 마음이 어렵다. 화난 아이들처럼 뚱하니, 마치 죽기보다 싫은 일을 하는 것처럼 시들하다. 사탕을 주고 글의 줄기를 잡아주고, 그냥 두었다.

 

문득, 성경이 어렵다는 것은 관심의 문제이지 학식의 문제가 아닐 것이란 생각을 하였다. 하나님은 그 대상을 학자나 어디 연구기관에 두신 게 아니었다. 특히 신약의 경우 저들 필자의 면면은 지극히 평범하여서 구술에 가까운 서술이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그렇구나. 결국은 기름부음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이었다.

 

아이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 더는 조바심 내지 않기로 했다. 보내시는 이가 또한 다루시고 인도하시는 거였다. 주일을 권하고 예배에 나오게 하는 일은 더더구나 어찌 내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으로, 전날에 친구들과 통화했던 마음도 이와 같았다. 뭐라 한다고 들려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기름부음의 은총이 아니고는 어찌 감당이 안 되는 세상이다. 다들 나름의 생각-철학을 가지고 사는 셈이니까 그게 부서지기 전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앞서 나는 다만 안타까움으로 기도하는 수밖에.

 

가뜩이나 앞쪽 사무실이 이사를 해서 종일 실내가 고즈넉하였다. 마치 일부러 더 조용히 두시는 것처럼 상관할 게 없이 하신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다시 읽고 정리하는 일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이 모두를 관여하시고 다스려 인도하신다는 사실 앞에 무얼 놓고 걱정하는 일 자체가 불순한 게 되었다. 아프면 아픈 대로, 힘들면 힘든 대로,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서…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지금은 잘 이해가 안 가던 것도 ‘그때에는, 알리라.’ 노파심에 다른 염려를 끌어다 안는 일은 어리석었다. 내일이 내일 일을 하게 두는 것. 다만 오늘 하루의 수고로 족하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말씀은 쉽게 다가오지만 깊게 다루시기를 원하신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34).” 그렇다고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35).” 이 모든 일에는 주의 뜻만이 온전하게 설 것이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36).”

 

안 되면 안 된 대로 놓아두는 일. 억지로 풀려고 하기보다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신뢰하는 것. 믿음이란 믿지 않는 이에게는 어리석고 한심하기만 한 것이다. 그런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그렇구나, 그러시는 거였구나! 지금은 지나고 난 뒤에야 알지만 그때에는 모든 것을 알리라. 어느 것도 주가 이루시지 않은 게 없다. 돌아보면 나의 생은 온통 그러하였다. 안달복달 죽을 것처럼 들볶던 것도 이내 잠잠하여서 보면 주의 손길이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시 80:19.”

 

그러므로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잠 23:17).” 부러움이란 참으로 간사한 것이어서 저들의 형통함이 죄악된 것을 보면서도 시기는 멈추지 않고 질투는 속을 어렵게 한다. 그러지 말고 ‘항상’ 주만 경외하는 것. 아, 그래서 “진리를 사되 팔지는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23).” 하시는 거였구나!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상처가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29).”

 

스스로 ‘혼합한 술’을 찾아 일을 도모하고 함께 어울리며 당장에 이루어지는 일에 여념이 없어 스스로 만족해하며 그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하는 것이다. 하나 그것은 외로움이 가중시키고 의심을 더해 서로의 대화도 몰래 녹음해야 하는 세상이었다. 자아도취에 빠져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35).” 이런 걸 보면 참 어리석은 게 인간이다. 저마다 자기 생각에 몸서리를 친다. 하나님 없는 자리의 허망함이여. 끝내 모든 것을 잃고서야 잠잠하려는지!

 

늘 보면 우린 문제의 해결을 찾으려 하는데 성경은 이미 해결되었음을 알리고 계신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 후회란 ‘아, 그렇구나. 그랬어야 하는구나.’ 하는 한탄이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처럼, ‘우물쭈물 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어찌 다 끝난 뒤에야 비로소 아는 것일까? 훗날 주 앞에 섰을 때 주체할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형벌을 받을 것이다.

 

이에 믿는 자로 산다는 것은 훗날에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그 익숙한 주의 영광에 동참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욥 9:2).” 더욱 주를 바라며 그 뜻을 마주하고 서는 일,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시 80: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