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
잠언 25:21-22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시편 82:3-4
벌써 6, 7년은 족히 지났을 텐데 그때 글짓기를 배웠던 아이가 페이스북에서 친구가 되었다. 이게 얼마만인가 싶어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물었다. 그러다 돌아오는 주일날에 예배에 나오겠다는 데 놀랐다. 군포에서 인천까지,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 얼굴도 잊었고, 기억만 가만히 아른거릴 뿐이었다. 그때가 중학교 1학년인가 그랬으니까… 종일 설교원고를 작성하면서, 오후께 아이들 수업을 하면서도, 주께서 어찌 인도하시려나… 생각이 많았다.
그러게. 더는 안 올 모양이다 했던 탈북아이가 다 늦어서 왔다. 생각 같아서는 그만두라고 하고 싶은데, 내가 그러는 건 아니겠다 싶어 말을 삼켰다. 뭐라 하지 않으니까 아이가 먼저 무슨 글을 써야 하냐며 물었다. 것도 참 희한하였다. 당시 팔레스타인지방에는 불이 귀했고, 이 불씨를 ‘그의 머리에 놓는 것’ 즉 고마움으로 각인되는 게 중요할 거였다. 오늘 말씀은 그럴 수 없는, 그러기 싫은 상대에게 그리하라고 이른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마주하기 싫은, 원수 같은(!) 아이다. 내가 어떻게 했는데… 하고 생각하면 괘씸하기만 하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러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성경도 아신다. 한데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즉 저에게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씀의 실제다. 이는 저를 보고 하는 게 아니라,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 주께서 저를 내 앞에 두셨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저 아이에게 어떻게 대했던가, 기억도 나지 않는데 아이는 뭐가 자꾸 고맙다고 인사를 하였다. 숙대국문과를 다니고 있는데 그때 글쓰기를 배워서 그 덕분이라고 하는데, 그게 또 신기하였다.
그런 것이구나. 어느 훗날 이 탈북아이도 뭐가 될지 어찌 알까? 하루 이틀 만에 두 편을 쓴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거여서, 두 편 다 쓰면 짜장면 사줄게! 하고 독려하였다. 마음으로 대하라고 하면 얄미워서 못한다. 돈이다 생각하고 하면 것도 힘이 되겠으나 언제부턴가는 돈도 없이 수업을 하니까 것도 예외가 되었고! 가끔 아이들을 대하면서, 그럴수록 더 성심껏 잘해야지! 하는 다짐을 하는 건 행여 공짜로 가르친다고 성의가 없나, 싶어서다. ‘주께서 갚으신다.’는 말씀이 주께서 되물으실 수 있다는 소리로 들린다.
그런 점에서 오늘 시편의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이는 주의 사랑이 사람의 사랑과 다른 것을 알겠다. 감사를 되돌려 받을 때 오늘의 선은 헛되다. 저에게 다시 되돌려 받을 수 없을 때, 그런 대상의 경우가 대표적으로 아이들이다.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또한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위하여, 이를 묵상하는 데는 어제 설교원고를 작성하면서 주신 은혜와 같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곧 이 말은 참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하고, 감사하면서도 두렵다.
값없는 사랑을 받는다는 건 그 값으로 내어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 안에선 이미 계산을 하고 어떤 꿍꿍이가 앞선다. 이에 걸맞지 않으면 서운하고 괘씸해서 그에 따른 대응을 서슴지 않는 것이다. 흔히 ‘내가 어떻게 했는데?’ 하는 식의 갈등이다. 한데 오늘 성경은 아예 그와 같은 충돌을 방지하신다. 되돌려 받을 수 없는, 그럴 마음이 아닌 참 사랑으로의 예행이다. ‘나의 의는 더러운 옷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 이미 나의 행위를 의라고 여기는 순간 변질이 된다. 잘해줘야지, 할 때 벌써 마땅히 누릴 마음의 자세를 취한다. 어느 가게 앞에 쓰러진 입간판을 세워주면서도, 복도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 사과 한 알을 건네면서도, 같이 쓰는 사무실 내 공동구역을 청소하면서도 어김없이 나는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의 마음이 앞서는 걸 느낀다. 누가 봐주길, 어쩌면 이 글을 쓰면서도 은연중에 누가 좋게 여겨주길 바라는 마음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안 그런 사람이 어딨어? 하겠지만 그럴 수 있어야 한다고 성경은 이르신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3-4).” 모든 건 ‘하나님과 나의 문제다.’ 요즘은 부쩍 그런 생각을 자주한다. 구제함에 있어서도 저와 나의 일이 아니다. 하나님 눈 앞에서의 일이다. 곧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1).” 그런데 이게 거의 본능적으로 ‘알아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2).” 아, 내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알겠다. 몇 년이 지나고, 나는 아예 잊고 있었는데 어느 아이에게 그때 일이 고마움이었고, 그것이 진로를 선택하는 데 기준이 되었다. 잘했든 못했든, 좋게든지 나쁘게든지 나는 누구에게 영향을 끼친다. 더욱이 아잇적에야! 아, 그러니 이 일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이와 같은 고백 앞에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누가 알까, 싶지만 우선은 내게 두신 양심이 알고 무엇보다 주께서 아신다. 양심이야 늘 위조와 날조에 능한 것이어서 제 입맛에 맞게 변색이 되니 믿을 게 못된다. 이에 말씀의 의미는 뚜렷하다. ‘내 의는 더러운 옷 같다.’ 그것은 ‘다 잎사귀 같이 시든다.’ 끝내 바람에 쓸려갈 뿐이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아,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복이 된다. ‘모든 사람’에는 어찌 좋은 사람만 속할까. 더는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 수두룩하다. 이에 저들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니! 이는 선을 행하는 데 있어 하나님을 보고 하는 수밖에 없다. 아래층 아이엄마를 보면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는 것 같다. 또? 하고 짜증부터 올라온다. 그러니 사람을 보고는 ‘주를 보지 못하리라.’ 사람에게서 만족함을 얻어도, 실망하여 불쾌감만 느껴도 그 결과는 다르지 않은 것이다.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하시는 말씀의 의도를 알겠다. 화평하고 거룩을 이루라는 게 아니다. 그리 노력해서 도달해야 하는 목표가 아닌 것이다. 이미 있는, 완성된 화평과 거룩을 따르라는 것.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그 표본이 되신다. 주님은 앞서 화평이 되셨고 거룩이시다.
내가 스스로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화평은 없다. 죽었다 깨어나도, 어떤 수고와 애씀으로도 거룩을 이룰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내가 화평이 되고 거룩이 되는 길은 화평의 자리에, 거룩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다. 용해되고 분해돼야 한다. 섞이는 게 아니라 사라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연단하시는 거였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잠 17:3).”
지나간 아이들이야 이미 어쩔 수 없는 노릇이겠으나 현재 내 앞에 두시는 아이와 마음과 상황과 여건이 모두 그런 이유에서였다. 화평과 거룩을 따르게 하시려고, 왜 마음을 연단하시는가 했더니…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 제물이 되셨다는 사실 앞에 거룩하게 서게 하시려고,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그런 거였다.
말씀을 끌어안고 있다 보면 그 안에 내가 있었다. 어느 구절도 나 들으라고 하신 소리가 아닌 게 없다. 도대체 얘네들을 어쩌면 좋을까, 싶다가도 그건 내가 고심할 문제가 아닌 것을 발견한다. 나는 다만 그 머리에 숯을 피우는 것일 뿐. 되돌려 받으려는 데서가 아니라 그냥 주는 데서 주께 상쾌함이 되는 것.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 25:13).”
섣불리 내가 위로하고 뭘 어떻게 건사하려 드는 일로 우습게 될 수 있다.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음 같고 소다 위에 식초를 부음 같으니라(20).” 내 아무리 좋은 의도로 얘기했다고 해도 그리 듣지 못하는 데야 별 수 있나? 아이를 답답하게 여길 게 아니라 우리의 본성이, 죄로 물든 심약한 마음이 그런 것을. 그러므로 주께 기도한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11).” 그러므로 내가 말로써 저를 격려하고 위로할 수 있게 하시기를. 고로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12).”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 앞에 선다. 나는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시 82:8).” 하여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딤전 3: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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